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김영욱의 ‘공군문화유적을 찾아서’ ② 여의도공원의 공군창군60주년기념탑과 C-47수송기

그렇지만 백구부대는 부대 힘만으로 단독작전을 적절이 해낼 수 있는 조종사가 부족했다. 따라서 여의도로 옮긴 후 미 공군에서 훈련을 마친 이세영, 최종봉, 오춘목, 이강화 대위 등 4명의 대위가 조종사로 전입했다.. 그리고 미 공군 조종사 헤스 중령, 멧칼프 대위, 길레스피 중위 등 4명의 미군 조종사가 보강돼 우리 공군이 미 공군으로부터 인수한 F-51D 무스탕 전투기 6대를 한국과 미군의 조종사가 혼합 편성돼 운용하게 되었다.

그때 여의도기지의 주역을 맡은 F-51D 무스탕 전투기 조종사는 이강화(李康和) 대위, 오춘목(吳春睦) 대위, 최종봉(崔鐘奉) 대위 그리고 이세영(李世映) 대위였다. 그런데 최종봉 대위가 4월 16일 강원도 이천(伊川)지구의 북한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황해도 곡산 상공에서 산화해 세 명으로 줄어든 편대는 죽을 맛이었다. 당시 공군의 출격은 공군 자체의 작전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다. 아군 지상군(地上軍)이 공군에게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출격하는 횟수가 더 많았다. 쉴 사이도 없이 하루에도 서너 번씩 적진을 향해 출격해야 하니 아무리 무쇠 같은 강한 체력의 조종사들일지라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내 한 목숨 던져 조국을 지킨다’는 정신력으로 버티면서 출격했다.

최종봉 대위가 전사한지 열이레 날인 1951년 4월 21일이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몹시 흐리고 강풍이 불면서 낮게 낀 먹구름이 낀 날이었다. 그래서 시계(視界)가 불량해 비행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도 지상군이 황해도 송정리(松亭里)에 있는 적 보급품집적소에 새로운 전쟁 보급품이 많이 쌓여 있으니 ‘빨리 폭격해 달라’는 지원 요청이 전홧줄에 불날 정도로 끊일지 않았다. 비행대는 악천후지만 비행사고의 위험을 무릅쓰고 출격하기로 했다. 적의 새롭게 쌓인 전쟁 보급품이 예하 각부대로 운반되기 전에 강타를 해야 했다. 출격이 늦으면 늦을수록 우리 지상군의 희생이 더 커지는 상황에서 일기불순(日氣不純) 악천후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 여의도기지 공군병사들

 

마침내 비행대는 네 대의 편대로 구성해 비장한 각오로 악천후를 뚫고 출격했다. 이강화 대위, 이세영 대위, 미 공군 조종사 두명이었다. 이세영 대위는 3번기였다. 공격 목표는 송정리의 적 보급품집적소였는데 사흘 전에는 없었던 전쟁 보급품이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제1번기 편대장이 먼저 공격 목표를 향해 돌입하면서 공격을 했다. 이어 2번기가 돌입 공격하고 왼쪽으로 상승하는 사이에 이세영 대위 3번기는 공격 목표 200미터 전방에서 일직선으로 돌입하며 폭탄 투하장치의 단추를 누르고 재빨리 오른쪽으로 상승했다. 투하된 폭탄은 모두 보급품집적소에 명중되어 검붉은 불꽃에 휩싸여 불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작전에 성공한 편대는 무사히 기지로 귀환한 뒤, 오후 1시 무렵 다시 출격을 감행했다. 적의 수송대가 강원도 이천(伊川)으로 남하하는 중인데 그곳에도 엄청난 보급품이 쌓여 있었기 때문에 오후 1시 무렵 다시 출격을 감행해야 했다. 편대장은 오춘목 대위, 제2번기 이세영 대위, 그리고 미 공군 조종사들은 3번기와 4번기를 맡았다. 편대는 이천의 적 보급품집적소를 강타하고 기수를 막 돌리려고 할 때였다. 그때 이세영 대위는 기수를 돌리다 말고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중공군 트럭 여섯 대가 이천의 물자 직접소로 향해 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편대장에게 보고하고는, 즉시 트럭을 공격하려고 기수를 내려꽂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세영 대위는 트럭 여섯 대를 기총으로 사격 한 뒤, 방향을 틀어 상승하는 순간 엔진이 그만 대공 포탄에 맞아 전투기는 순식간에 불꽃이 일어나면서 검붉은 화염에 휩싸인 채 검은 연기가 긴 꼬리를 그리면서 편대장과 편대원들에게 ‘적진에 돌입 함. 모두 안녕히!’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적진을 향해 돌진해서 장엄하게 꽃잎이 흩어지듯이 산화(散華/散花)했다. 스물네 살의 피 끓던 젊음을 조국의 하늘에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 제물(祭物)이 되어 호국의 별이 되었다.

 

▲ 6.25전쟁 중 여의도기지

 

이세영 대위는 1927년 황해도 수안군 수구면 석달리에서 태어났어. 평양 제3공립중학교에 다니다가 1943년 일본으로 건너가 다치아라이[太刀洗] 육군비행학교에 들어가 1944년에 비행조종과를 졸업했다. 해방 후 고향으로 귀국한 그는 북한에서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대상에 오르자 1948년 10월에 ‘삼팔따라지’로 남쪽으로 내려와 대한민국 육군 항공사령부에 입대해서 1950년 4월에 공군 소위로 임관했다.

해방 후 6.25 전쟁이 나기 전까지 북한의 공산당이 싫어서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이 많았다. 즉 삼팔선(三八線)의 삼(3)과 팔(8)를 합하면 11이다. 거기에 10단위를 빼면 1이 되는데, 그 1를 화투판에서의 한 끗 따라지에 빗대어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온 사람들을 얕잡아 ‘하찮은 사람’의 뜻으로 ‘삼팔따라지’라고 불렀다. 즉 그들은 삼팔선을 넘어 자유를 찾긴 했으나, 대부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거나 의지할 데가 없어서 그들의 신세를 화투판에 말하는 가장 낮은 끗수인 따라지에 빗대어 ‘삼팔따라지’라고 했다.

그러나 이세영 대위는 삼팔따라지지만 홀로서기를 했다. 당당한 대한민국 공군 장교가 되어 전쟁 중 세운 전공(戰功)으로 1951년 5월 1일, 일 계급 진급시켜 공군 소령으로 추서되었으며, 7월에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은 이세영 공군 소령을 2010년 4월의 호국인물(護國人物)로 선정하고 고인을 추모하는 현양(顯揚)행사를 했다.

 

▲ 민항기-여의도 비행장

 

여하튼 여의도공원은 민족의 애환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그런데 1997년 조순 서울시장이 7만평 규모의 공원으로 꾸몄다. 이젠 여의도기지 비행장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그 대신 오늘날 63빌딩을 비롯해 고층의 빌딩이 즐비하고 국회가 있고, KBS방송국이 있는 여의도지만 6.25 전쟁 전후 허허벌판에 조국을 수호했던 공군 기지가 있었다. 그래서 공군은 창군 60주년을 맞이한 2009년, 여의도공원에 <공군창군60주년기념탑>을 세웠다.

우리나라 공군은 1949년 10월 1일 창군되었다. 창군된 지 60년 동안 우리나라를 빈틈없이 지킨 공군의 희생정신을 기리고 미래 항공우주군을 향한 공군의 비전을 보이기 위해 세운 공군창군60주년기념탑은 중앙의 첨탑까지 높이가 13.5미터이고, 본체까지 9미터다. 중앙부는 길쭉한 동그라미의 타원(橢圓)은 공군의 단합 및 우주로 넘어가는 대기권의 표현이다. 주변부 4개의 탑은 4대의 비행기가 동서남북으로 솟구치는 모양으로 만들었다. 공군의 핵심가치인 도전, 헌신, 전문성, 팀워크의 표현이다. 그리고 첨탑이 있는 중앙 탑은 미래의 항공우주군으로 도약하기 위한 공군의 비전을 상징하고 있다. 탑의 기단 둘레에는 건국기 헌납명명식 장면이 부조(浮彫)돼 있고, 탑 앞쪽 대리석 바닥에는 여의도공원이 공군기지임을 알리기 위해 ‘이곳 여의도는 대한민국 최초의 비행단이 있었던 곳입니다’라고 새겨진 동판을 부착해 놓았다.

 

밤 깊은 마포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비에 젖어 너도 섰고 갈 곳 없는 나도 섰다/강 건너 영등포에 불빛만 아련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린들 무엇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하나둘씩 불을 끄고 깊어가는 마포종점/여의도 비행장엔 불빛만 쓸쓸한데/돌아오지 않는 사람 생각한들 무엇하나/궂은비 내리는 종점 마포는 서글퍼라

 

▲ 1965년 여의도 기지 한강홍수로 침수

 

대중가요「마포종점(麻浦終點)」이다. 대중가요는 그 시대를 반영(反映)하는 노래다. 서울에 전차(電車)가 다닐 때 영등포, 여의도, 당인리(唐人里: 형재 마포구 당인동 일대), 마포의 밤 풍경을 알 수 있는 노래이다. 마포종점에서 한강 건너 영등포엔 불빛만 아련하고 여의도 비행장에 불빛만 쓸쓸한데 돌아오지 않는 사람 기다리고 생각한들 무엇 하나. 첫사랑 떠나간 종점 궂은비 내리는 마포 종점이 서글프다는 노래이다. 1899년부터 서민들의 애환을 실어 나르던 전차는 가요「마포종점」이 불러진지 이듬해인 1968년까지 운행되었다.

또한, 여의도공원에서는 2015년 광복70주년 기념하기 위해 8월 17일 김구, 장준하, 윤경빈 등 15명의 상해임시정부요원들이 귀국할 때 탑승한 C-47 수송기를 볼 수 있다. 이 수송기는 공군이 후원하여 서울시가 ‘C-47기 전시 70년 동안의 비행’이라는 주제로 2018년 6월 16일까지 전시되는데 여의도공원에서 C-47기를 둘러싼 한민족의 아픈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광복군 대위 장준하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님, 국무위원님과 두 분 부장님, 참모총장님, 그리고 수행원 여러분, 오늘은 1945년 11월 23일입니다. 여러분이 타신 이 비행기는 C-47은 오후 1시 정각 상하이 강만 비행장을 떠났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27년 만에 환국하시는 김구 주석님을 포함한 탑승하신 여러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님, 부주석 김규식 선생님, 국무위원 이시영 선생님, 문화부장 김상덕 선생님, 참모총장 류동렬 장군님, 주치의 류진동 박사님, 비서 김진동 등 15명입니다.
밖을 내다보십시오. 비행기 창으로 푸른 하늘이 배어들고 있습니다. 저 너머 조국이 있습니다. 벨트를 다 매주십시오. 방금 미 공군하사관이 말한 대로 국방색 허리띠를 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수송기는 중국 국민당 정부 장제스(1887-1975) 총통 앨버트 코디 웨드마이어(1897-1969) 주중 미군 사령관의 주선으로 리드 하지(1893-1963) 주한 미군정사령관이 보내준 것입니다.
조국에서 할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늦은 환국이 아닐 수 없으나 좀 더 빨리 들릴 수 있었더라면 지금쯤 어수선하다는 국내 정세가 더 빨리 정리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시된 C-47기 밑 설명판 아래에 ‘70년 동안의 비행’이란 제목의 감격적인 글이지만 ‘저 너머 조국’ 대한민국으로 환국하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초라한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지금은 여의도비행장도, 당인리발전소도, 마포종점도 없지만 여의도비행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장이었다. 1916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개설했다. 해방 후에는 민항기와 함께 공군기지로 사용되었다. 1958년 김포국제공항(金浦國際空港)이 생기면서부터 여의도비행장은 공군기지로만 사용되다가 1978년 지금의 성남기지(城南基地:서울空港)로 이전하면서 폐쇄되었다.

<김영욱 님은 작가이면서 대한민국공군 역사자문위원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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