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김 한 장의 무게

내가 사는 이곳 고창에도 해태 양식장이 있다. 그것을 가공하는 김 공장도 여럿 있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고창에도 김 양식장이 있다는 얘기는 마치 고창에 어마어마한 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는 주장과도 같아서 믿어지지 않았다.

내 고향 고창에는 없는 것이 없다는 게 평상시 내 생각이기는 했다. 없는 것이 없을 뿐만 아니라 품질도 대부분 최상이다. 흙이 좋아서 무엇이든 심었다 하면 명품이 된다. 복분자가 전국적인 유명세를 타더니 수박이 그랬고, 무와 배추 그리고 호박고구마가 황토와 어우러져 별미를 낸다 해서 인기를 끄는가 싶더니 요즘은 인삼 경작자들이 몰려와서 밭이 모자랄 지경이다.

 

 

인물이라 불릴 만한 사람 또한 다양해서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야욕이 성공하리라 믿었다는 서정주와 김성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봉준 같은 혁명가의 숨결이 도처에 서려 있기도 하고, 북한으로 가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지낸 바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경제학자 백남운은 국제무대에서도 알아주는 인물이다.

게다가 고창은 중국과 막바로 통하는 서해를 길게 끼고 있어서 해산물이 풍부하고, 강수량도 전국 평균에 비춰 크게 모자라거나 넘치지도 않으며, 기후 또한 크게 춥거나 덥지도 않아 남방한계 식물이 씩씩하게 자라는가 하면 북방한계 식물도 어렵지 않게 자란다. 도무지 없는 것을 찾아볼 수 없는 곳, 그런 곳이 바로 내 고향 고창이라는 자랑을 나는 지난 세월 동안 수도 없이 해 왔지만, 그러나 한 가지 특별한 예외가 있으니, 그게 바로 김밥을 말아먹을 수 있는 김 생산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김 말고도 찾아보면 없는 것이 제법 있기는 있을 테지만, 특별히 김을 지목해서 안 나온다고 최근까지도 착각하고 있었던 까닭은 아무래도 내 개인적인 성장 배경을 첫손에 꼽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내 기억 속의 김이란 것은 귀하고도 귀한 것이어서 함부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일 년이면 설 명절과 정월 대보름 딱 두 차례 먹어볼 수 있었던 김이란 것은 바다의 쇠고기라 해서 해우라는 별칭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쇠고기보다도 귀한 음식이었다. 쇠고기는 제사 때 가끔 국물이라도 맛볼 수 있었지만 해우는 설날과 정월 대보름이 아니면 구경하기도 어려웠다.

해우가 인기를 끄는 비결은 아무래도 그 맛과 향기가 서로 다르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풋풋하면서도 고소하고,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이라고나 할까. 풋풋하게 현대적이면서도 고전적으로 고소하다는 것은 분명 모순이다. 가령 풋풋한 상추나 배추 속 같은 채소에서 고소함을 느끼기는 어렵다. 그런데 해우는 그것이 가능하다. 굽지 않은 생김을 손으로 만지면 상큼한 바다 냄새가 콧속을 간질이는데 금방 씻어낸 상추나 배추 속처럼 애잔하게 풋풋한 느낌이 있다. 그토록 풋풋한 것이 입에 넣으면 아주 오래된 것 같은 고소한 맛을 내니 그렇게도 기가 막힐 수 없다. 그렇게도 기막힌 음식이 아무 데서나 막 나올 수 있겠는가?

 

▲ 해태 포자를 붙인 굴 껍에기

 

그랬다. 어린 시절의 나는 김이란 것은 매우 귀한 것이고, 귀한 것은 아무 때 아무 데서나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만 여겼을 뿐, 집안이 가난해서 김을 사먹을 돈이 없는 까닭으로 김을 구경하기 어렵다는 쪽으로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나는 김이라는 것은 저 멀리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이를테면 천상이나 바다의 궁전 같은 데서 가끔 한 번씩 선물로 보내오는 것이라는 식의 막연한 관념만 갖고 있었을 뿐, 사람이 직접 채취하거나 인위적으로 길러낼 수도 있는 것이라는 쪽으로는 도무지 생각을 못해봤을 정도로 멍청했던 셈이다.

유년기의 그런 멍청함은 성인이 된 뒤로도 계속 쭉 이어졌다. 신문이나 텔레비전 같은 데서 김 양식 어쩌고 하는 말이 나오면 김도 양식을 하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해하다가 차츰 김도 양식을 하는구나 하는 식으로 다소나마 현실감을 갖기는 했지만 여전히 실감은 못한 채로 유년기의 관념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래서 아마 체험학습이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도시 생활 그만두고 시골로 내려온 뒤로도 한참 동안은 사람이 김을 길러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그렇게도 아둔한 내가 고창에 해태 양식장이 있고 그것을 가공하는 김 공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으니, 조금 과장을 하자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갈라질 정도의 충격이었고 행운이었다. 그나마도 갯벌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갯벌을 드나들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충격이요 행운이었다.

갯벌을 공부한다. 공부도 하면서 필요한 돈도 벌 수 있다. 그런 생각 하나만으로 갯벌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어느 하루 문득 발견한 것이 그 건물이었다. 처음에는 건성으로 그냥 지나치고 말았지만, 비슷한 형태의 건물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고 하는 식으로 이를테면 바닷가 마을마다 한두 동씩 있는데 나로서는 이해불능의 이상한 건물이었다. 올망졸망한 집들 사이로 나를 보라는 듯이 거대한 덩치를 드러내놓고 있는 그 건물은 오래된 것임이 분명하고, 드나드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진입로 또한 잡풀들이 무성해서 차마 들어가 볼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다.

그 무슨 전설에나 나옴직한 이런 건물들의 용도는 대체 무엇이었던가. 어리석게도 나는 그것이 농협에서 운영했던 쌀 창고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쌀값이 ‘똥값’이 되면서 쌀농사를 짓는 사람이 줄어드니까 자동적으로 용도 폐기된 건물이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갯마을에는 쌀농사를 지을 만한 논이 별로 없고, 따라서 쌀가마니 따위를 쟁여놓을 농협 창고 같은 것 또한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아 저거, 김 공장이었어, 김 공장.”

“김 공장? 김을 공장에서 만든다고요?”

“아따 이 사람이 시방 먼 소리를 하는 거여. 김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양식장에서 가져온 것을 쫙쫙 펴서 말리고 잘라서 포장하는 곳이었다니께.”

 

▲ 잘 됐나 못 됐나 점검도 하고...

 

설명을 들어도 나로서는 영 상상이 안 되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고, 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았지만 여전히 그림은 잘 안 그려졌다.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나에게는 큰 소득이었다. 고창에 김을 기르는 해태 양식장이 도처에 있었다는 것, 생김을 가져다가 가공하는 공장도 다수 있었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현재진행형이 아니라 과거형인 까닭은 영광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뿜어내는 온배수 때문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한꺼번에 많은 것들을 새로 배웠다. 김은 저 멀리 천상이나 바닷속 궁전 같은 데서 보내오는 선물일 거라는 어린 시절의 철없는 관념 또한 와르르 무너졌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원자력 발전소가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그렇게도 크다는 점이었다. 원자력이라는 것이 사람에게 주는 이로움보다 해가 훨씬 많다는 것은 관념적으로 알고 있었고, 그래서 끔찍하다는 느낌까지는 없었지만, 해태 양식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라는 얘기를 듣고 나니 이게 뭐랄까, 내 몸 안에 시한폭탄이 숨겨져 있다는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소름이 쫙 돋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십 년 가까이 중단돼 있었던 해태 양식이 새롭게 꿈틀거리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사람은 역시 그 어떤 최악의 상황에서도 출구를 찾아내기 마련인가 보다. 보물찾기의 달인이라고나 할까. 영광의 원자력 발전소에서 뿜어내는 온배수의 영향을 거의 안 받는 이른바 청정구역을 사람들은 마침내 찾아냈고, 거기에 해태 양식을 하면 제법 잘 된다는 것 또한 알아냈다. 그리하여 한 마을 사람들 약 이십여 가구가 해태 양식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무한히 설레었다. 가서 보고, 만지고, 느끼며 고개를 끄덕거리고 싶었다. 갯벌에서 안면을 익힌 아주머니들이 해태 포자 붙이는 일을 하느라고 새벽잠을 못 잤다면서 하품을 늘어지게 하고 있을 때, 그때 그들의 그런 하품이 그렇게도 부러울 수 없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때 그 시간일 뿐이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이내 잊어버렸다. 잊은 줄도 모르게 잊고 있다가 우연히 김 양식장을 멀리서 보고 나면, 또는 김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나면 다시 또 그곳을 가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낸 세월이 3년을 넘어 4년이었다.

 

▲ 일차 작업 완료

 

물론 내 자신의 그런 소망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도 한 번 가보고 싶다. 나도 한 번 데려가 달라. 그런 이야기를, 그런 부탁을 많은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했지만, 언제나 그때뿐이었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알았다고 진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기는 하지만, 그 사람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음날이면 벌써 잊어 버렸다. 잊고 있다가 일이 다 끝난 뒤에서야 생각해내는 것이었다. 해태 포자를 붙이는 작업이 몇날며칠씩 있는 게 아니라 달랑 하루, 그것도 네다섯 시간 이내에 끝나 버리기 때문에 같은 마을에 살지 않으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은 고사하고 구경조차 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금년에는 무슨 일인지 사흘 전에 정보가 내게 들어왔다. 아무 날 아무 시에 누구네 포자 붙이기 작업이 있는데 생각 있으면 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태 포자는 태양과 직접 마주해서는 절대로 안 된단다. 그래서 해가 뜨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 시간에 맞추자면 늦어도 새벽 4시에 집을 나서야 했다. 그래서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는데, 기가 막히게도 잠이 깨서 시계를 보니 아직 12시도 안 넘었다. 도로 누워서 깜빡 잠이 들었던가 어쨌던가 하여튼 시간이 다 됐다 하고 일어나서 시계를 보니 겨우 1시다. 다시 잠을 청하고, 2시에 또 눈을 떴다가 또 잠을 청하고, 3시도 못 돼서 다시 떴다가 아직도 시간이 안 됐네, 하고 도로 드러누워 4시를 기다렸다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어둠 속에 집을 나섰던 그날의 감격을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갯벌을 드나드는 동안 내 욕심이 많아졌다고나 할까. 하나를 알고 나면 둘을 알고 싶고, 둘을 알았다 싶으면 예전에 알았다고 생각했던 그 하나마저 모르겠다는 느낌이어서 애가 탄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갯벌을 드나든 지도 꽤나 오래 되었건만, 갯벌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고 말해야만 하는 그런 요상한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 작업이 끝난 뒤의 하늘은...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생명이란 본디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갯벌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흙인데 이 흙은 통째로 그냥 생명 혹은 생명의 씨앗들이다. 내가 장화를 신고 갯벌을 걷고 있을 때 장화에 달라붙는 한줌의 흙은 그 자체로써 이미 생명이다. 각종 어패류와 물고기와 그리고 해초류의 알들이, 씨앗들이 흙속에 들어 있다. 아니 들어 있다기보다 그것들이 바로 흙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무수하게 뒤죽박죽 섞여 있다. 그러니 흙은 곧 생명이라는 논법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다 해서, 안 보인다 해서 그것이 거기에 없는 것은 아니다. 담배씨와 양귀비씨가 작다 하지만, 담배나 양귀비씨앗 정도는 거물 대우를 받아야만 할 정도로 미세한 씨앗들이 흙이라는 이름의 그릇을 꽉 채우고 있다. 이 무수한 씨앗들은 마치 죽은 것처럼,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닌 그냥 흙인 것처럼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그들이 거기에 있는 것은 그냥 있음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자기에게 맞는 조건을 기다리다가 그 조건이 충족되면 알을 깨고 나와서 쑥쑥 자라난다.

자기에게 맞는 조건이 형성될 때만 알을 깨고 나오다 보니 그 기간이 얼마인지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수십 년, 아니 어쩌면 수백 년이 걸리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달걀처럼 덩치가 큰 알들은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스스로 생명을 포기하고 썩어버리지만, 미세한 것들은 불에 태워지지 않는 한 썩는 법이 없이 그냥 거기에 있으면서 조건이 형성되는 그날을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리노라면 언제인가 그날은 오고야 말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새우는 숲속의 메마른 자갈들 사이에서 비를 기다리고, 어느 하루 비가 내리면 이때다, 하고 알을 깨고 나와서는 단 하루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성장을 완료하고 짝짓기를 해서 알까지 낳아놓고 여유만만하게 물속을 유영하다가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면 자갈들 사이에서 파닥파닥, 그렇게 자신의 생명을 다 소모하고 사라져 간다. 아니 죽어간다. 그러면 그 알들은 다시 자갈들 사이에서 비가 내리는 그날을 기다린다.

해태 양식은 자연의 그런 법칙을 오롯이 순응하면서 응용하는 일이었다. 김의 씨앗인 해태 포자는 작고도 작고 아주 작아서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는다.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 작은 것을 사람들은 굴 껍질에 붙인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망에 넣고, 망을 다시 그물에 매달아서 바닷물 속에 박아놓은 말목에 설치하면, 그 뒤로 사흘쯤 지나서부터 포자가 열리며 김이 자라기 시작한다.

포자가 열리는 조건은 태양빛과 바닷물이 어우러지는 어떤 지점이다. 그래서 포자 붙이는 작업은 반드시 태양이 올라오기 전에 해야 한다. 그나저나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어떻게 해서 알아낸 것일까. 물어보나마나 엄청난 고민과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나로서는 그저 경이롭기만 하다. 그러니 내가 어찌 감히 생명의 집합체인 갯벌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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