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자연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남자 박시도 이야기-두번째

 

어둠이 깔린 첩첩산골에는 별들도 많고 각종 동물들의 소리는 사방을 꽉 채운다. 입으로 내는 소리도 있고 발걸음으로 내는 소리도 있고 몸뚱이 전체로 내는 소리도 있다. 입으로 내는 소리는 음악 같아서 눈이 절로 사르르 감기지만 발걸음으로 내는 소리는 멀리 떠난 누군가가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눈이 번쩍 떠지고 귀는 기울여진다. 그리고 몸뚱이 전체로 내는 소리는,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그 소리는 마치 장날에 장에 갔다가 장은 안 보고 술만 잔뜩 취해서 돌아오시던 아버지가 더 이상은 어쩌지를 못하고 사립문 근처의 감나무를 붙잡고 비틀거리다가 감나무 가지가 부러지는 바람에 풀썩 넘어지는 소리인 것만 같아서 슬쩍 미소가 지어지기도 한다.

그런 밤을 술도 안마시고 그냥 곱게 보냈더라면 뭔가 더 좋은 일이 생겼을지도 몰랐을 것을, 세 사람의 만남도 오랜만이고 하니 결국 술을 마시기로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술이나 한 잔 할까, 하고 시작했지만 술판이라는 게 어디 그런가. 한 잔 술은 금방 열 잔이 되고 끝내는 술병을 모두 비워버리기로 했다. 서울에서 연극을 하는 박시도씨의 후배가 며칠 전에 방문 기념으로 막걸리 두 병에 소주 다섯 병을 가져왔는데 막걸리는 마시고 소주는 마시자 말자, 해서 안마시고 두었던 것이란다. 그 소주 다섯 병을 셋이서 다 마셨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집안에 뒹구는 아무 것이나 다른 술도 마셨다.

 

▲ 그는 항상 돌아서서 걸었다.

 

참나무 장작불에 달궈진 온돌은 펄펄 끓다 못해 이불을 다 태워버릴 지경이었다. 박시도씨는 술이 취한 와중에도 이불을 보호해야 한다고 술잔을 내려놓고 한참 부산을 피운다. 아마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따님이거나 며느리가, 아니 어쩌면 할머니 본인께서 인생 말년의 잠자리를 호사스럽게 하자고 만들었을지도 모를 이불은 코바늘로 뜬 망사에 역시 뜨개질로 만든 커다란 장미꽃을 쉰다섯 송이나 붙여놓은 이를테면 호사의 극치를 다한 작품이었다.

그 호사스런 이불을 방이 뜨거우니 몸에 덮을 일은 없겠고, 베개로나 쓰면서 이제 그만 자자, 하고 자리에 누웠지만 깊은 잠은 들지 않았다. 깜빡 잠이 들었는가 하면 깨고, 또 깨고를 반복하는 동안 닭장에서 닭이 울었다. 목이 탄다는 느낌이어서 바깥출입을 몇 번이나 하는 동안에도 닭은 계속 울고, 멀리서는 새들의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푸름하게 먼동이 터오는가 싶더니 이내 환해졌다. 환해진 방안에서 좌우를 둘러보니 스피커 두 대가 정물처럼 서 있는 오디오 세트가 눈을 채운다. 흙담집에 매끈한 스피커 두 대는 뭐랄까, 과도하게 정갈하다는 느낌이어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숲에서 홀로 음악이라도 듣자 해서 마누라도 모르게 이걸 가져왔는디, 아 그런디 아침이고 밤이고 음악을 연주하는 새들이 엄청 많아서요.”

작년 선운사 골짜기에 있을 때 박시도씨는 그런 말을 하면서 영 민망하다는 투의 웃음을 웃고 있었다. 생음악을 옆에 두고도 미처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알았으니 이게 바로 사람 마음이란 것 아니겠느냐는 투였다. 그때의 그 스피커가 지금은 순창에 와 있는 것이다. 순창에서도 아마 비 오는 날에나 잠깐씩 소용이 있을 뿐 거의 쓰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오디오 세트 어딘가에 한 권의 책 ‘오래된 미래’가 보인다.

 

▲ 이게 만일 초가지붕이었다면...

 

오래된 미래, 내가 차 안에 두고 다니면서 가끔 펼쳐보는 이 책은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뭔가를 품고 있다.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그 어떤 숭고함에 대한 헌사 같기도 하고 충성맹세 같기도 한 어떤 것. 자연계의 거대한 법칙을 인간이 인간의 얄팍한 법칙을 들이대서 파괴하고 형질을 자꾸 변경하면 어떻게 될까.

자연을 극복의 대상이라거나 점령해야 할 잠재적 적으로 파악하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다. 인간 자신이 이미 자연의 한 부분일 뿐인데 자연을 극복 혹은 점령한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살을 깎아서 배불리 먹고 하루를 즐기자는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심각한 모순들을 찬찬히 살펴서 백 년 아니 천 년, 만 년 지계를 세우라고 정치라는 전문분야에 많은 힘을 주어 왔지만 그러나 슬프게도 현실 정치는 늘 바쁘고 그래서 허둥거리기만 하다.

백 년 아니 십 년 뒤의 일조차 생각할 겨를이 현실 정치인들에게는 없다. 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넘치는 의욕은 현실 정치인들의 통합적인 특징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연을 가꾸고 보호하자고 떠들면서 자연을 파괴하는 정책을 끊임없이 개발해 낸다. 경제가 망하면 사람의 행복이 무너진다는 주장만 난무할 뿐, 자연이 망하면 인류가 멸절한다는 목소리를 현실 정치인들에게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런 엄청난 모순의 소용돌이 속에서 거품처럼 부유하는 나는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알 수 없다는 뜻의 불가사의는 그 속이 참 깊은 단어이다. 삼 년여 동안 물속에 잠겨 있던 세월호가 올라오던 날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옥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 모양의 구름 띠가 강원도의 하늘에서 발견된 이유는 또 무엇인가. 사람과 자연현상 간에 무슨 약속이 있었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는 없다. 그렇다고 아무런 약속이 없었다고 말할 수만도 없다.

 

▲ 어울림

 

알 수 없다는 뜻의 불가사의는 때로 개구쟁이처럼 불쑥 뛰쳐나오기도 한다. 인생이란 아무렇게 생각해봐도 묘하고 또 묘한 것이어서, 전혀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으로부터 엉뚱한 질문을 받기도 하고 하소연을 듣기도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아이고 이게 뭐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니. 이런 엄청난 질문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고 나선 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누가 됐든 이런 질문 앞에서는 일단 눈부터 몇 번 깜빡거려지기 마련이다. 사람의 눈 깜빡거림은 소나 염소의 눈 깜빡거림과는 조금 다른 뭐랄까, 그 무슨 철학이라든가 고민 같은 것이 작동되기 시작했다는 신호라고 여겨진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은 흐르는 물처럼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고 조심스럽게 더듬거리고, 어떤 사람은 봄바람처럼 오감을 활짝 열어놓고 사는 게 좋지 않겠는가 하고 즐거운 목소리로 자랑하듯이 충고하고, 다른 어떤 사람은 폭풍처럼 거칠 것 없이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사람은 불꽃처럼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그 방면의 전문가라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조주 선사 같은 양반은 “차나 한 잔 들고 가시지요(喫茶去)”하고 딱 부러지게 단호한 목소리로 질문 자체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의 야생차 전문가 박시도씨는, 두 번 생각할 필요도 없고 눈 한 번 깜빡거릴 필요조차도 없다는 듯이 대뜸 이렇게 말한다.

“아이고 저도 몰라요. 함께 그냥 재미있게 놀다가 헤어지고, 다음에 또 만날 약속이나 하면 되지. 무슨 그런 걸 다 물어보신대요.”

그는 웃는다. 질문을 받은 직후에도 웃고, 노는 게 최고라는 요지의 답변을 하면서도 웃고, 답을 끝내고 난 뒤에도 역시 웃는다. 요란하지도 않고 소극적이지도 않은, 웃는다기보다는 차라리 웃는 모습을 통해 뭔가 겸손해 한다는 느낌마저 드는, 그러면서도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그는 저쪽 어디를 가리키며 “가시게요”한다.

 

▲ 펄펄 끓는 온돌방의 오디오세트

 

저쪽 어디 무엇인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놀자는 것이다. 그렇다고 저쪽 어디에 무엇인가가 정말로 있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민감한 눈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는 그냥 산천초목일 뿐인 그곳에서 놀자는 것이다. 무엇을 하면서 노느냐고? 다람쥐가 있으면 다람쥐를 쳐다보며 뭐라고 얘기를 나누고, 노래라도 할 구실이 생기면 노래도 하고, 새들이 짝짓기를 하고 있다면 또한 그 모양을 구경하며 소곤거리거나 떠들어대거나 하고 싶은 대로, 그야말로 멋대로 시간을 보내는 뭐 그런 놀이를 하자는 것일 뿐이다.

하긴 사람이 논다는 게 뭐 달리 무슨 특별한 장치나 조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처럼 눈부시게 변하는 것을 미덕으로 치는 경제원리가 세상을 장악하기 이전 시절에 사람의 하는 짓은 모두가 노는 것이었다. 일을 하면서도 놀고 밥을 먹으면서도 놀고 놀음을 하면서도 놀았다. 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푸념처럼 뭐라고 중얼거리다 보면 그것이 곧 노래가 되는 것이니 아니 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노래는 듣는 사람의 어깨를 절로 들썩거리게 하고, 그러면 그것은 순식간에 전염병처럼 사람들의 가슴을 흔들어놓았다. 어쩔 것인가. 일이고 뭐고 다 뒤로 미루고 일단은 한판 놀아보자, 하는 공감대가 형성되기까지는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출근길에 김밥 한 줄을 사서 들고 버스 안에서, 혹은 걸으면서, 뛰면서, 혹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허겁지겁 주린 배를 채워가는 현대인의 인텔리한 눈으로 보자면 완전히 미친 짓이었던 것, 그런 시절이 우리에게도 분명 있었다.

바로 그것, 그 ‘미친 짓’을 악으로 규정하고 추방해야 한다는 새로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으니 그것이 바로 새마을 운동이다. 군인 출신 대통령이 군사작전의 원리를 응용해서 일거에 마치 움직이는 모든 것을 쓸어버린다는 ‘견벽청야’ 작전을 펼치듯이 밀어붙인 새마을 운동의 위력은 괴물 같아서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었다. 산 뒤에 산이 있고 그 뒤에 또 산이 있는, 다람쥐와 멧돼지와 고라니 등 산동물들이 날마다 신나게 체육대회를 하는 첩첩산중 갈짓자 모양의 골짜기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 슬페이트의 비애

 

그런데 그 모습이, 그 꼬라지가 너무 이상해서 그 어떤 지악스러움이 느껴진다. 이 느낌은 대체 뭘까 해서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새마을 운동 자체가 폭삭 망해버렸구나 하는 느낌이, 생각이 쓱쓱 일어난다. 사람이 애써 무엇인가 공작을 벌이고 나면 그 공작의 결과는 사람의 삶을 어떤 식으로든 이롭게 해주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것은 사람의 사랑과 신뢰를 양분으로 자연스럽게 빛을 낸다. 그런데 흙담 위에 올려놓은 슬레이트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지 해롭게 하는지 그 성격이 여간 모호한 게 아니다.

슬레이트 지붕은 해마다 이엉을 갈지 않아도 된다는 일시적인 편리함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보온 등의 장기적인 효과는 포기해야 한다. 참새 같은 작은 생명이 깃들일 만한 공간이 없으니 그들과의 동거에서 오는 잔잔한 기쁨을 누릴 수도 없고, 호박이나 조롱박 같은 넝쿨 식물들이 자리를 잡을 수가 없으니 그 다감한 풍경 또한 기대할 수가 없다.

게다가 이엉 지붕은 마을 사람 모두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의 일손을 돕는 품앗이 형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그래서 현금이 거의 안 들어가지만 슬레이트는 아무나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기술적인 공정이라서 꽤 많은 현금을 필요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이엉 지붕은 필요할 때 사람이 올라가서 뛰어다닐 수도 있지만, 슬레이트 지붕 위에서는 그 어떤 짓도 할 수가 없다. 지붕에 어쩌다 구멍이라도 뚫리면 구멍이 뚫린 그 한 장의 슬레이트를 통째로 갈아야 한다. 결과적으로 농촌에서의 새마을 운동은 주거환경을 뿌리째 흔들어놓기만 했을 뿐 뒷감당은 하나도 못 하고 슬그머니 도망쳐 버린 형국이다. 이런 무책임하고 획일적인 군사작전으로 온 나라를 흔들어놓았던 박정희는 가고 없지만 그의 피폐한 그림자는 여전히 남아서 우리를 씁쓸하게 한다.

 

▲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부자리

 

물론 그 막강한 새마을 운동이란 이름의 전염병에 모든 사람들이 감염돼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호환마마를 보듯이 돌아서서 느긋하게 걸었던 사람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인 박시도씨는,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모두가 불철주야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대를 살면서도 그는 한결같이, 일관되게 노는 것을 추구했고, 잘 노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는 삶의 방식을 고수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기에 보물이 있다더라, 하는 소문을 퍼뜨리며 달려갈 때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서 혼자 숲길을 걷는 방식의 삶을 살아온 그는 일찍부터 근본적인 것들에 대한 의문이 많았다. 학교 공부에서 일등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괴로워하기도 했었던, 그래서 어른들의 걱정을 무던히도 끼쳤던 그는 이제 그 자신이 어른이 되어 당당한 목소리로 말한다.

“아 놀아가면서 천천히 하시게요.”

잘 노는 것이 곧 잘 사는 것이라는 생각은 그의 생각이기 이전에 직관이다.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생각을 깊이 해서 얻은 결론도 아니다. 몸이 요구하는 바를 따르다 보니 그런 생각을 낳은 것일 뿐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다만 하나 내 몸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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