<연재> 문지연의 좌충우돌 인도 유랑기-38화: 첸나이 편 3회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애정 혹은 진저리. 애정은, 드넓은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수많은 문화유산, 그 속에서 맥을 잇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의다. 반면 가난, 더러움, 무질서와 끊임없는 골탕, 치근거림은 인도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이유다. 필자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인도에 두 번이나 가면서 때마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도 순간순간 용솟음치는 감동과 환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도는 그래서 애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멀리 떠나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억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때 그 시절의 인도 유랑기를 펼쳐본다.

 

▲ 아잔타 한 석굴 사원 입구에 선 여인들. 웅장한 격식이 느껴지는 사원과 그 앞의 화려한 빛깔의 전통의상 `사리`를 입은 여인의 모습이 대조돼 인상적이다.



다음 날 모처럼 일찍 일어나 여유로운 아침을 맞았다. 조양은 동네 산책을 하겠다며 나갔고 필자는 인도에 와서 처음으로, 아니 배낭여행 중에 처음으로 룸서비스를 주문하기로 마음먹었다. ‘라씨’와 ‘짜이’를 마시며 나름의 호사스러운 아침을 보내겠다는 생각이었다. 이날 아침이 인도에서 맞이하는 마지막 아침이니 말이다.

방안에 놓여 있는 전화기의 버튼을 꾹꾹 눌러가며 숙소 직원과의 통화를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 직원에게 차와 치즈샌드위치를 가져다 달라고 주문했다. 음식 값은 모두 더해 120루피였다.

‘딩동.’ 15분쯤 흘렀을까. 벨 소리와 함께 조용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주문한 차와 빵이 도착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문을 열었다. 10대 소년이 한 손에는 빵이 든 쟁반을 다른 손에는 음료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서 있었다. 그에게 팁 20루피를 건넸다. 한국에는 없는 ‘팁’은 외국에 나갈 때마다 화장실만큼이나 불편했던 문화였다. 인도는 ‘반드시’는 아니었지만 그것이 곧 ‘예의’인 나라에 갈 때면 더욱 더 신경이 곤두섰다. 손 마디마디가 어색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주는 사람이 오히려 더 민망해 죽겠는 이 문화는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참으로 불편하고 불편한 이 문화에 언제쯤이면 적응할 수 있을까.

종업원이 들고 온 빵은 플라스틱 뚜껑으로 대충 덮여 있었다. 쟁반을 들고 두 걸음을 걷는 동안 왠지 모르게 뚜껑 안의 모습이 훤히 그려졌다. ‘불안한 비주얼, 커져만 가는 불안한 이 느낌. 어쩐다!….’ 

뚜껑을 살포시 열었다. 역시나 모양새가 영 탐탁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빵을 한 입 깨무는 순간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맛이래?’ 겹쳐진 빵을 살짝 벌리며 내용물 실태 조사에 나섰다. 어무나, 치즈 샌드위치를 시켰는데 빵 사이에 채소 한 장 없이 치즈만 덜렁 껴 있는 것이 아닌가. ‘내용물이야 그렇다 치자.’ 오래돼 보이는 빵은 푸석푸석하다 못해 맛도 몹시 이상했다. 유통기한을 석 달 보름은 족히 넘겨야 나올 법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맛이었다.


 

▲ 처음으로 주문한 룸서비스. 채소하나 없이 치즈와 빵으로만 이뤄져 있다. 빵이 오래돼서인지 `우아한 아침식사`는 결국 엄청난 복통과 배탈만을 남겼다.



깔깔한 빵과 그 사이에 낀 치즈 한 장, 그리고 그것을 찍어 먹을 케첩. ‘아~ 당체 이 무슨 조화인가!’ 그래도 꾸역꾸역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한 입 더 먹을수록 두 눈은 점점 더 동그래지고 동공은 한 없이 확장되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돈이 아까운 것을 어쩌나!!

그러나 ‘미련 곰탱이’ 같은 짓의 결과는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여실히 드러나고야 말았다. 먹은 지 1시간도 안 됐는데 뱃속에서 폭발적인 굉음과 거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습경보.’ 삽시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더니 배가 쥐어짜듯 아팠다. 된통 배탈이 난 것이었다. 수 십 번 화장실을 오가며 끊임없이 설사를 이어갔다. ‘하, 이 무슨 바보 같은 짓이람.’ 우아한 마지막 만찬은 결국 반복적인 설사와 대량의 식은땀만을 남긴 채 초라하게 끝을 맺었다.ㅜ.ㅜ

안타깝게도 그 후유증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지독한 설사가 오후 늦도록 이어졌다. 떠나기에 앞서 지인들에게 줄 작은 선물을 사러 밖으로 나갔는데 뱃속에서 연신 천둥번개를 쳐댔던 것이다. ‘우르르 쾅.’ 선물을 고르다 말고 몇 번씩 가게 옆의 옆의 옆의 상가에 붙은 화장실로 줄행랑을 쳤다. 정말이지 레스토랑이 활성화 되지 않은 듯 한 숙소에서는 절대로 음식을 시켜 먹지 마시기를! ‘근데, 내가 묵은 곳도 나름 중급 호텔이었는데…. 참나.’ ㅜ.ㅜ

또 하나. 새삼 느꼈지만 우리나라처럼 화장실 인심이 후한 나라가 없다. 거리에 공중화장실도 많고 지하철, 건물, 패스트푸드점, 주유소 등등 어디서든 쉽게 무료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인도도 그렇거니와 유럽, 아시아 등등의 여러 나라를 갈 적마다 화장실 이용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고생을 했었다. 정말 난감했던 수많은 순간들, 지금 생각해도 그저 아찔하다.
 

 

▲ 아우랑가바드 `비비 까 마끄바라`에서 만난 아이들. 현지인들은 타지마할과 비슷한 생김새 때문에 이곳을 `리틀 타지마할`이라고 불렀다. 카메라에 `리틀 타지마할`을 열심히 담고 있는데 느닷없이 아이들이 렌즈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자신들을 찍으라는 것이었다.^^



늦은 오후. 뱃속의 폭풍 변주가 드디어 끝을 맺은 모양이었다. 가만 보니 첫 여행 때도 그랬고 다시 찾은 지금도 그렇고, 인도는 한 번도 마지막을 곱게 보내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뒤끝 작렬이었다. 배탈, 설사를 동반해 지독하게 몸 고생을 시킨 뒤에야 애처로운 이별을 고하고는 했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는 애처로운 이별 앓이 인가….

아침나절 뒤틀렸던 장이 제자리를 찾은 뒤 곧장 에그모어역으로 향했다. 6루피 하는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앞서 밝힌 바 있지만 첸나이의 지하철은 열차가 달리는 중에도 객차의 문을 닫지 않는다. 때문에 달리는 열차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승객이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 또 하나. 한국의 열차처럼 칸과 칸 사이를 이동할 수 없기 때문에 미리 위치를 파악해 놓고 탑승해야만 한다. 필자처럼 여성 전용 칸에 타길 희망한다면 플랫폼에서 미리 칸의 위치를 파악한 뒤 열차에 올라야한다.

첸나이의 공항에 도착하니 만감이 교차했다. 지독한 더위에서 벗어나 그나마 시원한(한국 역시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시기였으나, 어디 인도의 더위와 비교할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언제다시 이 땅을 밟을지 모른다는 기약 없는 미래가 참으로 아쉬웠다.

공항은 아무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입구에서부터 여권과 티켓을 확인해 이용객만을 입장 시켰다. 때문에 가족, 친구, 연인 등 떠나보내는 사람을 잠시나마 곁에 더 붙들고 싶은 이들은 애처롭게 바깥 창문에 매달려 있어야만 했다. 아쉬움 가득한 눈빛을 하나 가득 보내면서 말이다.
 

▲ 델리 `빠하르 간즈`의 한 상점. 알록달록한 색깔의 옷과 가방이 눈에 띈다.



공항에 너무 일찍 당도한 탓에 비행기 탑승 때까지 족히 5시간을 견뎌야만 했다.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땀에 절어 끈끈한 몸을 몇 번씩 말았다가 펴기를 반복했지만 야속하게도 시간은 더디게만 흘렀다.

세월아 네월아, 느리기만 했던 시간이 흐르고 흘러 드디어 항공권 발권이 시작됐다. 서둘러 발권 창구로 다가가 여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또 말썽이 생겼다. 발권 창구의 직원이 인터넷으로 항공권을 결제할 당시 사용했던 신용카드를 달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닌가. 조양은 당시 사용했던 카드를 빼먹고 왔더랬다. 인도로 출발할 당시에도 한 차례 소동이 있었는데 무사히 출발을 했으니 돌아올 때는 괜찮을 것이라고 염려를 붙들어 맨 찰나였는데, 눈앞이 캄캄했다. 인도로 출발하던 당시에는 문제의 신용카드가 없어 인천공항 내 타이항공사 사무실로 찾아가 비행기 티켓 결제 내역이 적힌 영수증을 출력해 넘기고서야 비행기 표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그 일을 또 하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통하는 이곳에서 말이다. 참으로 기가 찼다.

“한국에서 출국할 때 영수증 확인을 했으니 된 것이 아니냐”며 항의를 했지만 직원은 “규정상 도리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다른 방법을 문의 했다. 그는 카드 대신 카드 번호라도 내놓으라고 했다. 그것조차 모르면 절대로 표를 내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조양은 서둘러 서울의 가족에게 전화를 했다. 새벽이 넘은 시각, 가족들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였다. 좋은 소리가 나올 리 만무했다. 전화통화가 오가기를 수십 번. 조양의 가족들이 드디어 카드를 찾은 모양이었다.

 

▲ 13km의 모래사장이 펼쳐진 첸나이의 마리나 해변



“카드가 제자리에 없어서 온 집안을 헤집었잖아. 아주 간신히 찾았네.” 옆에 서 있자니 전화기 밖으로 터져 나오는 엄청난 원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한동안 조양은 이억 만 리에서 전해져오는 어머니의 애정 넘치는 거친 언사를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ㅎㅎ 항공을 이용할 적에 티켓을 결제했던 신용카드를 제시해야만 발권해주는 항공사가 꽤 많으니 꼭 지참하시길!

어렵게 티켓을 받아들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지난 여행에서도 그랬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아쉬움과 섭섭함이 밀려왔다. ‘언제 또 이곳에 올 수 있을까? 다시 오고 싶단 생각이 들긴 할까?’ 마음속의 답은 ‘모르겠다’ 였다.

그리고 당시의 기억을 정리하는 지금 이 순간은 ‘꼭 한 번 내 아이와 다시 가리라’는 다짐을 한다. 거리 곳곳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인류의 유구한 역사, 그 위대한 문화유산을 눈과 마음에 담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산교육이 되리라는 확신에서다.

그렇다, 그곳을 완전히 벗어나고 난 뒤 비로소 나는 또 다시 ‘인도 앓이’를 시작하고야 말았다.

ohora88@naver.com<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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