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 칼럼>

 

우리의 멋쟁이 대통령께서 출장을 갈 때면 화장실 변기와 전신거울과 백색조명과 그리고 침대관련 용품들을 간직하고 다녔다는 뉴스가 떴을 때 나는 터무니없이 잘못 된 오보려니 했는데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청와대 경호처 직원들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로 화장실 변기를 뜯어내는 일도 있었다는 건 새롭고도 새로워서 나는 그만 미쳐버릴 듯이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또 앉았다가 일어섰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던 중에 까마득한 옛 기억 하나를 끄집어냈다.

내가 서울 하고도 미아리에 살 때 ‘깔끔쟁이들’로 소문난 삼총사가 있었는데 삼총사는 세 명의 남자로 구성된 그 동네 최고의 멋쟁이들이었다. 그들은 포장마차나 과일행상 등 노점 상인들을 겁박해서 출근비 명목의 돈을 뜯어내고 그 돈으로 반짝이는 구두와 양복을 열흘에 한 번씩은 새로 맞추곤 했는데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렇게도 웃어보고 저렇게도 웃어보고 등등 온갖 포즈를 취해보는 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그들은 또한 화장실에 볼 일이 있을 때면 바로 그냥 들어가지 않고 반드시 옆에 누군가를 강제로 끌어다가 청소를 시킨 다음에야 들어갔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눈앞에 없을 때 그들을 싸잡아서 양아치 중에 양아치, B급 양아치라고 불렀다.

그때는 내가 아직 미성년이어서 비급 양아치가 뭔지를 몰랐지만 살아오는 동안 절로 알게 되었다. 경기도 이천으로 내려가서 말년을 제법 화려하게 보낸 정치깡패 출신 유지광에 따르면 양아치가 양아치인 까닭은 한 뼘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오직 한 뼘 내에서만 뭔가를 열심히 도모하다가 파멸한다는 점이다. 그나마 A급 양아치는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워해야 마땅한 파렴치로 규정되는 순간 이제 끝났다는 회한의 미소와 함께 하늘이라도 쳐다보지만, B급 양아치는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고, 혼자서 죽을 수는 더더욱 없다고, 함께 죽자고, 함께 죽어야 한다고 바락바락 버티는 식으로 자신의 더러운 것을 모조리 드러내 보여준 다음에야 온 몸의 진이 빠져서 퀭한 눈으로 땅이나 쳐다보며 소멸돼 간다.

 

▲ 정신병자가 아니라면 이런 변기로도 충분하다.

 

하긴 사람이란 어차피 소모적 존재이긴 하다. 그래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는다는, 죽어야 한다는, 죽는 줄을 알면서도 살아 있고, 살고자 한다는 그 비극적 운명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죽음 앞에서 감히 당당한 자 누가 있을까마는, 최소한 비루한 인간으로 기억되지는 말자고 이 앙다물고 노력해서 자신의 마지막을 그럭저럭 장엄하게 장식하는 사람도 가끔은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영웅이라 기록해 왔다.

얼마 전 영웅에 관한 영화 한 편이 개봉되었다. 제목은 ‘판도라’. 영화 ‘판도라’는 차가운 이성과 따뜻한 눈물을 동시에 요구하는 제대로 된 작품이다. 잠시도 딴 생각을 못 하게 하는, 몰입도 최고의 수준급 영화 ‘판도라’는 재난을 소재로 국가란 무엇이고 대통령이란 또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한편 국가란 결국 ‘지도자 나부랭이’들이 아니라 개돼지로 폄하되는 민중들에 의해 유지된다는 정답까지 써서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민중들의 가슴에 무슨 거창한 이념이나 국가관 따위들이 심겨져 있을 까닭은 없다. 이념이나 국가관은커녕 자신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 관료와 부자들로 상징되는 국가를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이죽거리는 게 민중들이 살아가는 유일한 에너지원이라 해도 과장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마지못해 국가의 정책에 순응은 한다. 그렇다고 자기들이 몸담고 일하는 직장을 하루살이가 세상을 대하듯이 그렇게 멋대로 함부로 대하지는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기층 민중들은 자신의 직장을 사랑한다. 그것도 매우 아주 매우 많이 사랑한다.

그들이 직장을 매우 많이 사랑하는 까닭은 밥 벌어 먹는 수단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직장 내의 섬세한 부분들을 매우 깊이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중요하다. 큰 것이 아니라 작은 것을 깊이 있게 안다는 것. 관리자들의 눈에는 사업체 하나하나가 온통 숫자들로 보이고 그래서 손익계산이 안 맞는다 싶으면 미련 없이 포기하지만,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자기 자신의 피와 땀과 눈물이 스며들어 있는 이를테면 혼연일체의 생명체로 보이는 까닭에 그 어떤 최악의 상황이 닥친다 해도 쉽게 포기가 안 된다.

가령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계량화할 수 있다면, 사업체의 최고위 관리책임자보다는 최하위 잡급직 노동자들의 직장에 대한 사랑지수가 열 배 아니 스무 배는 높게 나올 것이다. 어쩔 것인가.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도 있듯이, 알게 돼서 사랑까지 해버리게 됐는데 어쩔 것인가 말이다.

 

▲ 박근혜에게 선물하고 싶은 것들...

 

자, 대한민국에 원자력 발전소가 있다. 인구와 면적 대비로 따지자면 그 개수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오래돼서 낡았다. 낡은 기계는 퇴출시켜야 마땅하지만 세월호가 그랬듯이 돈이 덜 든다는 오직 그 하나의 이유로 계속 사용한다. 하루하루가 아슬아슬한 이 발전소 주변에 생각지도 않았던 지진이 발생하고, 발전소는 요란하게 흔들리다가 1차 폭발, 2차 폭발에 이어 마지막 3차 폭발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최종 폭발이 이루어지면 체르노빌의 러시아나 후쿠시마의 일본에 비해 땅덩이 자체가 좁은 한반도는 순식간에 시체들의 나라가 돼버리고 말 것이다.

세상사란 언제나 그렇듯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나서 주기만 하면 된다. 나서면 죽음이지만, 죽음을 각오하고, 아니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 안겠다는 비장한 생각으로 나서주기만 하면 최악의 파국을 막을 수가 있다. 어차피 죽는 인생 미리서 죽는 것도 크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정도만 할 수 있어도 된다. 그런데 누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국민의 안녕한 삶을 약속한다고 틈만 나면 지껄이는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까? 아니다. 첫째도 돈이요 둘째도 돈이라고 외치는 원자력 발전소 최고 책임자인가? 물론 그것들도 아니다. 스스로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입으로만 사랑을 외칠 뿐 사랑의 본질에 다가서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까닭에 그렇게 할 수도 없고 하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그런 문제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자만이 풀어낼 수 있다. 죽어라고 일을 했어도 애인과 결혼식조차 제때 올릴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남자, 원자력은 희망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달리 어쩔 방법이 없어서 원자력 발전소 말단 잡일이나 하고 있었던, 불만이 많고 꿈도 많았던 까닭에 평소에는 주변의 손가락질이나 받았던 남자, 순박하게 거칠고 잔머리 굴리기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던 그가 결국은 나라를 구하고 스스로는 죽어간다.

 

▲ 우리에게 이 이상의 침구는 필요치 않다.

 

이렇게 해서 한 사람의 영웅에 관한 이야기는 완성된다. 영웅이 되고자 해서 영웅이 된 게 아니라 영웅 따위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사랑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온 까닭에 영웅으로 거듭난 이 사나이에 관한 장삼오사 우리들의 평론이 없을 수는 없다.

“그 남자 가족들은 이제 수십억을 받게 될 거야 응? 그렇지?”

“야, 수십억이 뭐냐. 평생을 보장받는 거지.”영화가 끝나고 화장실에 갔다가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고등학생들 정도나 되려나? 아니 어쩌면 대학생들인지도 모르겠다. 셋이서 단체로 영화를 보러 왔었던 모양이다. 세 명이 나란히 서서 오줌발을 날리며 보상에 관한 이야기를 꽤나 진지하게 나누고 있는데 그것 참,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지는 느낌이 들면서 나는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평생을 보장받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현금 수십억을 받게 될 거라는 말은 무슨 근거에서 나온 것이지? 순간적으로 몇 개의 질문이 머릿속을 떠돌고 있었지만 내가 뭐라고 운을 떼기도 전에 아이들은 그새 오줌 누기를 다 끝내고 우르르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들은 이제 다른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방금 전에 본 영화 얘기를 할 텐데 주제는 영화 자체가 아니라 보상에 관한 쪽으로 흘러갈 터이었다.

꼴이 엉망이지 않은 제대로 된 나라에서 살아온 아이들이라도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서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을까? 새로운 의문이 들면서 나는 급격히 우울해지고 있었다. 그런 영화를 보고 난 뒤에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는 “너라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한다면 왜? 못 한다면 왜?” 하는 것이어야 제대로 된 나라의 국민이라 할 것이다. 세상사에 찌들대로 찌들어버린 이른바 ‘노땅들’의 입에서 보상 어쩌고 하는 얘기가 나왔다면 그나마 이해라도 하겠다. 흔해빠진 말로 앞길이 구만리 같은 창창한 아이들의 입에서 농담이라도 그런 얘기가 나왔다는 게 이게 환장할 것만 같은 것이었다.

누가, 무엇이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을 이렇게 만들어 버렸느냐고 물어볼 필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역사교과서 국정화 사건 하나만 흘낏 흘겨봐도 답은 나와 있다. 한 쪽당 원고료를 이백몇십만 원씩이나 퍼주었다던가. 집필자를 구할 수가 없어서 돈이라도 많이 퍼주어야 했던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주된 목적은 박정희의 오일육 쿠데타를 구국의 신념에 의한 혁명으로 포장하는 것이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제에 대한 부역행위가 그 당시 시대적 흐름이었다는 식으로 은근슬쩍 연막을 피워놓는 것이었다.

 

▲ 우리집 그녀는 이런 거울을 사용한다.

 

역사를 전공한 전문가들 모두가 반대하는데도 악착같이 집요하게 밀어붙인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그러니까 대통령 박근혜가 탄생 백 년을 맞이하는 자기 아버지에게 주는 생일선물이었던 셈이다. 후일담에 따르면 박근혜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 장면까지 교과서에 넣으려 하다가 속이 너무 빤하게 보인다 해서 포기했다지만, 어쨌든 박근혜가 애초 구상한 역사교과서는 박근혜 가문의 영광을 길이 보전하자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한 가문의 족보 내지는 흥망사를 나라의 역사로 승격시키고자 했던 것이고, 한 나라의 역사까지도 통째로 자기 개인의 사적 재산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기묘한 언행으로 상황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일거에 전환시켜 놓는 사람을 우리는 천재라고 부른다. 또한 기묘한 언행으로 미꾸라지처럼 물을 흐려놓고 그 틈을 타서 개인의 욕망을 달성하는 사람을 일러 우리는 천박하다고 한다.

아무도 안 속아주는 눈물을 쥐어짜내 가며 진정성을 강변하는 등 유치하고 천박하기로 하자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네스북 같은 데나 오름직한 대통령 명색의 박근혜가 저질러온 정치놀음 형태의 천박한 만행은 사실 우연한 일탈도 아니다. 되돌아 살펴보면 친박연대라는 기묘한 명사가 등장했을 때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은 소꿉놀이 수준으로 전락하고 있었고, 국격은 떨어지고 있었으며, 민족의 비극은 시작되고 있었다.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까닭은 중력의 법칙이라는 매우 고매한 절대적 진리의 작동이지만, 친박연대라는 이름의 오직 한 사람만을 감싸 안고 돌아가는 정치집단의 탄생은 민중을 도구로 삼아 그들만의 사적 욕망을 달성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오늘날에 와서 박근혜와 그 일당들은 감히 말하고 있다. 자기들은 아무 죄가 없다고,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한 적이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붙이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똑바로 세워놓고 분석해보면 박근혜는 지금까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해 왔는지도 몰랐다는 얘기가 된다.

 

▲ 우리집의 파우더룸

 

프랑스 혁명의 제2 주적이었던 마리 앙뚜와네트가 꼭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는 민중을 착취하려는 생각으로 착취한 사람은 아니었다. 민중의 등골까지 완전히 빼먹으면서도 그게 착취라는 생각을, 죄라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결국 그 부모가 자식을, 새끼를 크게 잘못 키웠다는 얘기가 된다. 하긴 육영재단이니 정수장학회니 영남대학 같은, 남의 것을 강도질해놓고 그것을 재산이랍시고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그 자식들로 하여금 살인을 불사할 정도의 돈싸움이나 벌이게 했으니, 이것 하나만으로도 박정희와 육영수의 됨됨이는 시쳇말로 ‘알쪼’라 할 만하다.

물론 사람의 근본이 똑똑하다면 부모에게 배워온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어느 시점에서인가 깨닫고 크게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오줌 한 번 싸는데도 변기를 새것으로 바꿔달라고 징징대는 박근혜의 근본은 똑똑이 아니라 흐리멍텅에 가깝다. 언제 어떤 표정으로 눈물을 흘리면 사람들이 속아줄까, 언제 어떤 표정으로 어떻게 웃으면 예뻐 보일까 따위에나 열중을 바치는 이런 흐리멍텅한 사람은 자기가 어려서 배운 것들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나 펼칠 뿐 무지와 무식과 맹목으로부터 빠져나올 생각 같은 것은 해보지도 못한다.

이 세상에 C급 양아치라는 개념이 있는지 여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만약에 있다면 이런 엉터리 대통령이야말로 C급 양아치로 분류하는 게 마땅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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