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물러난다면서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8살 딸아이 피켓을 들다
‘왜 물러난다면서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8살 딸아이 피켓을 들다
  • 류승연 기자
  • 승인 2016.12.09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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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생각> 류승연

똑똑한 딸을 둔 덕에 촛불집회를 다녀왔다. 세종대왕과 비교해 가며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을 따지고 드는데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이구 똑똑한 내 새끼, 야무진 내 새끼. 누구 배에서 태어났어? 응응?”

역사가 어떻게 흐르고 움직이는지 직접 느껴보라고 데려간 건데 사소한 부작용도 하나 생겼다. 뉴스를 챙겨 보려 하고 나보다 더 시국 걱정을 하며 산다.

 

 

8살이 할 일은 탄핵 가결 여부에 대한 걱정이 아니라, 더하기 빼기를 완벽하게 마스터 하고 야채까지 남기지 않고 밥을 잘 먹는 것. 결국 뉴스를 보다 말고 자기 방으로 쫓겨나기를 몇 번. 아들과 딸이 반씩만 섞였으면 참 좋을 걸 그랬다.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최순실’이란 이름 석자가 미디어에 나오기 시작하고 엄마아빠가 뉴스를 보기 위해 TV를 사수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딸은 궁금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최순실이 누군지, 무엇이 왜 문제가 되는지 물어 보기에 8살 아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눈높이에 맞춰 설명을 해줬다.

“수인이 반에 홍길동이라는 반장이 있다고 하자. 반장이라서 힘이 세. 홍길동은 성춘향이랑 친해. 그런데 성춘향이 ‘반장이 그러랬어’라며 반 친구들한테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거야. 자기가 마음껏 쓰려고. 홍길동은 성춘향이 그러는 걸 알면서도 말리지는 않고 오히려 성춘향을 도와줘. 그래서 반 친구들이 참다 참다 더는 못 참겠어서 홍길동한테 반장을 그만두라고 촛불집회를 하는 거야.”

며칠 뒤 하교한 딸이 신발을 벗기도 전에 엄마를 애타게 찾는다. 큰일이라도 난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오늘 허준석(가명)이 학교에서 박근혜 대통령 같은 짓을 했어!”라고 외친다.

허준석이라는 아이는 키도 크고 힘도 세서 반에서 대장격인 아이인데 그 애가 친구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한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본 딸은 “자기 힘이 세다고 남을 위협해서 돈을 뺏으려 하는 건 박근혜 대통령이나 하는 짓”이라며 잔뜩 흥분을 한다.

또 하나. 요즘 시국이 이래서 그런지 TV에서 설민석의 역사 강의가 꽤 자주 나오는데 딸과 함께 세종대왕 편을 시청한 적이 있다. 집중해서 보는 듯하더니 며칠 후 설거지 하고 있는 내 옆에 와서는 “엄마~ 박근혜 대통령은 참 나쁜 사람인 것 같아~”라며 진지하게 얘기를 시작한다.

세종대왕은 언제나 백성들만 생각하며 살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들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단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외할아버지도 다른 사람들도 모두 바쁜 사람들이라고. 회사도 나가야 하고 집에 가서는 애도 봐야 하는데 자기 때문에 바쁜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가게 하는 건 잘못된 일이란다.

세종대왕이라면 언제나 백성들이 잘 사는 것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할 일도 많고 바쁜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나오도록 하지 않았을 거란다. 얼마 전 외할아버지가 촛불집회에 다녀온 얘기를 듣고 나더니 한참동안 그 생각을 했나보다.

오구오구. 야무진 내 새끼. 어려도 맥락은 바로 잡고 있구나. 오구오구. 내 새끼.

그러더니 딸은 나중에 정치부 기자를 하겠단다. 나와 함께 박 대통령의 3차 대국민담화를 봤었는데 그 때 기자들이 질문을 하지 않던 걸 의아하게 여기고 물어봤던 터였다.

“엄마 나는 정치부 기자가 돼서 박근혜 대통령한테 질문을 할 거야. 손들고 질문하면 되는 거지? ‘왜 물러난다고 하시면서 물러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질문해도 되는 거지?”

응응응. 그러면 돼. 그렇게 손들고 씩씩하게 질문하면 돼. 나는 22kg밖에 나가지 않는 작고 야무진 이 아이가 그렇게 대견스러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 딸이 내 뒤를 잇는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일이었다. 딸은 초등학생이 되더니 직업에 대한 개념이 생겨서 엄마아빠가 하는 일을 자주 물어보고 궁금해 하곤 했었다.

나는 무용담을 자랑하듯 과거에 새누리당 이정현 대표가 기사를 내리도록 압력을 가하자 같이 소리쳐가며 싸웠던 일을 장황하게 얘기해줬다. 힘으로 압력을 가해 기사를 못 싣게 하는 정치인들이 많은데 정치부 기자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런 것에 맞서야 한다고 얘기해줬던 것이다.

박 대통령, 이명박 전 대통령 등과 찍은 사진도 보고, 뉴스에 나오는 기자들처럼 노트북을 든 엄마가 국회의원 옆에서 일하는 모습도 사진으로 본 아이 눈에는 그런 엄마의 모습이 멋져보였나 보다.

정치부 기자가 되어 나쁜 정치인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손들고 당당히 질문하겠단다. 그래그래. 엄마가 적극 밀어줄게. 파이팅!

아이가 세종대왕을 거론하며 성군과 폭군의 개념을 스스로 깨우치기 시작했다면 촛불집회를 나가도 될 때가 왔다는 얘기다. 한 번 손 놓치면 평생 생이별할 아들 때문에 사람 많은 저녁에는 못가고 낮에 광화문을 다녀왔다. 6차 촛불집회가 있는 날이었다.

광화문 광장에는 낮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거리에 쌓여있는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피켓과 LED 촛불을 파는 상인들이 집회의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었다. 광장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눈길을 끄는 퍼포먼스가 한창이다.

딸은 포승줄에 묶여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박 대통령의 조형물을 보자마자 웃음을 터트린다. 김기춘, 김무성, 이정현 등 새누리당 정치인들의 인형은 매를 맞는 도구로 변해 있었고, 한 시민은 생닭을 들고 나와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왜 대통령 물러가라는 집회에 닭을 들고 나왔냐는 질문에는 차마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닭근혜’라고 부르거든.” 욕을 하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여덟 살짜리에게 이 말을 하기가 좀 그랬던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 각 기업의 노조들은 부스를 세우고 현 정부의 부당함을 알리고 있었다. 경복궁 앞에 마련된 대형 무대에선 그룹 ‘NEXT'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주옥같은 노래들을 들으며 고인이 된 신해철의 존재감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딸은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신도 그 안에 녹아들어갔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피켓보다 더 두껍고 단단한 재질로 만들어진 ‘박근혜를 구속하라’는 피켓으로 바꿔들고 열심히 집회 분위기에 동참한다.

제법 1인 시위 흉내를 내며 진지한 분위기를 잡고 있는 딸을 보자 웃음이 나온다. 그런 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지 한 일간지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해온다.

나는 “나도 정치부 기자였는데…” 등의 허세는 집어넣고 아들딸을 데리고 나온 40대 아줌마가 되어 성실히 인터뷰에 응했다. 이틀 뒤 신문에 내 인터뷰 내용이 실린 글을 보고 웃음이 킥킥. 기자가 살짝 오버를 했기 때문이었다. 난 ‘민주주의가 바로서는 날까지’라는 낯간지러운 말은 하지 않았는데 그 말이 하나 껴 넣어져 있었다. 큭. 그 정도는 귀엽게 봐주기로.

어쨌든 딸은 그 날의 촛불집회가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 날 일기는 평소의 4배가 넘는 글로 채워졌다. 물론 그 날부터 뉴스만 나오면 TV 앞에 앉아 시국 걱정을 하는 부작용이 생기긴 했지만, 낮에라도 광화문을 다녀온 건 잘한 일인 것 같다.

열심히 1인 시위를 한 딸에게 작은 보상을 주고 싶어서 “뭐가 먹고 싶어?”라고 물으니 간장게장이 먹고 싶단다. 요즘 한창 꽃게 맛에 빠져 있는데 꽃게 요리 중 간장게장은 안 먹어봤다며 사달랜다. 오케이. 인사동으로 넘어가 간장게장 무한리필 집에 들어갔다.

안 그래도 대식가인 남편, 간장게장이라면 환장하는 식성. 우리는 네 식구가 밥을 8공기 해치웠다. 간장게장은 무려 4번을 리필했는데 3번이 넘어가면서는 벨을 누르면서도 미안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촛불집회에도 참가하고 간장게장도 먹고 보람차게 보낸 하루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은 그저 넓은 광장에서 뛰어놀 수 있어 좋았고, 딸은 TV에서 보던 것들을 직접 경험할 수 있어 좋았고, 나와 남편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움직이고 있는 한 가운데서 그 흐름에 동참할 수 있어 좋았다.

하지만 딸의 말마따나 각자 사는 게 바쁜 국민들. 회사에 나가 일도 해야 하고 집에 가서 애도 봐야 하니 이제 그만 촛불을 밝혀도 되도록 정치권이 잘해줬으면 좋겠다.

박 대통령도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당신은 여덟 살짜리 눈에도 ‘나쁜 사람’으로 보이고 있다는 것을…. 혼자서 억울해 하며 국민과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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