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박석무

며칠 전 경북 포항의 청년유도회에서 개최한 선비문화포럼에 기조발제자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 지방 유도회장을 역임한 유림 한 분과 대화를 나누던 가운데, 그분은 묻지 않은 말을 하였습니다. 율곡(栗谷)은 대현(大賢)일 수 없이 많은 잘못을 저지른 분이라면서, 강릉에 갔더니 그분을 대현이라고 치켜세우는 것을 보고 매우 마땅하지 못한 생각이 들었다며 율곡을 폄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강릉지방은 율곡의 탄생지여서 ‘오죽헌(烏竹軒)’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율곡을 높이 받들고 있음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것이 못마땅하다는 영남 유림들의 오랜 율곡 비판의 소리여서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일찍이 매천 황현의 『매천야록』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당파가 나뉜 뒤로는 비록 통재(通才), 대유(大儒)라 일컬어지더라도 대부분 문호(門戶)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의논이나 학설이 편파적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산은 마음을 평탄하고 넓게 쓰는데 중점을 두어 오직 옳은 것을 쫓아 배우기에 힘쓸 뿐 선배들에 대해서 전혀 주관적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남인들에게 경시 당했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런 다산이었기에 남인들은 모두 퇴계만 존숭하고 율곡에게는 가혹한 비판을 가했는데 다산은 남인이면서도 서인이던 율곡에 대하여 전혀 차별을 두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유배지 강진에서 다산은 아들들에게 보낸 「시양아(示兩兒)」라는 편지에서
“퇴계는 오로지 심성(心性)을 주체로 하여 말하였기 때문에 이발(理發)과 기발(氣發)을 주장하였고, 율곡은 도(道)와 기(器)를 통론했기 때문에 기발은 있어도 이발은 없다고 하였다. 두 어진 이가 주장한 바가 각각 다르니 말이 같지 않아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동인(東人)의 선배들은 기(氣)를 성(性)으로 인식했다고 그분을 배척함은 지나친 일이다(退溪專主心性, 故有理發有氣發, 栗谷通論道器, 故有氣發無理發. 兩賢所指各殊, 不害其言之不同, 而東人先輩, 斥之以認氣爲性, 過矣.)”라고 말하여, 북인이나 남인들이 율곡을 배척함을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다산 같은 대학자도 퇴계와 율곡을 두 현인(兩賢)으로 존숭하였거늘 어찌하여 영남의 남인들은 그렇게도 율곡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당파가 사라진 지 오래인 오늘까지도 율곡에 대한 비난을 그치지 않고 있을까요.
 
다산은 아들에게 보낸 다른 편지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퇴계집(退溪集)』과 『율곡집(栗谷集)』을 나란히 거명하였고, 율곡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이라는 책의 높은 가치를 강조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남인들이 율곡을 폄하할 이유가 없습니다. 포항의 그 유림이라는 분은 한참 율곡의 잘못을 지적하더니 마지막에는 율곡의 ‘십만양병설’은 율곡의 문집에도 없고 왕조실록에도 없는 말이어서 뒷날 누군가가 조작해낸 이야기라고 거듭 말했습니다. 듣다가 참지 못해 “아니 그렇다면 성호 이익이나 다산 정약용도 율곡의 십만양별설은 실용적인 주장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까 ”라고 말했더니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호와 다산은 남인 학자들이니 아무리 율곡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성호와 다산까지 무시하지 못하는 남인들의 입장이 참으로 딱하기만 합니다.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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