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연의 아주머니>

시국이 이런데… 시국이 이런데 집에서 애나 보고 있는 게 죄인처럼 느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어쩔꼬. 대통령이 어떻든, 최순실이 어떻든 엄마들의 시계는 돌아가야만 한다. 시국 걱정을 하며 절망감에 휩싸인 채 손을 놓고 있으면 가정은 엉망이 된다. 엄마의 손길이 뜸해진 아이들은 당장에 표시가 나고 남편은 즉석밥을 데워먹으며 불만을 토해낼 게 뻔하다.

그래서 엄마들에겐 최순실의 국정 농단보다 이번 달 백화점 세일 날짜가 더 중요하다. 아니 중요하다기보다는 더 현실적이다. 비선 실세가 나라를 망쳐버린 건 현실감이 멀지만 세일 때 월동준비를 해두지 않으면 당장의 가계에 부담이 된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나만의 자기합리화인지도 모르겠다. 시국이 이런데, 백화점 세일 날짜를 쏜살같이 맞춰 사재기에 나선, 영락없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내 모습에 대한 자기합리화. 아줌마이긴 하지만 한 때 정치부 기자로 활동했던, 뉴스를 보며 교차하는 많은 생각들을 억지로 눌러버리고 현실의 삶 속에서 발버둥치는 내 모습에 대한 자기합리화.

에휴. 모르겠다. 아무렴 어떠냐. 최순실이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우리 애들 겨울 잠바를 사 줄 것도 아니다. 난 그냥 내 위치에서 열심히 살자. 그게 위에서 망쳐버린 나라를 살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니까.

어쨌든 그러한 이유에서 백화점 세일 카탈로그를 받은 날부터 난 의지를 불태웠다. D-day까지 3일. 그 날은 특별히 9시에 조기오픈을 한단다. 흠. 당일에는 아이들에게 시리얼을 먹여서 빨리빨리 등교를 시켜야겠군.

카탈로그를 꼼꼼히 살피며 동선 짜기에 나섰다. 1순위로 공략해야 할 것은 한정판 세일 품목들이다. 카탈로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사진 발견. A브랜드에서 카키색의 아이들 야상을 1만2천원에 판단다. 30벌 한정.

SBS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전지현이 입고 나온 이후 겨울철 머스트 잇 아이템이 된 카키색 야상. 나란히 야상을 입은 쌍둥이가 눈썰매장에서 뛰어놀 모습을 생각하니 웃음이 헤벌쭉 난다. 오케이! 니가 1순위다.

만약 이 곳에서 야상을 사는데 실패할 경우 다음 차례는 B브랜드다. 여자아이들 옷만 파는 이 곳에선 밑단이 항아리치마처럼 퍼진 곤색의 다운 잠바를 1만9천원에 판단다. 역시 한정수량.

이 곳에서도 실패할 경우엔 30벌 한정의 C브랜드, 그 다음엔 50벌 한정의 D브랜드. 이렇게 한정수량 세일하는 곳들을 먼저 돌며 필요한 것들을 득템하기로 했다.

D-day. 결전의 날이 되자 나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아이들이 도와주지 않는다. 아들은 평소엔 10분이면 뚝딱하는 시리얼을 20분 넘게 안 먹고 미적댄다. 스스로 먹게 하면 시리얼은 빼놓고 우유만 떠먹어서 아침으로 시리얼을 줄 때는 내가 먹여준다.

“빨리 먹어라. 이 눔아~”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입 먹고 고개를 홱 돌리고, 두 입 먹고 드러눕는다.

딸도 말썽이다. 갑자기 아침에 일기장을 잃어버렸다며 온 집안을 다 뒤지고 난리법석이다. “전날 책가방 싸 놓으랬지!”. 한 바탕 고함을 지르고 바쁘게 움직여 겨우 백화점에 도착했다. 9시13분. 꼭 이런 날은 엘리베이터도 늦게 오지. 7층에 도착하자마자 뛰듯이 걸어 매장에 도착. 점원을 보자마자 “야상 140, 150 사이즈 한 벌씩이요!”라고 크게 외쳤다.

돌아보며 웃는 점원. “호호호. 다 팔렸어요”. “앗? 정말요?” 주위를 둘러보니 매장을 꽉 매운 아줌마들의 팔에 너나 할 것 없이 야상이 걸려 있다. 시계를 보니 9시 15분.

아쉬워할 틈도 없다. B브랜드로 직행. 다행히 이 곳에선 딸이 입을 공주풍 다운 잠바의 사이즈가 아직 남아 있다. “1만9천원입니다. 가격 너무 잘 나왔죠?”라며 말을 건네는 점원에게 2만원을 주며 “저 C브랜드 가야 해요. 잔돈 넣어서 포장해 대충 한 쪽에 놓아 주세요. 좀 이따 찾으러 올께요”라며 휙 돌아 나왔다. 아줌마들의 세일 전쟁이 어떤 건지 훤히 아는 점원은 “천천히 다 보고 오세요~”라며 친절함을 보인다.

‘다리야~ 걷는 듯이 달려다오.’ 무거운 다리를 재촉하며 C브랜드에 도착했다. 여기는 2만5000원에 다운 잠바를 파는 곳. 하지만 옷걸이에 걸린 옷들을 보는 순간 “으~ 넌 탈락!” 아무리 싸다고 해도 기본적인 예의는 있어야지. 80년대에나 입었을 듯한 디자인에 이토록 구린 색상이라니. 2500원에 사라고 해도 안 사겠다. D브랜드로 갔더니 역시나 솔드 아웃.

아줌마들이란 어찌 이리도 부지런할꼬. 대충 집에서 밍기적거리다 늦게들 나오면 좋으련만.

한정수량 품목 중 미리 찜해둔 4개의 브랜드를 모두 돌고 나니 이제야 한숨 돌릴 여유가 생긴다. 화장실도 한 번 다녀오고, 거울 앞에서 입술도 새로 바른 뒤 천천히 아동복 전체 코너를 돌기 시작. 그 전에 아까 사서 맡겨둔 딸래미 잠바를 먼저 찾고.

가다보니 아이들 방한 부츠를 파는 매대가 나온다. 3만5900원, 3만9900원짜리 부츠들을 전부 만원씩에. 크고 넓은 매대에 적어도 열 개 종류의 부츠가 산처럼 쌓여 있고, 적어도 열 명은 넘을 아줌마들이 빙 둘러서서 바쁘게 손을 움직이고 있다.

디자인과 사이즈별로 정리된 게 아니라서 산처럼 쌓인 부츠들을 뒤져 원하는 종류의 사이즈가 있으면 가져가는 식이다. 아이들이 겨울에 신을 방한 부츠는 굳이 비싼 것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12월부터 3월 초까지 100일 남짓 신고 버릴 물건이기 때문이다.

날마다 조금씩 발이 커가는 아이들은 매년 새로운 운동화와 구두, 여름 장화와 겨울 부츠를 필요로 한다. 어른들처럼 한 번 사서 오래 신는 게 아닌 데다 한 번 살 때마다 2개씩. 쌍둥이의 옷과 신발을 모두 사려면 한 푼이라도 싸게 사는 게 그저 장땡이다.

크게 호흡한 번 하고, 전투 의지를 다잡은 다음 매대 앞으로 출동! 딸래미가 좋아할만한 샤방샤방 보석이 달린 핑크 부츠가 있지만 디자인에 치중한 대신 발이 추울 것 같아서 패쓰. 필요없는 물건은 대충 옆으로 휙 던져버리고 모르는 아줌마들과 어깨를 맞댄 채 매대 속을 뒤집으며 부츠 꺼내기 삼매경.

디자인이 훌륭하진 않지만 두툼한 털로 속이 꽉 찬, 보온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부츠를 찾았다. 오케이. 210사이즈. 먼저 찾은 아들 부츠를 겨드랑이에 끼운 채 같은 디자인의 다른 색상으로 190 사이즈를 찾기 시작.

5분 이상을 뒤져 원하는 부츠 두 개를 찾는 데 성공. 얼굴을 드니 맞은편에 딸래미 친구 엄마가 보인다. 바로 전의 나처럼 열심히 매대 속을 뒤지며 사이즈 찾기에 열중하는 그녀. 애가 셋이다. 속으로 큭큭큭 웃음이 난다. 그래. 아이가 하나일 땐 우아하게 평일 날 백화점에 가서 고급 브랜드의 예쁜 신발을 사줄 수 있지만 아이가 둘 이상이면 매대를 뒤져야 한다.

계산을 마치고 아들의 다운 잠바를 사기 위해 다시 한 번 한 바퀴를 도는데 동네에 사는 아줌마들은 반 이상이 다 나온 것만 같다. 몇 걸음 가다말고 아는 얼굴과 인사. 한 매장 거치고 나면 그 다음 매장에서 또 아는 얼굴과 인사. 다들 손에 큼지막한 백화점 봉투를 든 채 만날 때마다 정보를 교환한다.

“실내 상하복 세트 저기에서 1만2000원이야. 빨리 가봐” “이 잠바 여기에서 3만5000원 주고 샀어. 너무 괜찮지?” “기모 타이즈 한 벌에 5000원씩 파는데 있다는데 거기가 어디야?”

그렇게 백화점 내에서 만난 아줌마들의 정보를 토대로 빨간색의 두툼하고 예쁜 아들의 다운 잠바까지 득템. 80프로 할인된 가격으로 3만원 대에 사고 나니 뿌듯함이 밀려온다.

잠바 두 개, 부츠 두 개를 사고 나니 목표로 한 월동준비는 모두 마쳤다. 단 하루 있는 특급 세일을 이용한 덕에 원가 대비 20만원정도를 절약했다. 내 자신이 기특기특. 마치 살림 잘하는 현모양처라도 된 것처럼 의기양양.

이제부터 남은 시간은 번외 쇼핑 타임. 아이들 티와 바지, 치마 등을 마저 둘러본 뒤 아래층 아웃도어 매장으로 향했다. 남편의 다운 잠바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패션 센스가 꽝 중에 꽝이면서도 아내가 코디해 준 옷은 안 입고 무조건 편한 것만 추구하는 남편 때문에 그는 유명한 패션 테러리스트로 통한다. 오죽하면 사람들이 “왜 그 잘난 얼굴을 옷으로 죽이려 하느냐”고 말할 정도.

제발 좀 세련된 거 입어달라고 빌어도 맨날 그놈의 편한 것 타령. 에휴. 이제 나이도 40대에 들어섰는데 사람이 외관도 좀 가꾸고 해야 하는데…. 아이들 야상을 놓친 게 짐짓 미련이 남았던지 남편 옷을 보는데도 자꾸만 야상 쪽으로만 눈이 간다.

흠. 그런데 너무 비싸다. 세일폭도 적어서 기본이 30만원을 넘어가는데 사줬다 또 안 입으면 아까워서 어째. 내 마음에 드는 걸 샀다가 1~2분 뒤 다시 환불, 다른 디자인을 다시 샀다가 5분 뒤 또 환불, 다시 또 다른 걸 샀다가 30분 뒤 또 환불. 이렇게 무려 3개의 다운 잠바를 사고 환불하고 나서 결국 남편 옷은 사지 않은 채 빈손으로 왔다.

사주고 안 입어서 돈 버리느니 나중에 같이 가서 마음에 드는 걸 사라고 해야지. 물론 패션 테러리스트답게 또 이상한 디자인의 구린 옷을 집어 들겠지만 이번엔 물러서지 않고 결사반대를 외쳐야지.

이렇게 백화점 특급 세일의 하루가 부산하게 지나갔다. 시국이 이렇고 광화문에 촛불이 넘실대지만 엄마인 나의 삶은 현실 속에서 째깍째깍 움직인다. 어찌되든 엄마의 시계는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주부, '아주머니'는 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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