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한 도적처럼, 참 애처롭다
미숙한 도적처럼, 참 애처롭다
  • 강진수 기자
  • 승인 2017.05.22 1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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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강진수의 ‘서울, 김수영을 읽다'- 6회

 

 

(엽서 하나)

피아노 블루스를 마구잡이로 듣던 저녁이었다. 에릭 클랩튼, 래시 깁슨, 빌리 보이 아놀드, 제이 맥 샨, 에릭 빕, 조니 워커, 코리 해리스, 가수들의 이름을 읊어본다. 기진맥진하여서 맥주를 끊고 차를 끓여 마셨다. 차를 한 잔 마시니 맥주가 생각나고. 담배를 켤 시인들이 떠오른다. 기진맥진하여서 노래를 듣고 있었다. 요즘은 하루 종일 하는 것도 없으면서 피곤하기만 한가.

 

기진맥진하여서 술을 마시고
기진맥진하여서 주정을 하고
기진맥진하여서 여관을 찾아 들어갔다
옛날같이 낯선 방이 그리 무섭지도 않고
더러운 침구가 마음을 괴롭히지도 않는데
의치를 빼어서 물에 담가놓고 드러누우니
마치 내가 임종하는 곳이 이러할 것이니 하는 생각이 불현듯이 든다
옆에 누운 친구가 내가 이를 뺀 얼굴이 어린 아해 같다고 간간대소하며 좋아한다
이 친구도 술이 취한 얼굴을 보니 처참하다
창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를 들어도 불안하지도 않고
도회에서 태어나서 도회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젊은 몸으로 죽어가는 전선(前線)의 전사에 못지않게 불쌍하다고 생각하며
그러한 생각을 함으로써 하루하루 도회의 때가 묻어가는 나의 몸을 분하다고 한탄한다
친구가 일어나서 창밖으로 침을 뱉고 아래로 내려갔다 오더니 또 술을 마시러 내려가자고 한다
기진맥진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서
차가운 이를 건져서 끼고 따라서 내려간다
그중 끝의 방문을 열고 보니 꺼먼 사람이 셋이나 앉아 있다
얼굴은 분간할 수도 없는데
술 한 병만이 방 한가운데
광채를 띠고 앉아 있다
나는 의치를 빼서 호주머니에 넣고 앉자
선뜻 인사를 하고
음시(淫詩)를 한바탕 읊었더니
여간 좋아들 하지 않는다
나이를 물어보기에 마흔여덟이라고 하니 그대로 곧이듣는다.

아침에 일어나서 나는 완전히
기진맥진하였다
눈알에 백태가 앉은 사람같이
보이는 것이 모두 몽롱하다
청한 지 반 시간 만에 떠다 주는 냉수를 한 대접 마시고
계단을 내려와서
어젯밤에 술을 마시던 방을 들여다보니 이불도 베개도 타구 하나 없이 깨끗하다.
「도적질을 하는 것도 저렇게 부지런하여야 하는데 우리는 이게 무어야 빨리 나가서 배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세」하고 친구가 서두른다
「그러니까 초년생 도적이지」하고 쑥스러운 대꾸를 하면서
기진맥진한 머리를 쉬일 곳을 찾아서 친구의 뒤를 따라서 걸어 나왔다.
우리의 잔등이에는 <미숙한 도적>이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을 것이다.

- ‘미숙한 도적’, 김수영

 

우리는 미숙한 도적, 초년생 도적이기에 이렇게 피곤해하지 싶어. 엽서의 색이 바래간다. 무엇을 훔쳤는데 도적이 되었을까. 오히려 부지런하지 못하여 우리는 미숙한 도적이다. 세상사는 사람이야 전부 도적인데, 우리는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이렇게 부지런하지 못하다. 무엇을 딱히 훔치지 않아도 도적이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그저 도적처럼 살고 싶다. 부지런하지 못해서 무엇 하나 제대로 훔칠 줄 모르는 초년생 도적이 되고 싶다. 지금처럼 피곤해하고 기진맥진해하는 것이다. 술에 취해서 아침마다 눈알에 백태가 앉은 사람처럼 몽롱하게.

김수영이라는 시인이 가진 시선이 참으로 애처롭지 않은가. 들여다보는 모든 것에 길게 여운을 남긴다. 피곤한 하루에 블루스가 노곤하게 내려앉는다. 풍경보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김수영의 눈길에는. 그의 시에는 블루스 하나도 북적거리는 소음에 불과하다. 낭만이라는 것에 취해있을 겨를이 없다. 항상 도적처럼, 미숙한 도적처럼 바쁘게. 애처롭게 살아야만 한다.

 

(엽서 둘)

▲ 시인 김수영

아주 평범한 시상들을 김수영은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미숙한 도적에 관한 엽서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향유하는 저녁과 밤, 어지러운 아침마저도 김수영에게는 일련의 정신없는 필름들이 붙여진 것과 같았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시상들을 김수영은 어떻게 담아내고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미 미숙한 도적에 관한 엽서에서 살펴봤듯이, 우리가 향유하는 저녁과 밤, 어지러운 아침마저도 김수영에게는 일련의 정신없는 필름들이 붙여진 것과 같았을 것이다.


  
이제 나의 방은 막다른 방
이제 나의 방의 옆방은 자연이다
푸석한 암석이 쌓인 산기슭이
그치는 곳이라고 해도 좋다
거기에는 반드시 구름이 있고
갯벌에 고인 게으른 물이
벌레가 뜰 때마다 눈을 껌벅거리고
그것이 보기 싫어지기 전에
그것을 차단할
가까운 거리의 부엌문이 있고
아내는 집들이를 한다고
저녁 대신 뻘건 팥죽을 쑬 것이다

- ‘이사’, 김수영

 

그의 시에 결핍되어 있을 정도로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가장 공간이 잘 보일 것만 같은 소재에서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정작 차분한 목소리로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들을 들여다보고 있다. 술을 마신 다음날 아침 미숙한 도적에 대해 이야기하듯이, 부엌문을 바라보다가 보기 싫어지기 전에 차단할 벌레에 대해 생각한다. 아내가 저녁 대신 쑬 팥죽에 대해서도 떠올린다.

가장 일상적인 것은 무엇인가. 김수영이 보내오는 엽서에는 이렇게 적혀있는 것이다. 가장 일상적인 것이 낯설어지고, 어렵고, 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순간. 시라는 것은 그토록 결핍되어버린 우리의 일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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