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자연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사람 박시도 이야기-첫번째

 

섬진강은 비단을 연상케 하는 그 이름에서 얻는 느낌이 참 좋다. 느낌이 좋은 그 강을 옆에 끼고 산이 있고 산 뒤에 또 산이 있는데 다람쥐와 멧돼지가 주인 노릇을 하는 첩첩산중 어느 골짜기에 그 마을은 있다고 했다. 내게 그 마을 얘기를 해준 야생차 전문가 박시도씨에 따르면 딱히 뭐 특별하게 내세울 만한 것은 없어 보였다. 불암산 자락 아래로 아홉 개의 절터와 야생차 군락지가 있다는 정도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그 기록이 보인다고도 하지만 그 정도의 흔적이야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일이고 보면 그 자체를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섬진강 옆 그 마을

 

야생차에 관심을 갖고 살아온 지 삼십 년도 넘은 박시도씨가 그 마을을 발견한 것은 이십여 년 전이라고 했다. 그 마을을 발견한 뒤의 어느 하루 그동안 정이 도타워진 마을 이장과 함께 술을 마셨더란다. 무 밭에서 무꽃이 뽀얗게 막 피어나는 계절이었다. 한잔 술에 흥이 도도해진 두 남자는 하얀 무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고 얼쑤, 얼싸, 서로가 서로에게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그리고 헤어졌다. 헤어진 다음 날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두 남자가 춤추고 노래하고 놀다가 헤어진 직후에 이장님은 쓰러졌고, 다급하게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때의 감정이 어찌나 허망하게 격렬했던지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식의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금방 눈물이라도 주룩 흘러내릴 것 같은 표정으로 참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까치를 망연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아득한 표정을 통해서 나는 그가 이제 굳이 야생차가 아니라도 그 마을을 떠날 수가 없게 됐다는 것을 알았다.

그랬다. 그 얘기를 듣고 난 뒤의 내 가슴에서도 뭔가 신호가 막 온다는 느낌이었다. 한 번 가봐야만 할 것 같았다. 아니 가보고 싶었다. 그 마을에 관한 얘기가 나올 때마다 가보고 싶었고, 다른 일을 하던 중에 문득 그 마을 얘기가 생각나면 또한 가보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선뜻 길을 나서지는 못했다.

 

▲ 박시도씨

 

어딘가를 간다, 간다, 하면서도 결국은 못 가고 마는 것이 인생이란 것이고, 누군가를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면서도 끝내 못 보고 마는 것이 사람 사는 것이라고 한다지만, 그곳은 고창에서 그리 멀지도 않은 순창이었다. 가자, 하고 나서면 한 시간 남짓만에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다고 무슨 엄청나게 바쁜 일이 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간다, 간다, 노래만 부르면서 일 년 가까이를 보내고 말았다. 이걸 대체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내 마음 나도 몰라서 안타깝네 그냥 웃어야지 뭐, 하는 내용의 시랄까 유행가랄까, 하여튼 그런 문장을 보고 있노라면 미소가 슬쩍 지어진다. 어떤 때는 미소뿐만 아니라 마음 한편에서 마치 작은 거짓말이라도 하고 난 뒤의 그것 같은 부끄러움이 꿈틀거리기도 한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 것은, 딱히 부끄러워 할 이유는 없지만 종종 부끄러움의 소재로 등장해서 나로 하여금 아이 참, 아이 참, 하면서 허둥거리게 한다. 마음이란 것이 실재하는지 여부조차 알지 못하는데 그런 마음의 성격까지 알아야 한다니 이 얼마나 부끄럽게 버거운 과제인가. 뭐 그렇다고 절망스럽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런 작은 부끄러움이야말로 어쩌면 인간 사회를 이루는 핵심 고리인지도 모른다. 내가 내 부끄러움을 알고, 타인이 내 부끄러움을 알아주고, 나 또한 타인의 부끄러움을 알아서, 뭔가를 애써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이해하고 공감해서 고개를 끄덕거리는, 저 유명한 이심전심이 작동하는 순간들, 이런 감격적인 순간들의 모음을 압축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우리가 그토록 좋아하는 소통, 그것이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 그 집 앞 골목

 

이렇게 보자면 부끄러움이란 고무 찬양할 일이지 수치스러운 일은 결코 아니다. 그리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그렇게 살아간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부끄러움 자체를 수치스런 범죄로 여겨서 단호하게 나는 부끄러워 할 일 따위 저지른 적이 없어, 하고 큰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작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아주 큰 부끄러움을 감추고 있다고 봐도 아마 큰 오류는 없을 것이다.

부끄러움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은 제법 놀라운 발견이지만, 지난겨울 한철은 그런 놀라운 발견의 연속이었다. 청문회 과정을 지켜보면서, 특검에 소환되는 사람들의 언행을 지켜보면서, 헌법재판소에서 쏟아져 나오는 각종 희귀한 질의응답 장면을 무슨 연속극 보듯이 지켜보면서 우리는 문득문득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해야 했고, 고개를 깊이 끄덕거리거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야만 했다.

부끄러움을 제대로 잘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있고, 가슴에 부끄러움의 씨앗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없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고나 할까. 이렇게 해서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아는 다수와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수로 거의 완벽하게 갈라지고 말았다. 압권은 역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그의 영적 스승으로 알려진 최순실씨였다.

청와대를 쫓겨나온 박근혜 전 대통령이 삼성동 자신의 자택 앞에서 웃어보였을 때의 그 무슨 토우를 연상케 하는 웃음은 아마 청사에 기록될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의 웃는 얼굴에서 무덤 속의 흙덩어리를 발견한 뒤의 감정은 처절하게 슬프다. 끊임없이 법치를 강조하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강요까지 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법치 따위 깡그리 무시해도 된다는 특권의식이 낳은 그 이상한 웃음은 백 년 아니 오백 년에 한 번이나 구경할 수 있을까말까한 희귀한 경험이었다. 그런 진귀한 경험을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선물처럼 안겨주고자 의도한 바는 아니었을 테니 그에게 감사할 필요까지는 아마도 없으리라.

 

▲ 먼 길을 나선 손님들과 함께...

 

아 참, 가련한 사람이다. 사람의 품격이 어쩌면 그렇게도 잘잘 흐르는 시냇물처럼 얇아 보일까. 명색이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했다는 사람의 언행 치고는 너무도 값싸 보여서 그만 피라도 토할 지경이다. 덕분에 공부는 많이 했다. 어제가 오늘 같지 않고, 일 년 전이 일 년 후와 같지 않은, 모든 것이 빛의 속도로 변한다고 하는 시대를 살면서 언제 어떤 기회를 만나 그런 진지하게 깊은 공부를 해볼 수 있었을 것인가.

인간과 정치의 함수관계에 관한 공부만 한 것이 아니다. 돈이란 무엇이고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새삼스런 공부도 부가적으로 했으니, 그야말로 호박을 덩굴째 얻어낸 형국이다. 무엇보다 최순실씨의 돈에 대한 집착은 미친 듯이 정상인 듯이 꼬일대로 꼬여 있는 자본제일주의 체제의 종말단계를 암시하는 것만 같아서 들여다볼 만하다.

화폐 수집이 취미인 사람은 제법 고상해 보이기도 하지만, 돈 수집이 취미인 사람은 멀리서 봐도 그냥 복부인이나 일수장사 티가 나기 마련이다. 복부인이나 일수 장사의 특징은 자기보다 돈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파리나 무슨 벌레 보듯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 운전기사의 월급 같은 작은 돈은 극도로 아까워하는 반면 자기 개인의 체면치레와 관련해서는 돈을 그야말로 물 쓰듯이 펑펑 써대는 특징을 갖고 있기도 하다.

복부인이나 일수 장사가 대통령 중심제 국가의 대통령을 옆구리에 끼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계심 정도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물론 돈의 속성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대통령이라면 복부인이나 일수 장사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훌륭한 기업인으로 거듭나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은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배운 것은 탐욕뿐이고 사익을 취하면서도 그것이 사익인 줄 몰랐다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특이한 사람이다.

돈을 아는 사람은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돈 모으는 일을 취미로 삼지도 않고, 돈을 재산으로 여겨서 그것을 자꾸 쌓아두고자 하지도 않는다. 돈을 모르는 사람이 누구 있을까마는, 인생이란 어차피 무엇인가를 보면서도 못 보고 지나치기 마련인 법이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몰랐던 것으로 나중에 밝혀지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 그의 유일한 식구들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우두머리들은 대개 부잣집 자재들이었다는 사실이 증명해주듯이, 사람이 돈을 제대로 알면 돈벌이에 별 흥미를 못 느끼기 마련이다. 건강한 사람의 정신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게 돼 있고, 자기 혼자 즐기는 탐욕의 소재를 개발하기보다는 가난의 원리라든가 분쟁의 해법 같은 널리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문제의 방법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시현하는 일에서 더 많은 희열과 보람을 느끼게끔 돼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가 죽는 죽을 알면서도 사는 사람이 돈 따위에 무슨 그렇게도 큰 정을 붙일 필요가 있겠는가 말이다.

돈도 실력이라고, 돈 없는 너희 부모를 원망하라고 큰소리 땅땅 친 것으로 유명해진 스물한 살 정유라의 발칙한 인생철학을 접한 이 땅의 수많은 부모님들이 우울증에 빠져 힘들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했지만, 마치 남의 일처럼 뭔가를 객관적으로 분석한답시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나 자신이 이미 우울증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은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짜증을 막 내는가 하면, 입만 열었다 하면 욕지거리가 다발로 쏟아져 나오는 그런 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었다.

무엇이든, 어떤 방식으로든 계기를 만들어야만 했다. 내가 성격이상자가 되어 간다고 병원 처방이나 받고, 약물이나 복용한다면 나는 정말로 환자가 돼버릴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을 찾지 못해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참인데 무슨 구원처럼 전화가 왔다. 선운사의 차 밭 관리를 위해 며칠 고창에 와 있다는 박시도씨의 목소리는, 그것은 분명 예사로운 목소리가 아니었다. 뭐랄까, 그것은 분명, 하나의 신호였다.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에 완전한 자연이 있어요, 거기로 가봐요.”

 

▲ 오래된 우물

 

그가 실제로 내게 그런 말을 해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나는 그런 소리를, 신호음을 듣고 있었다. 사람의 언어란 묘함과 묘함이 중첩돼 있어서 말 속에 말이 있고 그 말 속에 또 다른 말이 있기도 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 순간 마음의 병은 조금이라도 오염이 덜 된 흙과 나무와 돌들의 틈새 어딘가에서 나오는 정기를 마셔야 한다는 메시지를 듣고 있었던 셈이었다. 흙과 돌을 쌓아서 방을 만들고 아궁이를 만들어놓은, 참나무 장작을 태워서 덥혀놓은 그 방에서 하룻밤만 새고 나면 아닌 게 아니라 내 정신의 때가 벗겨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런 느낌으로 길을 나섰다.

숲속의 차 밭에서 가끔은 바위를 잘못 건드려 손목이나 발목을 부러뜨리기도 하는 박시도씨는, 그는 전주의 한옥마을에서 그야말로 소박하게, 질박하게, 다정다감하게 살고자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 왔다. ‘다문(茶門)’이란 이름의 작은 간판 하나를 걸어놓고, 음악과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선생들이 찾아오면 손수 만든 차를 내놓고 그들과 조분조분 이야기도 나누고, 흥이 나면 어깨도 들썩거리는, 그림 같은 그런 삶을 마치 한 잔의 차를 마시듯이 음미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느 해인가 한옥마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마을 전체가 관광지화 되고 말았다. 삶을 음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관광지는 그리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장사속이 밝은 사람이라면 돈벌이에 매진하는 쪽으로 삶의 철학을 대폭 전환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기가 만든 차 한 봉지도 돈 받고 팔 때마다 미안해하고 어려워하는 사람이었다.

 

▲ 전주의 간판을 순창에서 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로 가야 하나. 그야말로 몸 둘 바를 잃어버린 그는 한동안 허둥거렸다. 그때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사시다가 돌아가신 빈 집이 한 채 나왔다. 화장실도 없어서 일을 보고 난 뒤에는 흙이나 왕겨 같은 것을 한 삽 퍼다가 덮어놓기를 되풀이하는 그런 집이었다. 그렇게 그는 순창의 첩첩산골 그 마을로 아예 살기를 작심하고 들어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기르던 닭 한 쌍과 함께 살기를 작심하고 들어갈 때 그는 전주의 한옥마을에 걸었던 간판을 들고 갔다. 멧돼지와 다람쥐가 주인 노릇을 하는 그곳에서 멧돼지와 다람쥐들에게 차를 팔고자 함은 물론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다문이란 이름의 작은 간판 하나는 곧 그의 마음이요 재산이며 모든 것이었던 까닭에 달리 무슨 큰 생각도 없이 들고 간 것일 뿐이었다.

그 집에 들어서는 순간 내 눈에 가장 먼저 띈 것도 그 간판이었다. 전주의 전화번호가 적힌 간판이 순창의 첩첩산골 흙담집에 걸려 있으니 그렇게도 이채로워 보일 수가 없는 것이어서, 나는 그 간판을 보고 또 보고 있었고, 그러다 보니 며칠 뒤에는 꿈에서까지 그 간판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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