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고흐를 만나다
신학생, 고흐를 만나다
  • 김혜영 기자
  • 승인 2017.06.0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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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 ‘혼자 떠난 제주도 배낭여행’ 2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밤 산책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던 찬우(가명)가 여지없이 반갑게, 그러나 작은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그는 거실 식탁에 앉아 작은 조명 하나를 켜고, 카메라를 꺼냈다. 작은 종이와 펜도 올려놓았다. 그는 캘리그라피와 사진 찍는 데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곳에 머무는 게스트들이 그가 쓴 예쁜 글귀가 적힌 종이를 들고 있으면,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선물해주곤 했다.

기쁜 마음으로 어떤 문구를 고를지 한참을 고민했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벽 한 면에 붙어있는 게스트들의 사진을 봐도 공감이 가는 문구가 없었다. 부모님, 친구, 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이 대부분이었는데, 소중한 사람보다는 나 자신과 관련된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찬우가 웃으면서 한 사진을 가리켰다. 동갑의 이름 모를 청년이 찍힌 사진이었다.

 

 

‘제주에 오니 참 좋다. - 스물둘, 혼자 제주에서 -’

망설임 없이 그와 똑같은 문구를 고르고 사진을 찍었다. 그의 사진이 참 멋져보였기 때문이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지금 이 순간을 글과 사진을 통해 남기는 것. 이번 여행에서 ‘기록’은 꼭 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글씨도, 사진도 기대했던 것보다 잘 나와 기분이 좋았다. 찬우와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어느새 다른 스텝과 게스트도 앞에 자리를 펴고 앉았다. 온갖 종교를 다 공부해본 철학가도 있고, 평생 다닌 교회를 나올지 말지 고민하는 청년도 있었다. 덕분에 신학생인 필자의 종교와 종교관, 신학이라는 학문 자체에 대해 한바탕 세미나를 벌였다. 특히 ‘신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에 왜 고통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중심적이었다.

세상의 고통과 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신정론’에 대한 담론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가장 좋아했던 교수의 가르침이 있는데, 바로 신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니라는 것이다. 신은 피조물의 요구대로 금을 뚝딱 만들어주는, 고통을 없애주는 존재일 이유가 없다. 게다가 고통은 얼마나 주관적인가. 타인의 죽을 병보다 자신의 감기가 더 큰 문제라는 말도 있듯, 고통의 문제를 신을 통해 해결하기는 어렵다. 다만, 필자는 제주에 오는 비행기에서도 무서울 때마다 신을 찾아 기도를 했다. 당신이 나를 꼭 지켜줄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들어는 달라고, 함께는 해달라고 요청했다. 어쩌면 나와 함께 고통하는 예수의 모습이 구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신정론에 대한 질문은 신학생에게 평생 따라붙는 질문이다. 그래서 질문을 한 이유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문득 서로 다른 우리가 어떻게 제주에 모이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한 사람은 대학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보기 전, 싱숭생숭한 마음에 즉흥적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시험공부 대신, 익숙했던 것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제 대학생활의 반을 보낸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내놓았다. ‘사랑하는 연인의 죽음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제주에 왔다’라고 말했다. 정적이 흐르고, 그 누구도 쉽게 말문을 열지 못했다. 그제야 그가 세상의 고통에 대해 질문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혹시 말실수를 하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는데, 당사자는 아무렇지 않게 연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었고, 또 죽음은 어떻게 맞이했는지. 사진을 보여주면서 자랑을 하기도 하고, 참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이 신기했다. 그는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었다. 그에게 사랑은 고통일 수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 퇴실 시간이 가까워지고 나서야 정신없이 일어났다.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한 스텝들은 싱그러운 얼굴로 아침을 열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게스트들은 부스스한 차림으로 조식을 즐겼다. 오늘의 여행 계획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할 말이 없어 그저 듣고만 있었다. 그러다 앞에 앉은 스텝들에게 자신만의 명소를 추천해달라고 했다.

 

 

그들은 제주도민보다 제주의 곳곳을 잘 알고 있는 이들이기에, 눈을 반짝이면서 이곳저곳을 알려주었다. 꼭 가야한다는 곳은 고흐 전시와 금릉해변이었다. 여기서 고흐 전시관까지 가는 길에 대해 저마다의 코스를 이야기하다가, 가장 효율적이고 좋은 방법을 도출해 일러주기도 했다. 경험자의 자세한 이야기 덕분에 인터넷 검색에 의존하는 것보다 덜 헤맬 수는 있었지만, 역시 한 번에 길을 찾지는 못했다.

생뚱맞게도 주상절리대 산책로를 만났는데, 아무도 없는 고요한 산책을 즐길 수 있었다. 비온 뒤 더욱 강하게 나는 흙냄새와 풀냄새를 맡으면서, 정말 제주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을 헤매도 짜증이 나기보다는 기분이 좋을 수 있다는 게 그저 신기했다. 과연 고흐 전시가 우연한 산책보다 정서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을지, 기대 반 걱정 반인 마음으로 전시장에 들어섰다.

첫 시작은 흰 천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공간이었다. 빛과 색채가 캔버스에 옮겨지는 때를 표현하는 것 같았다. 크게 와 닿는 것이 없어 설명을 착실하게 읽어나갔는데, 고흐가 목사 아버지의 영향으로 목사의 꿈을 꿨지만 신학대학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현실과 다른 신학 교육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인물로 느껴졌던 고흐에게 조금씩 관심이 생겼다. 어쩌면 내가 원했던 이야기가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은 큰 스크린에 영상으로 여러 그림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딱딱하고 뭉뚝한 붓 터치, 바로 옆의 색감과 비교 했을 때 은은하지 않고 튀는 색감의 그림들이 많았다. 예쁘고 자연스럽게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 여인의 삶의 굴곡과 강인함, 동시에 우울하고 슬픈 느낌을 주는 그림에서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신학이 아닌 그림으로 하층민을 구원할 수 있다던 그의 사고와 정말 맞닿아있었다.

신학에는 예술이 구원할 수 있다는 ‘예술구원론’이라는 개념이 있다. 실제로, 기존의 예배를 드리기 힘든 지적장애인이 예술을 통해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선교사가 원주민을 만났을 때, 먼저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면서 다가가는 것과도 비슷하다. 음악이 세계 공용어라는 말도 있듯, 인간에게 예술은 공감 이상의 무언가다. 필자는 신학을 배우면서 ‘다양성’에 눈을 떴고, 예배 등이 전형적인 형식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제의나 설교가 아닌 영상, 그림, 음악 등의 예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시 전반적으로 예술을 통해 민중 혹은 약자의 삶을 구원하겠다는 고흐의 신념에 정말 공감이 되었다. 특히 고흐도 강자보다는 약자에 가까운 삶, 고통의 삶을 산 것 같아 그의 그림과 이야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다.

 

 

타인을 돕고 싶다는 따뜻한 마음, 그리고 자신도 고통 속에 있었다는 당사자성. 단순히 보기 좋은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떠나,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면서 그림이 주는 감각을 그대로 느껴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고흐는 파란색과 노란색을 즐겨 썼다고 하는데, 생명력이 넘치는 그 따뜻한 색감에서 고통에 대한 위로와 생명에 대한 희망도 엿보았다. 유레카! 예술에서 갈망하던 이야기를 찾았다는 행복에 무겁던 배낭도 가볍게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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