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얼굴도 못봤는데 돈부터…대학병원은 원래 그렇다?
의사 얼굴도 못봤는데 돈부터…대학병원은 원래 그렇다?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7.01.15 1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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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내가 완벽하게 촌놈이라는 것을 이번에 새롭게 알았다. 대학병원은 대학교와 동급의 무엇일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이보다 더한 촌놈이 어디 있으랴. 한 마디로 말해서 나는 대학병원은 일반병원보다 조금은 더 진지하고 그래서 비용도 덜 드는 줄 알았다. 대학이란 아무래도 가르치는 데 목적이 있는 곳이니까,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일반병원에 비해 친절은 좀 덜 해도 환자의 생각을 존중하고, 그래서 얘기도 열심히 들어주고, 돈과 관련한 얘기도 당연히 덜 나오는 줄로만 알았다. 대학병원에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몰리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그녀는 여러 가지로 못 났다. 내 생각은 아니다. 그녀 자신의 평가가 그렇다. 위로 언니가 넷인 집에서 또 딸이 태어났으니 아무래도 구박을 많이 받았을 거라는 게 그녀의 추론이다. 그래서 못날 이유도 없는 사람이 못나져 버렸다는 얘기이다. 이를테면 밀가루 반죽이나 흙 반죽으로 무엇인가를 만들다가 뜻대로 안 되니까 그만 팽개쳐버렸는데 그것이 어쩌다가 소멸되지 않고 살아나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물렁물렁한 반죽을 내던졌으니 이게 제대로 반듯한 모양이 나왔을 리가 없다는 거다.

 

▲ 과일을 따듯이 빨래를 너는 그녀

 

우선 그녀는 키가 작다. 사람을 만나면 언제나 올려다봐야만 한다. 동년배의 그 누구와 함께 서도 내려다본 적이 없다. 심지어는 스무 살 아래 아니 서른 살 아래 초등학생들마저도 올려다봐야만 한다. 마당에 친 빨래널이용 줄이 내 목에 걸릴 정도로 낮건만 그녀는 무슨 홍시라도 따듯이 매달려야만 수건 하나라도 널 수가 있다. 딸기나 토마토, 고추 같은 채소류를 수확할 때는 키가 작은 이점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과일류는 무조건 사다리가 있어야 한다. 집안에서도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의자부터 챙긴다. 자동차에 올라탈 때 이마를 조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기는 하지만, 일단 올라타고 나면 시트 속으로 푹 잠겨버리기 때문에 짧은 허리를 애써 늘려야 하는 부담감이 추가로 생긴다.

그녀의 종아리는 통통하고 짧다. 그녀 자신은 무다리라고 칭한다. 무다리건 뭐건 살아가는데 불편은 없고 딱히 편함도 없어 보인다. 또한 그녀의 발은 대단히 작다. 너무 작아서 신발 한 켤레 구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대개 아동화를 신고 다닌다. 발가락은 그 생김이 마치 개구리 발 같다. 안은 좁고 밖은 넓으니 부채를 닮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여름 한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는 그 부채로 나를 좀 부쳐달라고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런 농담은 제법 재미가 있어서 중단이 안 된다.

또 하나, 그녀의 손가락 다섯 중에 엄지는 납작하고 손톱도 거의 없다. 나는 그녀의 그런 손톱이 참 묘하게 희한하다는 정도의 생각만 하지만, 그녀는 뱀 대가리라고 표현한다. 듣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녀의 엄지는 확실히 뱀을 닮았다. 뱀 전체가 아니라, 머리를 가만히 쳐들고 있을 때의 그 뱀 머리를 연상케 한다. 손가락 생김이 그렇다고 해서 살아가는 데 무슨 영향이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뱀 아니라 쥐를 닮았다 해도 살아가는 데 무슨 불편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하나, “난 왜 이렇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생긴 거야?”하는 약간의 불만 내지는 신기함이 있을 분이다.

그렇다. 그녀는 신기하다. 내가 보기에도 신기하고, 그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신기하다. 때로는 그 신기함이 특별함과 연계되어 자부심으로 승화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그 신기함이 특별한 못남으로 추락하기도 한다. 특별한 자부심으로 승화됐을 때 그녀는 창작인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여학생들은 잘 기웃거리지 않는 공대를 갔고, 공대를 졸업한 뒤에는 다시 문창과를 갔다. 하지만 특별한 못남으로 추락하는 시간의 반격에 그녀는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 부채꼴의 희귀한 발

 

그녀의 특별한 못남을 더욱더 특별하게 해주는 것은 비염이다. 그녀는 우선 콧구멍이 작다. 작은데다가 코털이 하나도 없는 까닭에 외부에서 들어오는 미세한 것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고, 그래서 비염을 달고 산다. 낮이나 밤이나 코를 훌쩍거려야만 하고, 심한 날은 머리가 아파서 눈물을 줄줄 흘려야만 한다. 그런 그녀에게 황사와 미세먼지는 당연히 천적이다. 천적 중에서도 최고 등급의 천적이다. 그래서 황사 주의보가 내려지면 그녀는 마스크부터 챙긴다.

그녀는 또한 매우 일찍 금니를 했다. 나는 이 세상에 치과라는 병원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던 나이인 초등학교 시절에 그녀는 치과에서 어금니를 뽑고 그 자리에 금을 넣었다. 단 것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다른 무슨 이유가 있어서인지 그것까지는 모른다. 딱히 알아보고자 애를 쓰지도 않았다.

어금니는 그렇다 치고, 그녀의 앞니는 치열이 매우 독특하게 생겼다. 작은 애들과 큰 애들이 엉켜서 무엇인가 열심히 놀이를 하고 있는 형국이다. 작은 애는 큰 애의 밑에 깔리고, 다른 작은 애는 큰 애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대는 형국이기도 하다. 아무튼 큰 것과 작은 것이 엎치락뒤치락하는 꼴인데 혈기 왕성한 시절에는 다만 재미있기만 했을 뿐 그리 큰 불편은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마흔을 넘으면서 밑에 깔린 작은 이 하나가 자꾸 아파 왔다. 큰 애들에게 눌리는 생활이 사십 년을 넘고 보니 그만 생을 포기해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뿌리가 죽은 채로 흔들리는 앞니 하나를 빼고 나니 당연히 틈이 생겼다. 뺀 이가 워낙 작아서 틈이 그리 크지는 않다 해도 어쨌든 불편하다. 게다가 아직은 젊은 여성이 앞에 이 하나가 없고 보니 웃어야 할 일이 있을 때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쓸데없는 신경을 쓰게 된다.

뿌리가 튼튼한 이도 제대로 똑바로 서 있는 녀석은 거의 없다. 모두가 하나같이 갈지자걸음을 걷는 형국이다. 이 녀석들을 제대로 똑바로 잡아준다면, 이른바 치열 교정을 한다면 작은 이 하나 빼낸 자리의 공백은 충분히 채워줄 것 같다. 그녀의 생각으로도 그랬고, 이를 빼준 치과의사의 견해도 그와 같았다.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나이 쉰 살까지도 치열 교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치과의사는 치열 교정에 문외한이었다. 고창 같은 작은 도시에서는 치열 교정에 자신감을 갖는 의사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고, 광주나 어디 큰 도시로 가서 하는 게 좋을 거라는 충고를 곁들여 주기도 했다.

 

▲ 그녀와 나의 고무신

 

그날 밤 그녀는 인터넷에 매달렸다. 이것저것 검색을 한 결과 치열 교정에 대략 백이십만 원이 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남몰래 한숨을 내쉬어야만 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렇게 엄청난 비용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녀는 열흘이 넘게 고민을 했다. 이걸 꼭 해야 하나? 안 하면 안 되나? 고민 끝에 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고, 그래서 광주의 한 대학병원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서 예약까지 마쳤다.

그날은 마침 날씨가 좋았다. 아침부터 푸근한 것이 반팔을 입어도 될 것 같았다. 바람도 없었다. 돌과 시멘트 반죽으로 쌓아 올리는 벙커 공사를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광주의 대학병원까지 동행을 할까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 좋은 날씨를 놓쳐서야 되겠느냐 하는 아쉬움이 더 컸다. 그래서 그녀를 고창 시외버스 터미널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한 시간쯤 마당을 서성거리다가 삽으로 모래 무더기를 벌린 다음 시멘트를 텄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잘도 갔다. 몸이 힘들어 하는 노동은 세 시간을 넘겨서는 안 된다는 개똥철학에 따라 작업을 중단하고 몸을 씻고 커피까지 한 잔 끓여놓고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첫날은 이런저런 검사 중심의 진료일 테니 지금쯤 고창으로 오는 버스에 앉아 있겠거니 했는데 아니란다. 아직도 광주에 있고,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중이란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배고파요” 그런다.

힘이 하나도 없는 소리로 배가 고프다는 그녀, 이게 대체 뭔 소리냐. 뭔가 일이 잘못 된 것 같다. 이럴 때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아야 한다. 다만 한 마디, 터미널 앞으로 나갈게, 이 말만 낮은 목소리로 해야 한다. 이것은 무슨 대단한 규약도 법칙도 아닌, 내가 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일종의 숨 돌리기 전법 내지는 건강하게 잘 살아남기 위한 전략 같은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대화 도중에 울어버릴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그녀의 말을 듣고 인사불성이 돼서 길길이 날뛸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흘러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법이니 말이다.

 

▲ 나의 겨울 일거리

 

얼마나 시간이 흘러 그녀가 차에 올라탄 뒤에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한 번 힐끗 표정을 훔쳐보았을 뿐이었다. 표정이 매우 어둡고 심난해 보인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는 묵묵히 그저 운전만 했다. 그녀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둔 채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의 낮은 숨소리가 마치 시간이 좀 더 필요해요, 시간이 좀 더, 하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복잡한 시내를 다 빠져나왔을 때, 그때 비로소 한 마디 슬쩍 물어보았다.

“말해봐. 의사가 뭐라고 그래?”

“의사? 얼굴도 못 봤는걸 뭐.”

이건 또 뭔 소리냐. 병원에 간 사람이 의사를 구경도 못 하다니. 너무 엉뚱해서 반문도 못 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그녀의 입이 다시 열렸다.

“간호사만 봤어요. 간호사와 얘기를 다 끝내야 의사를 볼 수 있대나 뭐라나. 나 원 참, 무슨 그따위 병원이 다 있담. 세상에, 간호사와 몇 마디 상담을 한 것도 아니고 실랑이나 벌이고 말았는데 이만사천 원이더라고요.”

이때부터 그녀는 속사포라도 쏘아대듯이 마구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렇지. 울면 안 되지. 우는 소리를 내서는 안 되지.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열심히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우리는 모두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병원 특유의 영업방식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대학병원 특유의 영업방식이 있다는 것도 당연히 몰랐다. 때문에 그녀는 일반병원에서 했듯이 그냥 예약된 진료실로 찾아갔다. 그런데 간호사가 대뜸 접수증이 없으면 안 된다고, 접수증을 끊어 와야 한다고 하더란다. 그래서 접수증이란 것을 끊으러 갔는데, 선불 이만사천 원을 요구하더란다.

 

▲ 바다를 등진 바위에서

 

“아니 무슨 진료를 어떻게 받을지도 아직 모르고, 비용이 얼마가 나올지도 모르는데 왜 이만사천 원을 선불로 내야 해요, 했더니 뭐라는 줄 알아요? ‘대학병원은 원래 그래요, 전국 어디를 가나 대학병원은 다 그래요’ 그러는 거지 뭐겠어요.”

“그래-에?”

그런 얘기는 나도 처음이었다. 접수비가 이만사천 원이라는 얘기는, 대학병원에서는 의사 얼굴 한 번 보는 값이 이만사천 원이라는 얘기와 다를 바 없었다. 진료에 따른 비용은 당연히 따로 청구될 것이고 말이다. 이건 완전히 불공정 거래 행위 아닌가?

“진짜 중요한 건 말이에요. 의사 얼굴도 못 보게 하는 거예요. 간호사와 얘기가 다 끝나야 의사를 만날 수 있대나. 검사비가 세상에, 육십만 원인데 일단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대나. 육십만 원짜리 검사에 동의한다는 조건 하에 앞으로의 일정을 주욱 열거하는데요. 세상에, 치열 교정 한 번 하는데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는 거예요. 진료가 없는 달에도 매달 칠만 원씩이 통장에서 자동이체 된대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통장 없는 사람은 어떻게 해요? 했더니 통장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거예요. 통장 없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했더니 이 여자가 대뜸 한다는 말이 왜 그렇게 말이 많으냐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다시 그랬죠. 간호사 말고 의사 선생님을 뵙게 해달라고. 그랬더니 이 여자 하는 말이 뭐라는 줄 알아요? ‘대학병원 처음이시죠? 대학병원은 원래 그래요. 환자가 함부로 의사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에요’ 이러는 거예요, 글쎄.”

 

▲ 쌀자루와 거의 맞먹는 키의 그녀

 

“대학병원은 무슨 딴나라 세상인가? 왜 대학병원을 자꾸 강조하는 거야?”

“그러게 말이에요. 암튼 그랬어요. 제가 뭔 얘기만 하면 말이 왜 그렇게 많으냐, 대학병원 원래 그렇다, 모르면 배워가면서 치료하겠다는 생각을 가져달라, 뭐 이따위 얘기만 앵무새처럼 되뇌는데 미치겠더라고요. 비용도 가만 생각해보니 천 만원을 가볍게 넘겨 버릴 것 같고, 무엇보다 진료가 없는 달에도 무조건 칠만 원이 통장에서 자동이체 된다는 말이 엄청 기분 나쁘더라고요. 무슨 그런 소굴이 다 있는지 모르겠어.”

그랬다. 그녀는 대학병원을 돈 먹는 소굴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을 그렇게 하고 나니 온 몸에 힘이 다 빠져버렸다. 고창에서 광주까지 올 때는 희망이 햇살처럼 찬란했건만, 이게 뭐냐 하는 실망감에 의기소침해서 병원을 빠져 나오고 말았다. 간호사와 몇 마디 실랑이를 벌인 대가로 이만육천 원을 날려버렸다고 생각하니 억울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녀는 그렇게 숨을 씩씩거리며 버스에 올라탔고, 금남로에 서 내려 오일팔 광장을 서성거리다가 다시 오일팔 기념관으로 들어가서 전시된 사진들에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저는 그 사진들 처음 봤어요. 세상에,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인들이, 손에 칼을 들고 국민들을, 특히 여성들의 가슴을 도려냈다는 소문들이, 그때의 그 유언비어들이 사진을 보고 나니까 사실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그녀는, 오일팔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대학병원과 총 든 군인들을 병치해보는 상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접수비 명목의 돈을 따로 받아 챙기는 대학병원의 그런 특별한 영업방식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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