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인터뷰>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2회

<1회에서 이어집니다.>

 

▲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

 

- 학부모들이 국정교과서 불매운동에 나섰다.

▲ 검인정 교과서는 담당교사가 3순위까지 추천해 학교운영위원회 심의를 거쳐 선정하지만, 중·고교 국정역사교과서는 심의절차 없이 학생 수만큼 교사가 무조건 신청하도록 되어 있다. 전혀 본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복면집필 교과서 주문을 강요하고 있어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불만이 매우 높다. 2017년 3월부터 시작되는 역사교과서에 무엇이 실려 있는지도 모르는데, 책값을 부담해야 하는 고1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불매운동을 벌이고 나선 것이다. 중학교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역사1, 역사2 교과서를 무상으로 지급받지만 전국의 역사교사들도 역사교과서에 대한 내용구성을 전혀 모른다. 교육부가 일방적으로 하라는 대로 하라는 식이다. 교육부가 나서서 유신독재를 미화하는 현 정부의 교과서국정화를 어떻게 하든 임기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역사쿠데타를 지금 목도하고 있다. 교과서에는 진정한 우리의 한국사와 근현대사는 빠져 버렸다. 오로지 친일과 유신독재만 가르치겠다는 비상식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얘기를 좀 해보자. 방대한 친일인명사전, 편찬배경이 무엇인가.

▲ 지난 2009년 11월 8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친일인명사전이 세상에 나왔다. 4389명이 등재됐다. 이승만 정권 당시 발족했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가 친일경찰의 습격으로 와해된 지 60년 만에 친일인물들에 대한 숨겨진 행적과 친일경력을 보다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첫 성과다. 해방 70년 만에 역사적 청산과 학문적 정리절차를 거쳐 일단락 지었다. 만시지탄이지만 다행이다. 무엇보다 국민적 지지와 동참이 컸다. 또한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구성된 후 8년 동안 연구소 6000여 회원들과 시민들의 성원이 결실을 거두게 한 원동력이었다. 불가능처럼 보이던 친일인명사전 발간배경에는 많은 시대적인 요인들이 있었다. 먼저 1960년대 미국과 소련의 냉전구조 해체와 국내의 민주화라는 시대적인 상황이 있었다. 또 50여 년간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금기영역이었던 친일문제를 객관화하고 공론화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로 사상과 학문·언론 자유가 신장되면서, 친일문제에 대한 연구영역도 사회적 합일점을 획득하게 됐다. 사전편찬을 위해 8년여를 고생한 연구원들은 친일역사 사료의 방대함과 이에 대한 정보접근이 어려워 이중고를 겪었다. 그럼에도 외적으로는 국사편찬위원회 등 여러 정부기관이 보유한 사료공개시스템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1990년대 말부터 시작한 사전편찬 예산에는 약 30억 원 정도가 소요됐다.

 

 

- 사전편찬 작업에 얼마나 많은 인원이 참여했나.

▲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위한 자료수집과 데이터 구축 등에 막대한 예산과 인력이 필요했다. 민간연구소로서 단독추진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정 확보와 학계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과제였다. 그렇게 해서 1999년 8월 11일,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결의하고, ‘제2의 반민특위’를 만들자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지지 전국 교수 일만인 선언’을 했다. 법적심판과 단죄는 이미 불가능하지만, 20세기가 가기 전에 역사청산만은 반드시 이루어내야 한다는 의지였다. 대학교수 1만여 명이 서명한 것은 유례가 없는 일이다. 멀리서는 연변 조선족 대학교수 700여 명이 참여하고, 미국에서 인터넷을 통해 의사를 밝힌 하버드대 교수, 옥스퍼드대 교수, 소장학자, 원로교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 체육학과 교수, 역사학자 등 실로 다양한 분야의 교수들이 동참했다. 2개월 만에 전임교수들만 1만 명 이상이 서명을 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서 역사적 사건이자 ‘새로운 문화운동’을 알린 신호였다.

 

 

▲ 전시유물

- 특히 친일 지식인·문화예술인·언론인에 대한 책임을 엄중히 물었다.

▲ 그렇다. 무엇보다 지식인과 문화예술인들의 직역봉공(職役奉公)에 대해 강도 높은 책임을 물었다. 일본제국이 한민족을 지배하는데 공을 들인 요소가 이데올로기 통제다. 이에 따라 지식인들을 동원해 내선일체(內鮮一體) 운동과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 전쟁동원 군국주의 이념선전에 핵심적 역할을 맡도록 했다. 이들은 식민 지배국 일본의 침략전쟁에 힘없는 동포들을 전쟁소모품으로 밀어 넣었다. 이것은 단순히 개인적 출세나 치부를 위해 친일행위를 한 자보다 사회적·도덕적 책임이 한층 더 크다. 차라리 일반 하부 순사나 밀정 등은 출세를 위해서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자들로서 죄질은 극악하지만 지식인들에 비하면 정도는 덜하다. 당시의 최고 식민통치기구의 상부 조직에 적극 참여했던 고위간부나 사회지도층의 친일행각은 해방이후에도 우리 사회 곳곳에 악영향을 끼쳤다. 파급력도 매우 치명적이고 구조적인 악폐와 악습을 낳았다. 그런데도 이들 지식층의 정치적·도덕적 책무는 거의 없고, 국가가 위중해질 때에도 항상 반대로 행동했다. 이런 자들에게 또 다시 면죄부를 준다면, 항일투쟁에서 목숨을 바친 선열들과 전 재산을 팔아 가족을 데리고 해외 망명을 하며 풍찬노숙을 자처한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희생은 무의미한 개인사에 그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부일협력자 상층부, 특히 사회지도층의 친일행적에 더 엄중한 잣대를 적용하게 된 것이다.

 

 

- 친일사전 인물선정 기준은 무엇인가.

▲ 친일인물 선정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먼저 친일협력행위의 자발성과 적극성이다. 주체적으로 출세를 위해 친일을 택한 것과 강박에 의한 동원, 생계형 친일은 전혀 다르다. 따라서 생계(생존)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고, 권력과 부 명예를 추구한 기회주의자는 엄중히 취급했다. 예컨대 일부 지원병이나 소년특공대 등은 일제의 선전도구로 악용돼 부정적 영향을 미쳤고,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서 총알받이로 동원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선정대상에서 제외했다. 또 학병출신 장교나 B·C급 전범도 행위의 비자발성을 감안해 유보했지만, 개별적 사례 분석만은 남겨 놓았다. 반복적인 친일과 중복·지속성도 고려했다. 일회성 친일단체 참여 등은 배제하고,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거나 단일 단체라도 직책을 맡고 반복적이고 장기간의 참여는 당사자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다. 앞서 지적했듯이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잔혹한 식민통치시대에 일본의 광기어린 침략전쟁에 대한 비판과 분별력이 있었음에도 일제의 선전선동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사회적·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 맹목적 협력자보다 더 엄중히 책임을 물었다. 또, 군·경찰·헌병·밀정 등 폭압기구 복무자들은 물리적인 식민 지배를 도왔고, 항일세력을 직접 탄압함으로써 독립을 지연시켰다는 점에서 더 가혹한 기준을 적용했다.

 

 

- ‘친일파’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말해 달라.

▲ ‘친일파’라는 말은 일제침략이 노골화한 시기부터 광범위하게 회자된 단어다. 해방을 거치면서 역사적 용어로 정착했다. 이 시기 사람들이 인식하던 친일파의 범주는 매국행위 대가로 귀족이나 중추원 참의원 지위를 받았거나 공출과 징용·징병 등을 담당한 말단 행정집행자들이다. 이들은 직접 일반 민중들을 적대시하면서 일제의 수탈과 전쟁동원에 앞장섰던 면서기나 순사 등으로 그 폭이 매우 넓다. 당시 친일파는 상하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일제부역자를 말했다. 엄밀하게 역사적 해석으로 볼 때 친일파는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구분할 수 없다. 다만 학술적 개념으로서 친일파를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로 대별할 수 있지만 이 또한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어떤 자는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 범주에 모두 포함되는가 하면 경계선상에 드는 인물도 있다. 중요한 사실은 반민족행위자와 부일협력자 구분이 반드시 죄상의 경중에 따른 것은 아니다. 행위의 성격상 분간을 하기 위한 유형별 분류일 뿐이다. 민족문제연구소 편찬위원회가 말하는 친일파란 1905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15일 해방까지 일본제국주의가 자행한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협력하고, 우리 민족과 타민족에게 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 피해를 준 자다. 또한 일제가 우리 국권을 심대하게 또는 완전히 침탈한 기간으로 한정했다. 국권침탈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대규모로 진주하면서 한국정부에 노골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한 러·일 전쟁 개전 때를 의미한다. <3회로 이어집니다.>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