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문지연의 좌충우돌 인도 유랑기-39화: 여행기를 마치며 1

인도를 다녀온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두 가지다. 애정 혹은 진저리. 애정은, 드넓은 대지 위에 우뚝 솟은 수많은 문화유산, 그 속에서 맥을 잇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경의다. 반면 가난, 더러움, 무질서와 끊임없는 골탕, 치근거림은 인도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이유다. 필자는 두 가지를 모두 경험했다. 인도에 두 번이나 가면서 때마다 다시는 안 오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도 순간순간 용솟음치는 감동과 환희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인도는 그래서 애증의 또 다른 이름이다. 멀리 떠나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기억을 곱씹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그때 그 시절의 인도 유랑기를 펼쳐본다.

 

 

▲ 바삐 움직이는 차와 오토릭샤, 그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비집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정신없는 뉴델리역 앞



‘돈 보다 중요한 인생의 가치는 행복이다. 그러나 행복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건은 돈이다. 결국 돈이 없으면 행복해지기 힘들다. 그럼 지금 나는 어떤 것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해야 하는가. 내 청춘, 돈과 행복 중에 무엇을 먼저 좇아야 하는가.’ 가끔 생각한다. 그리고는 항상 커다란 혼돈에 빠진다.

자본주의 국가에 서식하는 일인으로서 항시 돈의 위력을 뼈저리게 느낀다. 돈은 때때로 고마운 존재이면서 어떤 때는 궁색하고 치졸한 요물 같다. 돈의 존재와 위력을 결코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종종 돈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치솟는다.

돈의 힘과 논리가 존재하면서도 돈과 행복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곳, 필자가 만난 인도가 그랬다.

길에는 무수히 많은 걸인들이 존재한다. 어느 곳은 걸인들이 지배한 동네 같기도 하다. 골목을 걸을 때도 기차를 탈 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조차 무수히 많은 걸인들이 필자를 에워싸고는 했다. 그들의 행동은 때때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뭇가지보다 가녀린 다리와 퀭한 눈이 항시 안쓰러웠다.

보통사람들의 평범한 삶이 있는 장소 틈바구니에는 그 수만큼의 많은 걸인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기차역 등 특정 지역에 몰려 있는 우리와는 차별된 모습이었다.

이질적인 동행은 델리 쇼핑의 중심가인 코노트플레이스에서도 쉽게 목격되던 바였다. 고급 상점이 즐비한 이곳은 그야말로 인도의 양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온 몸에 고급 브랜드의 제품을 휘감고 값비싼 레스토랑과 맥도날드에서 서양음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때 국물 줄줄 흐르는 아이를 안은 남루한 사리(전통의상) 차림의 여성들도 즐비했다. 못쓰게 된 다리를 끌며 박시시(구걸)하는 사람, 애처로운 눈빛으로 손을 벌리는 할아버지, 조금 과장해 나무  젓가락 굵기 만한 다리로 힘없이 걸으며 돈을 요구하는 아저씨까지 구걸하는 사람도, 달라는 방식도 각양각색이었다.

 

▲ 델리 쇼핑의 중심가인 코노트플레이스. 온 몸에 고급 브랜드 제품을 휘감고 값비싼 레스토랑에서 여유로움을 즐기는 사람들과 걸인들이 뒤섞여 있다. 그야말로 인도의 양면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다.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서울 영등포역 백화점 인근으로 늘어서있던 노숙인과 쪽방촌 풍경의 기억이 샘솟았다. 뿐만 아니라 사회부 기자가 되면서 서울 곳곳의 그늘진 곳은 죄다 찾아다녔는데, 그때 갔었던 장소들이 하나 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그때 도시 개발과 미화의 명목으로 삶의 터전에서 내몰려 어디론가 종적을 감췄던 사람들은 지금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비단 코노트플레이스 뿐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시시각각 지독한 가난들과 마주할 수 있었다. 한번쯤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는 광경들이었다.

훗날, 필자와 인도에 관한 여러 가지 경험담을 주고받던 한 지인이 가난에 관해 이런 얘기를 건넸다. 그는, 자신은 전생에 인도인이었을 것이라며, 인도의 모든 것을 사랑한 나머지 인도를 제 집 안방처럼 수시로 들락거리는 사람이었다.

“인도 사람은 지금 자신에게 돈이 없다고, 구걸을 해야 먹고 사는 지독히 가난한 현실이라고 그것을 마냥 불행으로 여기지만은 않아. 가난도 구걸도 어디까지나 순응해야할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거지. 자본주의 논리가 익숙한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야. 어떤 사람들은 돈과 행복이 비례한다고 여기고, 또 어떤 사람들은 지금 쥐고 있는 것보다 더욱 많은 것을 얻길 희망하면서 욕심이 채워지지 않았을 때는 끝없이 불행하다고 여기니까. 하기야 그런 사람들은 욕심을 채운 뒤에도 행복하다고 생각지는 않겠지. 어느새 이전 보다 더 큰 욕심이 움 터 있으니 말이야. 그러니 없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보다 갖고 있으면서도 항상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더 불행한 것일지도 몰라. 적어도 내가 만난 인도인들은 돈이 없어 불행하다거나 행복과 돈이 반드시 비례한다고 여기지는 않았어.”

가난한 사람들의 모습에 마냥 애처로운 시선을 던졌던 순간들이 떠올라 그저 머쓱했다. ‘하지만 섭리에 순응하며 산다고 한들, 배를 곯는 순간순간이 결코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 그의 이야기 끝에 자위 아닌 자위를 품으면서도 일순간, 많은 음식을 잔뜩 우겨넣어 축 늘어진 필자의 배가 부끄럽게만 느껴졌다.
 

 

▲ 빠하르간지의 한 식당 내부



처지를 인정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은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 기인한단다. 카스트 제도는 힌두교의 교리인 전생의 업과 윤회사상이 근간이다. 인간은 날 때부터 신분과 계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신분과 계급간의 수직 이동이 금지되며 혼인 또한 금기한다.

제도에서 규정한 신분은 브라만(승려), 크샤트리아(왕이나 귀족), 바이샤(상인), 수드라(일반백성, 천민) 등 4개다. 최하층인 수드라에도 속하는 않는 불가촉천민은 따로 분류돼 있다. ‘이들과 닿기만 해도 부정해 진다’는 뜻으로 불가촉천민이라고 불렀다.

성인 마하트가 간디는 불가촉천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을 신의 자식인 ‘하리잔’이라 부르며 지위 향상에 애를 썼다. 정부도 이들을 법적으로 보호하려 노력했다. 카스트 제도는 1950년 법적으로 완전히 폐지됐다. 그렇다고 지금 인도 사회가 불평등의 굴레에서 벗어난 것은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카스트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삶 속에 존속하고 있으며 사회 구석구석에 뿌리박힌 보이지 않는 차별 또한 여전하다고 알려진다.

불가촉천민은 우리네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불행하고 불쌍한 인생이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불행하다기 보다 숙명으로 여긴다고 한다. 윤회사상을 믿으며 전생에 죄가 컸기 때문에 천민계급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의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 살면 다음 생에는 좀 더 나은 계급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단다.

실로 길을 걷다보면 관광객에게 손을 내미는 걸인들을 심심찮게 만난다. 그 모습에 창피함이나 비굴함 따위는 없다. ‘구걸’이라는 자신의 일을 행하고 있다는 듯 당당하기만 하다. 어느 순간, 그들을 바라다보는 필자의 측은지심이 어쩌면 오만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이었다.

자이뿌르에서 한 할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 엷은 바람이라도 불면 훅 하고 날아갈 것처럼 뼈만 앙상한 할아버지였다. 직업 본능이 발휘된 탓인지 잠시 주저앉아 이 얘기 저 얘기를 물으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사사로운 이야기 끝에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솔직히 이야기의 내용이 아주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필자의 여행 일기장에 아래와 같은 대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가난하지만 일이 있고 밥을 먹을 수 있으니 불행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다.”

할아버지는 대화 끝물에 손을 내밀었다.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나눠준 마음의 표시로 할아버지께 갖고 있던 50루피를 건넸다.
 

 

▲ `아그라 성` 입구에서 사진을 찍자며 쫓아온 사람들. 아그라 성에서만 열장 넘게 찍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는 함피의 빗딸라 사원. 사원 내 56개의 음악기둥과 비시누 신이 타던 `가루다`가 유명하다.



델리에서 만난 친구 샤일과도 카스트 제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있다.

샤일은 “요즘에는 카스트 제도 없다”고 못을 박으면서 “각자가 자신이 가진 몫만큼, 타고난 순리대로 사는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그 사람들은 많은 것을 갖지 못했다는 현실을 크게 아쉬워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인도 여행자들 사이에서는 현지인 앞에서 카스트 제도를 언급해서는 안 된다고 알려져 있다. 심경을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자칫 몽둥이로 두들겨 맞는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 알아서 조심해야 한다는 조언도 심심찮게 전해 듣고는 했다.)

카스트 제도 등 어려운 이야기 차치하고, 여행 중에 많은 사람들을 보고 만나고 이야기 나누면서 얻은 한 가지 교훈이 있다면 ‘나의 현실을 너무 불행하다고 여길 필요는 없겠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다시 시작할 고단한 현실을, ‘내일’을 위한 투자로 여기며 열심히 부딪혀 보자는 가열한 생각도 들었다. 노력한 만큼의 기회와 대가가 주어지는 것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인도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 그들도 어쩌면 ‘내일’이 아닌 ‘다음 생애’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와 같은 항해를 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를 일이다.

<문지연 님은 언론인이며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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