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부활, 제국에 대한 복음의 승리
예수부활, 제국에 대한 복음의 승리
  • 한상봉
  • 승인 2017.04.20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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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한상봉 칼럼

 

▲ by Nerina Canzi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묵상하면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분이 집 없이 세상을 떠도는 ‘이방인’처럼 살고 죽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차별받고 배제된 사람들처럼 어처구니없이 죽었다. 그의 죽음은 ‘저주’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련한 인생들의 손을 놓지 않으신 것처럼, 하느님은 결국 다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다.

늘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셨던 예수님에게 하느님 나라는 그런 사람들의 소유였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히브리 노예들의 하느님”이었고, 예수님은 그런 로마제국의 변방에서 식민지백성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우리 가운데 거처를 마련하셨던 분이다. 그 천막을 짓부순 사람들은 “대사제와 수석사제, 율법학자와 원로”로 상징되는 성전세력과 로마 황제의 하수인들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지배권력이 하느님과 그분의 나라를 거부한 사건이고, 그들의 폭력과 도덕적 파탄을 드러낸 사건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4월 16일 7시간 동안 종적을 감춘 사이에 세월호는 침몰하였고, 2017년 3월 22일 검찰조사를 마치고 7시간 동안 거짓증언을 조서에 낱낱이 새겨넣은 다음날인 23일 세월호는 인양되었고, 박근혜가 구속되던 날 세월호는 목포신항으로 마지막 항해를 계속했다. 박근혜 정권의 민낯을 드러낸 가장 큰 동력은 결국 세월호 참사로 숨진 희생자들의 값진 죽음이었다. 헌법재판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파면시키면서 세월호가 몸을 일으키고 있다. 부활하고 있다.

가야파와 빌라도의 이름이 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듯이, 박근혜 역시 세월호 참사와 더불어 추악한 이름을 오래 남길 것이다. 촛불광장에서 빠짐없이 부르던 시민들의 합창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는 노래가 예언이 되고,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 by Nerina Canzi

 

예수의 삶이 예수를 죽였다

“예수님께서는 ...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하느님을 ‘압바’(abba)라고 친밀하게 불렀던 예수님은 그분이 ‘노예들의 하느님’임을 거듭 새삼 확신하였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맞으신 ‘마지막 식탁’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어주었다는 점에서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다고 단순히 알아들으면 안 된다. 처음에 베드로가 화들짝 놀라서 뒷걸음질 치며 만류한 데는 이유가 있다. 유대인들은 그가 상전이라 해도 어느 누구의 발도 씻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율법규정에 보면, 남의 발을 씻는 행위는 정결례를 위배하는 짓이었다. 하물며 종이라 해도 주인의 발조차 씻겨주지 못한다. 이 시대에 유대에서 남의 발을 씻을 수 있는 자는 정결례에서 벗어나 있는 ‘이방인 노예’뿐이다. 유대인 노예들은 같은 동족이기에 6년 안에 풀어주어야 하고, 자기 재산도 소유할 수 있고, 종교적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주로 시리아에서 팔려온 이방인 노예들은 평생 주인에게 결박되어 가장 천한 일을 도맡아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의 ‘겉옷’을 벗고, 이방인 노예처럼 수건을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준 것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말만큼 충격적인 사건이다. 고아와 과부와 노예는 당시 가장 가난한 사람이며, 천대받는 백성이었다. 이 사건을 보면 예수님이 왜 한사코 창녀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렸는지 알만하다. 그의 시선은 늘 ‘아래로만’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 세계의 바닥에서만 하늘이 맑아보였던 것이다.

가난한 이들의 시선이 아니고서는 ‘노예들의 하느님’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가난한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리라는 산상설교를 알아들을 방법이 없다. 백성들을 종교적 이유로 갈취하던 성전세력의 아성인 예루살렘의 좌판을 뒤집어엎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예수님을 당대의 지배층이 곱게 볼 리 없다. 이런 사람이 군중들에게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지닌다는 사실은 성전세력에게나 로마에게나 불안한 일이다. 이제 예수님이 대사제와 빌라도의 심문 과정에서 꼭 필요한 몇 마디를 던지고 시종 침묵을 지킨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들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던 예수님이다. 그러니 그들이 신성모독죄든 반역죄든 온갖 혐의를 걸어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아 죽인 것이다.

 

▲ by Nerina Canzi

 

여전히 살아 활동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는 단서는 ‘빈무덤’이지만,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미 죽은 자들 가운데 계시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전갈이다. 그래서 빈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그분은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여러분은 그분을 거기에서 뵙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에게 삶의 현장이었다. 예수는 여전히 살아 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어느 낯선 사람’이 빵을 나누고 축성하는 순간에 그분을 경험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하는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두 번이나 연거푸 하신 말씀은 “나를 따라라”(21,19.22)였다. 예수님처럼 사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여전히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한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라 2,20)이라 말할 수 있을 때, 그분은 거듭 새삼 나를 통해 부활하신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그분을 느끼게 된다.

세상의 슬픔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연민을 느낄 때, 그 가난한 이를 위해 몸을 움직일 때, 때로는 부당한 정치적-종교적 권력에 맞서 저항할 때, 이념의 잣대보다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 평가할 때, 평등평화인권을 위해 헌신할 때, 심지어 고양이를 잃어버려 슬퍼하는 소녀를 위로할 때, 그분은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실상 하느님께서 빌라도가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예수님의 무죄를 입증해 주신 사건이다. 예수님을 긍정하시고, 예수님을 처형한 권력을 부정하셨다는 뜻이다. 부활절 이후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다. 만약 예수님이 주님이라면, 다른 주인(권력)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한사코 로마제국의 황제숭배를 거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붙여주었던 모든 칭호를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에게 붙여주었다.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평화를 가져다 준 그리스도(왕,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하고 말할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느님의 소유이므로 황제의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황제는 부정되었고 예수님은 긍정되었다. 그분이 나자렛의 어느 목수였다는 것은 가난한 우리 마음에 위로가 된다. 제국에 대한 복음의 승리를 믿기 때문이다.

부활절이다. 얼음이 풀리고, 찰진 흙이 부풀어 오른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은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 세워야 한다. 바다에 침몰한 지 1073일 만에 세월호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세월 동안 유족들과 미수습자 가족들이 겪은 아픔을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까? 이들을 조롱하고 “이제 잊자!”고 윽박지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이제 그 희생자들은 긍정되었고, 가해자들은 부정되었다. 그들처럼 세상에서 차별과 배제로 고통 받는 이들이 긍정되고, 권력과 그 부역자들이 탄핵을 당하는 세상이 오리라 희망한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침몰해도 인양된다. 이 믿음으로 사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이다.

<한상봉님은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이면서 ‘가톨릭일꾼’ 편집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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