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석무의 풀어쓰는 다산이야기>

▲ 박석무

해방 후 『조선유학사』라는 저술로 조선의 유학사를 정리한 현상윤(玄相允)은 “영남의 학자들은 이러한 주리설(主理設)을 주장할 때에 그 동기가 주로 율곡학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퇴계의 학설을 옹호하려고 하는 당쟁의 감정에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동서로 분당이 된 이래로 동인들은 무조건 퇴계를 옹호하고, 서인들은 율곡만을 옹호하면서 당쟁이 학설에까지 영향을 미쳐, 나라가 망할 때까지도 그치지 않던 싸움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율곡을 비방하고 폄하하는 동인들의 경향은 학설에 그치지 않고 율곡의 정책에도 언제나 반기를 들면서 정책의 실현을 막았던 사실이 알려져 있습니다. 동인의 영수였던 허엽, 그의 아들 허봉은 대표적으로 율곡을 공격하던 저격수였는데, 허봉의 아우 허균(許筠:1569∼1618)은 아버지, 형과는 다르게 율곡이 건의했던 정책이 옳았지만 반대파들의 저지로 실행되지 못했음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여러 군현(郡縣)에 액외(額外)의 군대를 설치해야 한다(列邑置額外兵)”라고 율곡이 주장했는데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성소부부고』「政論」) 이 내용은 바로 율곡의 반대편에 서있던 집안 출신이 율곡의 「십만양병설」이 사실임을 증명해주는 대표적인 주장입니다. 허균은 율곡의 33년 후배로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이니 허균의 주장에 의심할 여지는 없습니다.
 
남인들이 숭앙하는 최고의 학자가 퇴계라면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운 학자는 성호 이익이었습니다. 성호는 “임진왜란 전에 율곡은 마땅히 십만의 군대를 길러야 한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선견지명의 말이라고 칭찬했다(壬辰亂前 栗谷謂 當飬十萬兵 人稱先見:『성호사설』「예양병」)”라고 말하여 명확하게 십만양병설의 실재를 확인하였습니다. 공정한 학자이지만, 분명히 남인 가문의 학자인 다산 정약용도 “우리나라 선배 중에 오직 문성공 이이만이 군적(軍籍)을 개혁하자며 십만양병설을 임금 앞에서 거듭거듭 말하였다.(我東先輩 唯文成公臣李珥 以改貢案 改軍籍 養兵十萬之說 申申然陳於上前 眞是有用之學也:『경세유표』定本25권 p.136)”라고 말하며 십만양병설은 실학적인 주장이자 실용할 수 있는 주장이라고 기술하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명확한데도 언제부터인가 영남의 남인들은 율곡의 십만양병설을 뒷날 율곡의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거짓된 이야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장문의 논문을 써서(『대동문화』19집) 십만양병설은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요즘에도 영남의 유림이라는 사람들은 율곡 폄하의 주장에 곁들여 십만양병설까지 사실일 수 없다고 항다반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때의 율곡 주장이 반대파들의 저지로 실행하지 못해, 임진왜란이라는 불행을 겪었던 것도 가슴 아픈데, 주장까지 거짓이라고 폄하하고 있으니 할 말이 없습니다. 허균·이익·정약용은 당파도 다른데, 그들까지 율곡의 추종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요.
 
퇴계를 높이고 존숭함이야 탓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곡 폄하가 퇴계 존숭의 일로 여기는 것만은 이제라도 그친다면 어떨까요.

<다산연구소 http://www.edasan.org/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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