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 혼자 떠난 제주도 배낭여행 1편: 제주의 밤

 

한적한 일요일 오후, 늘어지게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정신이 하나둘 돌아오면서 한 생각은 ‘제주에 가고 싶다’였다. 일어나자마자 이유도 없이 그랬다. 세수를 하고 양치를 하면서 오름의 풍경을 떠올리며, 작은 짐을 싸서 바로 버스에 올랐다. 공항 가는 길을 찾아보면서 가장 싸고 빠른 비행기 티켓도 결제했다. 쉬웠다. 가고 싶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정말 제주에 갈 수 있었다.

함께 여행할 메이트를 구하지 않고 언제 돌아올지 정하지도 않았다. 운 좋게 잡은 비행기 창가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하늘 구경만 했다. 아무런 일정과 계획이 없어 ‘해야 하는 일’ 없이 오로지 내 의지만으로 하루를 만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어떤 여행을 하고 싶은지 하나씩 생각을 정리해나갔다.
 

첫째, 여행의 마지막에서 아쉬움을 느끼지 않는다.

둘째, 촉박한 스케줄에 정신없이 이동하지 않는다.

셋째, 유명한 관광지가 아닌 숨은 명소를 찾아다닌다.

넷째, 낮에는 혼자, 외로운 밤에는 사람들과 함께한다.
 

 

▲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 어떻게 여행을 꾸려나갈지에 대한 그림이 그려지면서 자신감과 확신이 생겼다. 하루만 더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돌아가기로 했다. 저녁에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다만 매일 다른 지역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숙소 사장님께 숨은 명소를 추천 받아 그날그날 일정을 세우기로 했다. 물론 가고 싶은 곳 외에 다른 계획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 지금 제주에 있어!”

제주 공항에 내리자마자 부모님과 애인에게 전화로 여행을 통보했다. 너무 즉흥적이라서 걱정이라던 엄마는 좋은 추억을 만들라며 응원해주었고, 애인은 자신도 가고 싶다며 우는 소리다. 그렇게 정말 나 홀로 배낭여행이 시작되었다.

첫 제주 땅을 밟았을 때, 시곗바늘은 7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울에선 저녁을 먹고 한창 길거리를 돌아다닐 시간. 제주의 하늘은 급격히 어두워져갔다. 홀로 짙은 어둠 속에 남겨지면 무서운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엄습했다. ‘나 지금, 정말 혼자 있구나.’ 마중을 나와 줄 사람도,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달려와 줄 사람도 없었다.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숙소로 들어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곧바로 공항 근처에 위치한 ‘따뜻한’ 분위기의 게스트하우스를 알아보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평소 길을 헤매는 것으로 유명한 사람인지라, 버스에 타자마자 습관처럼 노선을 확인했다. 서너 정거장까지는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래서 편한 마음으로 내려야할 정류장의 이름이 호명되기만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무리 기다려도 내려야할 정류장의 이름이 들리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급하게 미리 검색해둔 노선을 다시 확인했다. 지금 지나친 정류장들은 목적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방향이었다. 급하게 옆 좌석의 할머니께 길을 여쭈었다.

“아이고, 잘못 탔네. 이 버스는 맞는데 방향을 잘못 탔어. 여기 정류장에서 내려서 건너편으로 가. 저기 있는 정류장 보이지? 거기서 다시 타면 돼.”

보통 공항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많다보니, 처음 서너 정류장까지는 같은 길을 가고 공항을 벗어난 후부터 제각기 나뉘는 노선이었다. 그러니까 공항을 기준으로 정반대로 향하는 버스가 똑같이 공항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꼭 여행 초반에 실수를 하거나 좋지 않은 일이 생기는데, 이번 여행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왜 더 꼼꼼하게 확인하지 못했는지 스스로를 책망할 정신도 없었다. 금세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당혹감만 더 커져갔다. 공항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가로등의 수가 확연히 줄어서 서울의 밝은 밤과는 차원이 달랐다.

 

▲ 게스트하우스

 

“여기는 교통이 불편한 편이라 정신 바싹 차리고 있어야해. 버스도 금방 안와. 그 용담사거리까지 500번도 가고 702번도 가니까 잘 기억해뒀다가 타야해. 저기 저 정류장에서. 알았지?”

그래도 걱정스런 마음으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시는 할머니 덕분에 안심하고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행기에서도 옆에 앉은 중년부부가 집에서 직접 만든 인절미 떡을 나눠줬는데, 여행 첫 시작부터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았다. 어려운 상황이 생기면 도움을 청하면 된다는 생각을 되새기며 다시 길을 떠났다.

물론 한 번에 찾아가는 일은 없었다. 맞는 방향의 버스를 제대로 탔지만, 내리고 나니 걸어가야 하는 길이 너무 길었다. 지도에서는 5분 남짓의 거리였는데, 실제로는 복잡한 길을 15분가량 걸어야했던 것이다. 거기다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비에 바람까지 불면서 마치 느와르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결국 힘들게 버스를 탄 보람도 없이 택시를 탔다. 고의적으로 시간을 끄는 기사님 때문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요금도 냈다. 허허. 모든 것을 해탈하고 실없이 웃으며 게스트 하우스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딸랑, 하고 맑은 종소리가 울리면서 따뜻한 조명, 그리고 원래 알고 있는 사이인 마냥 반갑게 맞이해주는 스텝 찬우(가명)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는 인사와 함께, 필자의 이름을 적어 넣은 게스트를 위한 설명서를 건넸다. 설명서를 읽으면서 도착한 방은 아기자기하고 따뜻한 분위기였다. 곳곳에서 스텝과 호스트의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이리저리 이동하고 비바람까지 맞은 몸은 녹초가 되어 있었다. 빠르게 짐을 풀고, 몸을 씻자마자 잠에 들었다.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3시간가량을 자고 일어났더니, 끊임없이 담소가 오가던 게하(게스트 하우스)도 하나둘 조명을 끄고 있었다. 조용하고 어두워진 숙소를 구경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 홀로 남아 노트북을 만지작거리던 찬우가 용연구름다리에 가볼 것을 권했다. 용두암은 알고 있었는데, 용연구름다리는 처음이었다.

“지금 용연구름다리에 조명도 켜져서 예쁠 텐데, 가보는 게 어때요? 걸어서 10분 정도면 갈 수 있어요.”

“가고 싶기는 한데, 밖이 너무 깜깜해서 좀 무서워요.”

“무서운 일은 낮에도 밤에도 일어나죠.”

 

▲ 제주 바닷가의 밤풍경

 

별 것 아닌 말이었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평소 같으면 “당신은 여성이 느끼는 공포감을 알 수 없다”며 불쾌한 기색을 비췄을 텐데,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해석이 됐다. 밤이 더 위험한 건 맞지만, 여행에서까지 겁에 질려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머리도 짧겠다, 내 성별을 알 수 없는 차림을 하고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온전히 혼자서 밤거리를 걷는 것은 처음이었다.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한 걸음, 한 걸음 걷다보니 생각보다 무섭지 않았다. 산책길이 있는 큰 해안도로 옆엔 편의점 등의 시설이 즐비했다. 산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꽤 많은 자동차도 지나가고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왼쪽에는 고요한 밤바다가, 오른쪽에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는 풍경. 물론 또 길을 헤매서 용연구름다리는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었다. 모든 것이 차분히 가라앉는 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거리에 사람들을 두고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나의 상태를 되돌아보고,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내보고, 어렸을 때 자주 하던 공상도 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내가 정말로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삶을 영위해나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생각. 종종 나와의 시간을 마련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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