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이사-1회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역사는 얼이고 혼이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서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은 역사를 잊은 것인지 잃은 것인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한일위안부 합의, 뉴라이트의 건국절 주장, 상해임시정부 법통과 선열들의 독립운동 부정 등 이른바 ‘역사세탁’ 기류가 만연해지고 있다. 지난 8월 22일은 나라를 빼앗겨 강제병합조약을 맺은 지 106년이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선 또 다시 106년 전과 유사한 국면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금 역사를 올바로 세우는 문제도 중요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삐뚤어진 역사관도 아시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장차 통일과 민주주의를 왜 지켜야만 하는지를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반성하고 배워야 한다.”

 

▲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이사

 

역사문제연구소 이이화 이사의 일침이다.

이 이사는 “해방 70여 년이 지난 지금 2016년 대한민국은 총체적 위기다. 근본원인은 역사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기득권세력의 퇴행적인 역사인식이 문제다. 이전부터 독립운동 정신을 폄훼하고 식민지지배와 친일의 정당성을 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왔다. 이명박 정권은 아예 정권차원에서 독립운동을 부정하고 친일·독재 미화를 노골화했는데, 뒤를 이어 박근혜 정부마저 끝없는 ‘역사회귀’로 치닫고 있다”고 질타한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역사학계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검정제를 국정제로 탈바꿈해 버렸다. 또한 역사교육 개정고시를 통해 현재 사회과 6-1교과서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했다. 이런 일은 이슬람권이나 공산국가 이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37년 경북 대구 태생의 이이화 이사는 문학도이자 역사학자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사장, 역사문제연구소 소장, 고구려역사문화재단 상임공동대표, 홍익사상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한 역사학계의 대표적 실천운동가이다. 역사바로세우기·과거사청산운동·친일인명사전편찬·민중생활사 복원과 역사대중화에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제1회 녹두대상, 제1회 임창순학술상, 제15회 단재상, 심산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야기 인물한국사’ ‘한국사 이야기’ 등 100여 권의 편저가 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파주에 있는 자택에서 새로운 책 집필에 몰두하고 있는 이이화 이사를 만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 등 현사회가 당면한 고질적인 사안들을 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다음은 심층인터뷰 전문이다.

 

 

- 성함이 특이하다. 이이화(李離和)란 이름은 누가 작명했나. 또 재야 역사학자로 외길을 걷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아버님이 주역에 밝으셔서(한학자 출신) 자식들 이름을 주역의 괘를 따서 지어주셨다. 내 이름은 태극기의 네 괘인 하늘을 뜻하는 건(乾)과 땅 곤(坤), 물 감(坎), 불 이(離)에서 네 번째 괘인 이(離)를 따서 이이화(李離和)가 됐다. 이(離)는 한문으로 풀면 이별할 이지만, 주역에서는 남방 화(火)로 불을 뜻한다. 불은 주위를 밝게 비춰주지 않는가. 이화(離和)는 세상을 불처럼 밝히면서 화평을 이루게 한다는 뜻이다. 아버님 존함은 ‘이달’이다. 역사학자가 된 계기를 말하려면 좀 길고 복잡하다. 광주에서 어릴 때 아버님으로부터 한문을 배우면서 컸는데 한번은 가출을 했다. 그것은 아마도 한문보다는 문학에 대한 욕구의 발로였던 것 같다. 광주고등학교 시절에는 현대문학에 푹 빠졌다. 1950년대 당시 내가 다녔던 광주고는 문예학교라 불릴 정도로 시인과 소설가가 등 문인들을 많이 배출했다. 아예 문학과를 만들어 놓았을 정도니까. 고 1때부터 글을 많이 썼고 지금도 글이 많이 남아 있다. 그런 분위기에서 문학 활동을 하면서 문학인과 교류를 하고 만남을 통해 등단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입학했다.

 

 

- 문학도에서 역사학도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 그 당시 워낙 문학에 빠져 책도 많이 읽었다. 6.25 직후라 인쇄도 조잡한 그런 책들을 읽으면서 현대문학에 심취했다. 당시에는 문단데뷔를 위해 유명한 ‘학생문단’에도 기고를 많이 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형편이 어려워 중도에 대학을 중퇴한 20대에 우연히 시국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박정희 군사혁명인 5.16을 현장에서 목격한 것이다. 문득 그런 현실이 이어져 온 한반도가 머릿속에서 그려졌다. 일제 36년 식민지통치가 끝나고 얼마 뒤 6.25전쟁으로 남북이 갈라지고 군사정권이 막 들어서려는 시기였다. 불과 20대 나이였지만, 문학도 중요하지만 역사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도서관에 박혀 역사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독학을 했다. 역사학도도 아니면서 역사책을 많이 읽었다. 당시에는 이병도가 쓴 식민사관의 역사책이 대부분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지만…. 그렇게 역사책들을 섭렵하면서 자연히 역사학자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30~40대 나이에 야간대학 역사학과에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듯싶었다. 그러다가 동아일보 등에 있으면서 역사관련 단편 글들을 계속 쓰고 본격적으로 학술지 등에 글을 쓰다 보니 나중에 인정을 해주고 해서 역사학자가 된 거다.(웃음) 나는 역사학과 출신도 아니고 계보도 없었지만, 나중에는 모두 같이 어울렸다. 지금도 이쪽(역사학계) 분들 다 만난다.

 

 

- 지금대로라면 국정 역사교과서가 내년 3월 학교에 보급된다.

▲ 기가 찰 일이다. 이만큼 민주주의가 정착돼 경제발전을 이루고 자유선거를 하던 한국에서 엉뚱하게 역사교과서를 가지고 국론을 분열시키고 있다. 다행히 국어만큼은 아직 별 문제가 없지만….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민주주의 헌법정신에도 안 맞고 세계에서도 거의 유례가 없는 일이다. 있다면 이슬람권이나 과거 구소련에 종속되어 있던 공산국가들이었다. 심지어 공산권인 베트남, 중국도 바꿨고 동남아 국가 어디에도 없다. 유럽이나 미국도 검인정 제도가 아니고 자유채택제다. 이들 나라의 학교들에선 여러 종류의 역사책 중 학생들에게 특정한 역사를 가르치고 싶으면 그 중에서 한 가지 역사책을 고르면 된다. 이런 게 역사교과서 교육추세인데 우리만 거꾸로 가고 있어 답답하다. 국정화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곳이 이슬람권이다. 그런데도 고집스럽게 국정화 작업에 ‘올인’하고 있다.

 

 

- 현 정권이 국정화에 몰입하는 근본 이유가 무엇이라고 보나.

▲ 두 가지로 본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만든 5인방이 있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특히 뉴라이트를 통해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한 모임이 있는데 이들을 규합해 만든 작품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다. 거기에다 교학사가 발행한 교과서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적극 지지한 것은 친일파들이 국가를 주도적으로 세우고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룩한 소위 산업화세력이라는 뜻이 담긴 거다. 친일파가 주축이 된 산업화세력은 독립운동세력과 민주운동세력, 통일운동세력들과 자연히 대립하고 충돌하게 되어있다. 산업화세력, 즉 조국근대화가 고 박정희 대통령의 큰 업적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옆에서 보고 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보았을 때 너무 매혹적인 거다. 박근혜 대통령의 숙원은 아버지가 이뤘던 한국근대화와 산업화를 찬양하는 것이다. 따라서 5.16혁명 세력들의 위대한 업적인 산업근대화 세력을 부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다보면 민주운동세력과 독립운동세력, 통일운동세력 등과 충돌하게 될 것을 알고 있다. 그렇게 되면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은 축소되고 역사적 저평가를 받게 되니까 ‘국정화’라는 역사쿠데타를 통해 여러 민주세력들을 약화시키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이 친일세력들을 재등장시키자 여기에 맞선 독립운동세력들이 친일파 청산을 강력히 외쳤다. 친일 근대화 산업세력과 통일운동세력과의 대립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지만 지금까지 강행하진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런 구도 속에서 국정교과서라는 ‘괴물’이 나타난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도 그렇고 뉴라이트세력도 1948년을 건국절로 주장하고 있다.

▲ 오래전부터 주장해오던 것이다. 뉴라이트는 1948년 8월 15일을 ‘대한민국 건국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헌법에는 엄연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고 명시되어 있다. 여기서부터 모순이 일어난다. 헌법전문에 분명히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3.1정신과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을 법 그대로 계승했다면, 여기서부터 건국역사의 뿌리를 찾아야 맞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가 만든 제헌헌법은 매우 민주적이다. 토지문제라든가 직접선거, 평등선거와 비밀선거 등 민주주의 기본원칙을 모두 갖추었으며 해방될 때까지 유지되어 왔다. 물론 당시는 일제시대여서 임원들이 일제 탄압으로 외국 망명을 했거나, 조직이 축소되는 우여곡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민주적 선거제도를 통해 대통령을 뽑는 등 법적기능을 다했다. 제헌헌법은 이렇듯 헌법적 생명력을 이어왔다. 그런데 상해임시정부를 열렬히 주장했던 인물이 바로 이승만이다. 그는 상해임시정부 헌법을 건국의 시작으로 봐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도 처음에 반대하지 않았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 앞장선 것이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해방이후 남한은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다. 북한은 1948년 9월 9일을 건국일로 정했다. 북한 정권은 남한의 상황을 눈여겨보면서 미리 준비를 해오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선포해 버렸다. 북한만 건국일로 돼있다. 이유는 상해임시정부를 정면으로 부정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소위 김일성 주체사상이고 연호도 ‘주체(主體)’로 쓴다. 우리는 1948년 전에는 ‘단기(檀紀)’를 썼고, 1919년 임시정부 당시에는 ‘민국(民國)’이라 썼다.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정권을 반대할 이유로 생긴 것이 아니고, 임시정부의 법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다. 북한만 이것을 단절한 정권이고 오히려 이적행위를 하는 정권인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역사학계의 거센 비판에도 불구하고, 역사교과서 검정제를 국정제로 탈바꿈해 버렸다. 또한 역사교육 개정고시를 통해 현재 사회과 6-1교과서에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대한민국 수립’으로 기술했다. 이런 일은 이슬람권이나 공산국가 이외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2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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