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 칼럼> 용서해서는 안될 사람 김기춘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 않아도 풋풋하고 상큼하고 따뜻한 기운이 막 느껴지는 봄이다. 어떤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너무나 창피해서 봄도 봄 같지가 않다는 둥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그래도 봄은 봄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봄바람 속에서 팡팡 터지는 꽃봉오리들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라온다. 그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 부드러운 포옹이 온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누구지? 모르겠다. 이 사람인 것도 같고 저 사람인 것도 같고 헷갈린다.

 

 

하긴 내가 살아온 햇수가 몇 개냐. 다까끼 마사오였던 박정희가 대한민국 장군 계급장을 달고 혁명이란 명분을 내세워서 나라를 훔치기 육 년 전에 태어났으니 육십 개도 넘었다. 그동안 맺어온 인연을 헤아리기로 하자면 아마 그 이름만으로도 공책 몇 권을 채워야 할 것이다. 물론 그 이름들이 모두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이름도 없이 눈빛만으로 남아 있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걸음걸이만으로 남아 있기도 한 것이 사람의 기억이고 보면, 다른 어떤 사람은 아예 흔적도 없이 내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기도 했을 것이다.

잊어버리지 않은 이름 중에는 그 이름만 들어도 그냥 기분이 좋아지면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아지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사람 중에만 그런 이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기억이란 신묘한 것이어서, 내가 한 번도 그 손을 잡아본 적이 없고 말 한 마디 섞어본 적이 없는 사람조차도 마치 오래 사귀어 온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촉촉해지고 코끝은 시큰해져서 어쩔 줄 몰라 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런 진귀한 체험의 어디쯤에 희망은 자리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언제 어디서 어떤 계기로 나를 감동하게 해주는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설렘, 이런 것들이 없다면 사람은 대체 무엇을 희망이라고 말하며 ‘고달픈 인생길’을 타박타박 걸어갈 것인가 말이다. 물론 요즘 세상의 희망이라는 것은 크고 비싸고 새로 단장한 것이 장땡이라는 식으로 타락해 있는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허상을 좇는 이런 유행조차도 어쩌면 속임수가 난무하는 세상에 대한 반감 내지는 진짜에 대한 갈망이 채워지지 않는 데서 오는 일시적인 현상인지도 모른다.

나를 설레게 해주는 사람, 나를 감동하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약에 책이나 영화 같은 흐르는 이야기 속에서만 찾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아마 희망이라는 단어를 쓰레기통에 버려야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먼저 힘을 갖게 된 자가 더욱 당당하게 큰소리치며 약한 자를 뜯어먹는 야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세상이란 것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야만의 시절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고, 국가는 국민의 질병을 무상으로 치료해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국가는 그를 범죄자로 규정하고 수배령을 내렸다. 남자는 지하에서 고민하고, 연구했다. 그 결과 국가에 뭘 요구하는 소극적인 행동을 할 게 아니라 국가를 접수하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서야 한다는 답을 얻었다. 그렇게 그는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됐고, 그때부터 시립병원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친구들이 중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공장을 다녀야 했던 가난뱅이 소년 시절을 거친 사람이었다. 그 시기에 공장의 기계 속으로 팔이 쓸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인해 그는 스스로를 ‘팔병신’이라고 폄하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된다. 똑바르게 펴지지를 않고 항상 휘어진 상태인 팔이 창피한 그는 삼복염천 더위에도 반팔을 입지 못했다. 그런 그가 연애를 시작했지만, 애인에게도 감히 자신의 팔에 대해 얘기할 용기를 낼 수가 없었다. 당시의 민심은 개인의 장애를 개인 자신의 잘못이거나 커다란 약점으로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결혼식을 눈앞에 둔 어느 하루, 그는 죽기를 각오하고 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애인에게 고백하는데, 그런데 그녀는 그게 뭐 어때서, 하는 식의 반응으로 남자를 기절초풍하게 하고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풍덩 뛰어들게 만든다. 그렇게 해서 그날의 삽화는 어마어마한 힘의 원천이 되어 주었다. 아내의 전폭적인 신뢰를 획득한 그는 이제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국가가 지정한 범죄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감히 시장 선거에 출마해서 당선되는 괴력을 보이는 등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만약에 그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이 결혼을 했다면, 그리고 그 부인이 나중에 그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다면, 부인의 기분은 아마 남편을 이해하고자 하면서도 그리 썩 좋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때가 하필 부부싸움이라도 하고 난 직후였다면 남편을 질이 별로 안 좋은 사람이거나 혹은 신뢰하기 어려운 사람으로 단정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문제를 거론했을 것이고, 그렇게 흔들리는 아내를 둔 남편은 무슨 일을 해도 성공하지 못하는 비리비리한 남자의 길을 걷게 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제아무리 법치국가라 해도 사람의 감정까지 법으로 정해놓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명령할 수는 없다. 법이란 그 어떤 훌륭한 포장을 했다 해도 사람의 감정에 앞서 작동될 수는 없다. 허물이 있을 경우 스스로 그 허물을 벗어내면 된다. 그러면 그 어떤 법도 개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 허물을 감추려고 한다면 기다리고 있던 법이 나선다. 법에 의해 허물이 벗겨지면 그는 순식간에 몰락하지만, 스스로 허물을 인지하고 그것을 벗어내면 그 허물은 허물이 아니라 순식간에 강점으로, 장점으로 부각될 수도 있다.

만약에 우리 대통령이었던 박근혜가 정윤회니 최순실이니 하는 인물들이 언론지상에 오르내릴 즈음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면, 그리하여 나에게 이런 잘못이 있었네요,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 마디만 진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었다면 오늘날 그가 탄핵이란 치욕스런 단어 앞에서 그렇게까지 몸서리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진지한 사과의 기회는 무수하게 많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오는 족족 다 차 버렸다. 차버렸을 뿐만 아니라 개인 미디어와의 엉터리 인터뷰로 국민적 분노를 한층 더 높여놓기만 했다. 왜 그랬을까.

어떤 사람은 박근혜의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식의 말장난 같으면서도 그럴싸한 논리를 펴기도 한다. 거짓말 버릇이 뼛속에까지 들어가서 골수를 꽉 채워버린 까닭에 도무지 진실이란 것을 알지 못하고, 설령 진실을 알게 됐다 해도 신뢰하지 못하는 일종의 성격파탄자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박근혜가 왕정국가 시대의 공주로 자라나서 여왕에 올랐다는 환각 속에서 살기 때문에 자신의 언행은 그 어떤 것도 틀릴 수가 없다는 지독한 편집증 환자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누구의 말을 들어봐도 박근혜는 그저 그런 한 사람이었을 뿐 대통령 그릇에 담을 수 있는 크기는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총탄에 사라져간 사건 자체를 배신행위로밖에는 파악을 못할 정도로 정치적 식견이 낮은 그는 한평생 비운의 공주 노릇이나 했어야 할 사람이었다. 그런 그를 여왕으로, 오천만 국민의 대표자로 끌어올리고자 노심초사해 온 사람들이야 물론 박근혜를 이용해서 뭘 어떻게 해보자는 장기적인 플랜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봐서 박근혜 개인에게는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다.

근본이 제대로 갖춰진 사람이라면 주어진 옷이 자신의 몸에 맞는지 안 맞는지 정도는 이내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박근혜의 근본이란 것은 그 아버지가 나라를 훔치기도 훨씬 전에 이미 크게 굴절돼 있었다. 나는 어떤 일을 해도 잘못이 아니고, 설령 잘못으로 규정된다 해도 옆에 사람 누군가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박근혜에게 있어 제2의 천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박근혜의 책임전가 버릇은 아직 소박하고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뒤집어씌우기의 제왕 김기춘을 청와대로 끌어들인 구체적인 이유까지 알 수는 없지만, 김기춘을 비서실장 자리에 앉힌 이후부터 박근혜의 책임전가 버릇은 뒤집어씌우기 수준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뭔가를 하다가 잘못되면 옆에 사람을 탓하고 문책하는 옛 버릇은 그대로 유지하는 한편, 어떤 일이 잘못이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그 어떤 일의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워서 구속까지 시켜버리는 그런 귀신같은 기술을 대통령 박근혜가 김기춘과 무관하게 홀로 창안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기춘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현대사 도처에 그 이름자를 올려놓고 있는 김기춘은 뒤집어씌우기로 일관된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유명해진 사람이다. 인간은 마땅히 인간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냉큼 잡아다가 빨갱이를 만들었고, 거짓말과는 영 인연이 없는 순박한 사람을 발견하면 잡아다가 간첩을 만들어서 권력자에게 상납하고 승진을 거듭해 온 사람이었다.

그런 괴물 같은 기술로 무장한 김기춘이 청와대에 들어갔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마도 호랑이 마스크에 독수리 날개를 얻은 격이었을 것이다. 부딪히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마이다스의 손처럼,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좌파 혹은 종북으로 몰아붙여 온 사람 김기춘, 그가 바야흐로 특검에 불려가서 수사를 받고 구속까지 됐을 때 외친 한 마디는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수많은 작가, 예술가, 학자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기제로 작동될 것이다.

“특검을 구속해야 한다.”

이 땅에서 누가 감히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역시 뒤집어씌우기의 달인 김기춘답다. 변호사 김평우는 헌재를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지만, 그의 주장은 이 세상 모든 타락한 자들이여 모여라 하는 메시지 내지는 선전용 쇼에 지나지 않은 반면 김기춘의 특검 구속 주장은 진지하다. 진지할 뿐만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법적 타당성까지 갖추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김기춘이 내세운 논리에 따르면 요컨대 생사의 기로에 서 있는 아들의 집을 특검이 압수수색했다는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의 중환자가 누워 있는 집을 반강제로 들어가다니 인간 세상에서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서 인간답지 않은 짓을 저지른 특검은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기춘의 이런 주장만을 놓고 보자면 특검이 뭔가 상당히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인 짓을 저지른 것처럼 여겨진다.

그런데 약간만 그 속을 깊이 들여다보면 김기춘의 후안무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국민의 열화와 같은 요구에 더 이상은 어쩌지 못하고 청와대를 나온 김기춘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집에 남아 있는 각종 증거 자료를 없애는 짓이었다. 때문에 특검이 그의 자택을 압수수색했을 때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나 집 앞에 있는 폐쇄회로 티브이는 김기춘도 미처 생각을 못했던 모양이다. 그 안에 증거를 없애는 장면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소형 트럭을 집 앞에 세워놓고 이런저런 각종 서류뭉치를 허둥지둥 싣고 있는 장면이 말이다.

특검 수사관들이 일 주일여에 걸쳐 주변의 모든 폐쇄회로 티브이를 분석한 결과 서류를 실은 트럭은 김기춘의 딸 집에도 가고 사경을 헤맨다는 아들 집에도 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아들 집에다가 자신의 각종 범죄 자료들을 숨겨놓은 것이었다. 제아무리 특검이라도 사경을 헤매는 사람 집을 감히 수색하겠다고 나서지는 못하겠지 하는 심사였을 것이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잔인할 수가 있는가.

김기춘의 구속은 그 실효성은 물론 상징성 또한 너무나 크다. 검찰이나 국정원 같은 권력기관 내에서 김기춘은 살아 있는 전설이다. 일부 출세지향적인 공무원들에게는 배우고 싶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른바 적폐라고 하는 것을 김기춘은 자신의 온 몸에 두루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을 적당히 용서하고 넘어간다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죄를 짓고도 죗값을 치르기는커녕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덮어씌우기의 달인들은 이제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해야 한다. 봄이 왔는데도 마음껏 봄을 누리지 못하는, 봄을 느낄 수 없는 우리의 답답한 가슴을 이제 우리 스스로 해방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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