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두려운 이들> 동자동 쪽방촌 최태호 씨

빌딩숲을 이루고 있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 도심 속 번화가는 복잡하고 화려하다. 외국인 관광객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지난 60년간 급속하게 성장했고 국민들의 삶의 질 역시 전반적으로 향상되었다는 점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그러나 변화의 바람과 무한경쟁 구도 속에서 낙오된 이들은 그만큼 더 많아지게 마련이다. 동자동, 영등포, 청량리, 동대문 등 서울 도심 곳곳에는 최하층 도시 빈민의 삶이 상존한다. 빌딩숲에 가려진 음울한 쪽방촌이 여전히 군데군데 숨어 있다. 그리고 거기 깃들어 사는 생명들에게 겨울은 혹독하기만 한 계절이다. 나라는 대통령 비선실세에 의해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경제는 끝없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이들중 하나가 바로 쪽방촌 주민들이다. <위클리서울>은 서울역 앞 동자동을 찾아 즐비하게 늘어선 쪽방촌을 들여다봤다. 어디나 마찬가지이지만 동자동 쪽방촌 주민들 역시 주로 일용직이 생업인 이들이거나 최저생계비로 하루하루를 연명해야 하는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쪽방촌 주민 최태호(65) 씨의 삶 속으로 들어가본다.

 

 

직업은 꾸준히 있지만…

최태호 씨는 한 유통회사 직원으로 일하다가 거래처와 계약과정에서 뒷돈을 받아 챙긴 혐의로 20년 넘게 몸담았던 직장을 떠나야 했다. 빈털터리가 되다시피 한 최 씨는 가정생활도 유지할 수 없었다. 결국 이혼할 수밖에 없었고 15년 전 쯤 쪽방에 들어왔다.

다행인 건 당시만 해도 건강이 받쳐줬다는 점이다. 들어오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다했다. 일용직 잡부부터 구청 하청업체 소속 환경미화원까지, 먹고 살기 위해 몸부림쳤다. 환경미화원은 10년 전 그만뒀다. 새벽 일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주로 새벽반이었죠. 하루 종일 먹다버린 음식물 찌꺼기며 각종 쓰레기 등을 다 치워야했죠. 이른 새벽 환경미화원차가 한번 지나가고 나면 거리가 깨끗해집니다. 문제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겁니다. 여름철 장마 때나 눈 내리는 겨울이면 쓰레기봉투들이 모두 젖어서 엄청 무겁거든요. 특히 주말에 비나 눈이 오면 그날은 죽었다 각오하고 새벽길을 나섭니다. 주말에 쓰레기가 가장 많이 나오거든요. 각종 음식점이나 술집들이 주말에 호황이잖아요.”

무엇보다 밤낮이 바뀐 것이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건강에도 적신호가 오기 시작했다. 결단을 내렸다.

 

 

“그 전부터 간이 안 좋았어요. 물론 지금도 술을 많이 마시지만, 그때보단 나아졌죠. 4대 보험요? 아프면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알아봤죠. 그런데 1년 가까이 일자리가 없어 놀았어요. 다행히 조금이라도 벌어놓은 돈이 있었는데 야금야금 까먹었죠.”

그래도 일한 보람은 있었다. 1년은 버틸 수 있었기에. 이후 돈이 떨어지면 건설현장에 나갔다. 환경미화원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다면 아마 쪽방을 벗어나 보증금과 월세를 내는 일반 주택에서 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그. 건강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다소 아쉬움이 남는단다.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쪽방에서 살 이유가 없죠. 하는 일이 다 허드렛일이라 오래 할 게 못돼요. 고용도 불안정하고요.”

몇 달 전 그나마 일 같은 일을 찾았다며 웃었다. 한 식료품업체의 배달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알고 지내던 지인을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요즘 어떻게 사느냐고 묻기에 사정을 얘기했죠. 자기가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면서도 한 업체를 소개시켜주더라고요. 신체 건강하고 면허만 있으면 큰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서요. 큰 회사는 아니에요. 작은 트럭 타고 동네 구멍가게 등에 물건을 배달하죠. 초가을부터 시작했는데 월급은 적지만 할 만합니다. 근데 이 일도 주말 등의 개념은 없어요. 그때그때 주문 들어오면 배달 나가야 하죠.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씩은 놉니다. 이번에 좀 오래가야 할텐데….”

 

 

유일한 낙, 주민들과의 어울림

쪽방 생활에 대한 얘기가 이어졌다. 쪽방촌 사람들에게 날씨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겨울도 겨울이지만 특히 여름은 견디기 힘든 계절이란다.

“겨울도 문제지만 여름은 더 힘들어요. 죽을 맛이죠. 장마철엔 환풍이 제대로 안 돼 꿉꿉한데다 날씨 더울 땐 더 심하죠.”

무더위를 식히기 위해 골목으로 나서게 됐고, 그때마다 마주치는 주민들과 친해졌단다.

“유일한 낙이죠. ‘농담 따먹기’ 하면서 아저씨, 아줌마들이랑 놉니다. 사는 건 그렇지만 똑같은 사람들이잖아요. 다를 게 없어요. 단지 하는 일이나 사는 형편이 다를 뿐이지요.”

최 씨는 아무리 쪽방촌 주민이라 하더라도 지킬 건 지키며 살고 싶다고 했다.

“이제는 사는 것도 문제지만, 죽는 것도 문젭니다. 자고로 사람은 죽는 것도 잘 죽어야 해요. 아무리 여기까지 흘러왔어도, 나름대로 지킬 건 지키며 살려고 합니다. 젊은 때야 무슨 짓을 못하겠어요. 이제는 나이도 들고, 그래도 한때 부장님 소리도 들어봤고, 지금도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주변 사람들도 생각하면서 행동해야겠죠.”

 

 

술을 자주 마시지만 최근엔 몸 생각을 해서 독한 술은 되도록 피한다고 한다. 하지만 자녀들이 가끔 용돈을 부쳐주는 날이면 인근에 사는 주민들과 어울려 간소한 파티를 연다. 그래봤자 별 볼 일 없는 술판이지만 김 씨에겐 가장 흥겨운 자리다.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끼리 술 한 잔씩 기울이며 한풀이 하는 낙이 있고, 그나마 버틸 수 있는 힘이 돼준단다.

“두 아이가 있는데 대학도 졸업했죠. 가끔씩, 아주 가끔씩 봐요. 1년에 한두 번 보려나. 예전엔 전 부인 허락 받고 만났는데, 이제는 애들도 다 컸으니까 가끔 먼저 연락오고 그럽니다. 만나면 뭐합니까, 돈이 없으니 말이죠. 못난 애비가 돼서 딱히 해줄 말도 없고….”

그래도 최 씨는 자녀들 만날 날이 늘 기다려진다. 그럴 때마다 더 없이 분주해진다.

“아이들 만나기로 돼 있으면 어떻게든 일하는 곳에서 월급 일부라도 가불해달라고 사정하죠. 지금 하는 일터에서도 그렇고 과거에도 그렇고 40~50만원씩 미리 받은 적이 많아요. 그거 받아서 아이들 밥 사주고 용돈 주죠. 제 주머니엔 몇 만원 안 남지만, 그럴 때 아니면 언제 만나서 돈 쓸 수 있겠어요. 어차피 죄다 술값으로 탕진하는데, 애들 용돈 주면 마음이라도 좋죠.”

 

 

아이들에겐 쪽방에서 사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최 씨. 아이들 만날 때마다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나선다고 한다.

“대기업까진 아니더라도 어디 어디 회사에 다닌다고 하죠. 지금도 여전히 제가 무슨 말을 하든 믿어줍니다. 믿어주는 척이든 뭐든 어쨌거나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니까 여러모로 사는 데 큰 힘이 되죠.”

점점 늙어가는 최 씨에게 더 나은 직장을 찾아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은 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체력 하나만은 자신 있다고 했다.

“술 때문에 간이 좋진 않지만 그외엔 크게 몸 상한 데는 없어요. 현장에 가면 젊은 애들보다 더 열심히 일합니다. 덕분에 꾸준히 일을 할 수 있고요. 이 나이 돼서 저 같이 일하는 일꾼 구하기 힘들다고 그러죠. 무슨 보약을 지어먹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술, 담배를 안 하는 것도 아닌데 아직은 건강합니다.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젊어서 고생했던 게 든든한 버팀목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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