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수 에세이> 독일현대사진전 그리고 망각

▲ 라우렌츠 베르거스 작

도입.

아주 단순한 사건에서부터 모든 것은 비롯되었다. 그저 집에 누워 있다가, 약 먹을 시간에 약 봉투를 찾아 헤맨 것이 전부다. 분명히 내 기억으로는 내가 요즘 가장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과 더불어 봉투를 식탁 언저리에 놓아두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외출을 할 때, 식탁에 놓인 책을 가지고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던 나의 모습을 기억할 수 있다. 그런 기억들을 토대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식탁 근처의 물건들을 샅샅이 뒤지는 일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다른 곳까지도 전부 살펴봤지만 여전히 찾을 수 없다.

이상한 일이다. 나에겐 분명한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내가 어리석게 길거리에 무언가 흘리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잃어버린 물건을 가지고 밖에 나선 적도 없고, 그렇기에 더욱 분명한 것은 집 어느 곳에든 물건이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숨긴 적도, 숨긴 사람도 없다. 마땅히 지목할만한 용의자도 없고 의심거리도 없다. 남은 것은 기억뿐이라면 나는 이 기억의 왜곡을 의심할 만한 것일까. 꼭 영상의 장면들처럼 뚜렷하고 명확해 보이는 기억들조차도 유일한 의심거리가 되는 것일까.

의심은 또 다른 생각을 낳는다. 어떤 형태로든 우리는 기억 속에 살아간다는 생각. 허무맹랑한 이야기인 것 같으면서도 너무 많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오죽하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영화 ‘메멘토’라는 자신의 작품 속에서 기억하지 않는 남자, 온몸의 문신과 자신의 메모, 폴라로이드 사진만을 믿는 남자를 등장시켜 이런 건망증적이고 평범한 우리들의 사는 이야기를 느와르적인 무게감으로 담아내려 했을까. 가끔은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도 전화기가 어디 갔지, 라며 온 집안을 헤집어버리는, 망각이라는 이름의 습성.

망각을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생각들에 대한 고찰을 이어가야 한다니, 기억과 망각과 생각들이 낳는 범주 싸움이 얼마나 어이없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 니콜라 마이츠너 작

전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지극히 별것 아닌 행위가 이렇게 굉장한 일을 만들었다. 지극히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우리의 기억을 의심하게끔 하는 것이다. 나는 이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여 크게 와버린 글을 잘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기억과 망각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이렇게 사소한 것들로부터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종종 문학과 영화, 미술과 음악을 비롯한 예술의 영역은 잊고 만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다가, 우리는 철학을 맞닥뜨린다. 철학에서는 비록 철학이라고 하지 않는, 그러나 철학적인 그림자에서 우리는 우두커니 서 있다. 예술을 아무도 예술이라고 인정하지 않는 곳에서, 건망증적인, 즉 병적인 우리의 삶과 경험은 하나의 예술을 낳는 것이다. 이 글도 그런 축에 끼고 싶다.

망각과 기억이 얼마나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들인가에 대한 대답은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경험이 명확하게 해낼 수 있다. 지금 나는 쇼팽의 곡들을 들으면서 원고를 쓰고 있는 중인데, 곡을 듣고 있는 와중에도 나는 그것이 몇 번째 녹턴이고 피아노 콘체르토였는지, 심포니였는지 헷갈리고 있다. 글을 쓰다가도 몇 번씩이나 다음 줄에 무엇을 쓰려고 했는지를 까먹고, 그 다음 문단에는 이러한 내용을 적어야겠다고 다짐을 되풀이 한다. 순간 동안에도 얼마나 많은 것을 잊고 많은 것을 기억하려 의도하며, 그 의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것을 다시 잊어버리고 마는가.

이런 다툼이 예술적이고 철학적이지 못하다고 느낀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망각과 기억이 가져다주는 불명확의 경계는 늘 포스트모던이라고 일컬어지는 것 또는 사람들이 다루는 주제이기도 하다. 위대한 주제거리라는 것이다. 사소하고 일상적인 시작점과는 달리 순식간에 예술과 철학은 망각과 기억의 범주를 숭고하고 장엄하며 난해한 주제로 탈바꿈한다.

성곡미술관에서 이번 달에 전시하고 있는 독일현대사진전만 보아도 그렇다. 전시자 중 하나인 라우렌츠 베르게스는 그의 사진 속 공간에 잊히고 사라지는 것들을 성찰한다고 큐레이터는 설명한다. 한 마디로 그는 망각에 대해 사진으로 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결코 그의 사진들은 장치가 다양하다거나 현란한 사진 기술의 정점에 닿아있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하며 단순한 사진들의 일련이다. 그렇다면 난해한 설명들의 주체는 누구인가. 그것을 재창작하는 큐레이터들이 바로 그들이다.

결국 망각의 예술은 다시 기억으로 하여금 재창작된다. 기억하는 사람들은 망각을 기록하는 것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 망각은 텅 비어있는 것이지만,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가득 차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독일현대사진전의 전시 제목은 ‘present, represent’, 다시 말해 ‘제시, 다시 제시’로 정했다고 큐레이터는 덧붙인다. 망각은 우리에게 일종의 제시가 되고, 기억은 그것을 다시 나름의 것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억으로 인해 다시 제시된 것을 망각은 또 다시 비워낸다. 이러한 순환 구조를 가지는 것이 망각과 기억의 관계다. 현대란 이렇게 단순하고 의미 없는 순환을 치열하게, 하나의 다툼처럼, 그래서 더 공허하게 담아내는 현실이다.

 

 

▲ 하이디 슈페커 작

결말.

결말은 이렇다. 사실은 사소한 것들에서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한다. 그 위대한 생각은 예술을 낳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소한 것들을 잊는 것에서 그 모든 것은 비롯된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다가, 그 기억으로 베르게스의 작품을 보고나서, 망각과 기억이라는 누군가 이미 일찍이 사용했을 표제어를 새로 끄집어냈듯이, 재창작과 새로운 형태의 제시는 사소한 망각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는 더 지극히 단순하고 사소한 것에 국한된다. 우리는 결코 복잡 미묘한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알고 보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해서 우리는 코웃음을 치고 만다. 철학과 예술, 문학 등등은 우리 자신이 복잡한 개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가장 사소하고 단순한 것에 귀를 기울이라. 성곡미술관이 이번에 독일에서 가져온 사진들처럼, 우리는 너무나 바보 같은,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세상 속에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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