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초록 에세이> 오솔길과 들꽃

 

내가 사는 아파트 앞, 산 오솔길에 앙증맞게 핀 들꽃 한 송이. 나는 요즘 이 들꽃을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래 그 꽃은 노란색의 애기달맞이꽃이다. 어떤 이는 이런 나를 두고 아직 철이 덜 들었다고 말하지만 이 복잡한 세상에서 잠시나마 꽃을 본다는 것, 일상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자연과 교감한다는 것은 얼마나 값진 일인가.

녹음이 짙게 드리워진 저녁 무렵, 동네 산을 오른다. 산에 드는 순간 귀청을 때리던 온갖 소음은 사라지고 새소리, 바람소리, 나뭇잎 서걱대는 소리만이 내 뒤를 졸졸 따라온다. 산길은 아파트와 텃밭을 끼고 마을로 가는 언덕바지 한쪽으로 열려 있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오밀조밀한 길이다. 한 사람이 다니기에 알맞은 폭이어서 더 찾게 되는 그윽한 숲길이다. 앙증맞은 온갖 여름 꽃들이 층을 이루고 있는 산 오솔길 걷기. 시간 내기 어려운 날만 빼고, 산책하는 기분으로 찾는 산이지만 올 때마다 느낌이며 분위기가 다르다.

아파트 사람들의 쉼터이기도 한 이 산이 내게 주는 혜택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산 밑 텃밭 옆에는 언제나 맑은 샘물이 고여 있고 운동 기구도 놓여 있다. 늘 불어오는 청량한 산바람과 고운 산새소리, 그리고 끊이지 않는 생명들의 숨소리는 또 얼마나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가.

 

 

산 오솔길에서 만나는 들꽃은 지칠 대로 지친 내 영혼에 한 줄기 구원의 빛으로 다가오곤 한다. 오솔길이 시작되는 산머리에서부터 내 마음은 콩닥콩닥 뛴다. 저만큼 풀숲 사이로 들꽃이 방싯 웃고 있다. 나의 저녁 산책길을 즐겁게 해주는 반가운 손님이다. 아, 저렇듯 해맑은 꽃이 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인내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일까? 나는 이 들꽃을 볼 때마다 마음의 빚을 진다. 들꽃은 매일 내게, 보는 즐거움을 누리게 해주건만 내가 들꽃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미안함이다. 오솔길 걷기에 가끔 동행하는 아내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것이야말로 자연(들꽃)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내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솔길 끝에는 논밭이 있는데 이곳에도 들꽃이 피어 있다. 몇몇 이름을 알 수 없는 들꽃이 논두렁 밭두렁을 환하게 장식하고 있다. 논두렁 옆 안쪽에는 농가 세 채가 서쪽 큰길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 앞으로 우람한 소나무 한 그루가 외롭게 서 있다. 오랜 세월 마을 지킴이로 당당하게 서 있는 이 노송은 주변 자연과도 참 잘 어울려서 볼수록 마음을 끌어당긴다. 산에서 내려온 오솔길은 샘터를 지나 이들 농가 옆으로 나있다.

들꽃 곁에 앉아 여름이 다가온 모습을 본다. 들꽃은 때가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 내게 위안과 기쁨을 주었다. 일이 잘 안 풀리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또는 세상살이가 삭막하게 느껴질 때 내 발걸음은 으레 동네 산으로 향한다. 산 숲에 들면 여기저기서 풀꽃들이 인사를 한다. 새들도 장단을 맞춘다. 나뭇가지에 앉아 뭐라고 짹짹거리던 참새들이 어느 순간 투스텝으로 날아오르면 내 발길도 잠깐 멈추게 된다. 다 반가운 소리이고 몸짓이다. 나무들도 일제히 잎을 흔들며 다가서는데 나뭇가지를 건드리며 지나가는 산바람이, 참 잘 오셨어요, 하며 내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뭉클해진다. 이렇듯 풀꽃과 나무와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침묵 언어가 있다. 자연이 내는 소리는 시끄럽지 않다.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진다. 그걸 알아차리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들 생명, 산 생명들은 언제 보아도 거룩하고 신비롭다. 크고 화려한 것만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여름에 핀 들꽃 한 송이는 미미한 존재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람에 꺾이고 발에 짓밟혀도 다시 살아나 그 질긴 생명력을 뽐내는 들꽃 한 송이에서 우리는 자연의 숭고함을 배우게 된다. 하찮은 것이 때로는 더 위대하다는 걸 저 들꽃 한 송이가 보여주고 있다. 들꽃은 자연의 섭리가 닿지 않고서는 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 우연이란 없다. 만나고 헤어지고 피고 지고 하는 일을 자세히 뜯어보면 다 사연이 있게 마련이다.

들꽃의 생애는 사람살이와 닮은 점이 참 많다. 사이좋게 어울려 피기도 하고 때론 제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다른 꽃들을 밀쳐내기도 하며 눈길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숨어 홀로 피는가 하면 애달프게도 병이 들어 생을 일찍 마감하기도 한다. 시기하고 웃고 울고 좌절하고 슬퍼하고 다투고 자랑하고 화내고….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목숨들은 다 질서와 감정을 지니고 살아간다. 향기와 멋으로 세상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는 들꽃 한 송이를 보면서 나 자신을 뉘우치게 된다.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이며 이 세상에 어떤 도움을 주고 있는가, 스스로 묻게 되는 것이다.

풀꽃들을 보기 위해서는 산으로 들로 강가로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다면 집에서 직접 꽃을 길러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꽃을 기르면 얼굴색도 꽃핀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꽃을 길러본 사람만이 아는 새로운 기쁨이리라. 바쁜 삶에 얽매여 꽃 볼 짬도 없다고 투덜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잠시 여유를 갖고 조급한 마음을 다스릴 필요가 있다.

들꽃이 사람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제 몫 이상의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들꽃은 또한 절대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지도 닮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저 생긴 대로 피고 지면서 한 생애를 조용히 살아간다. 주어진 만큼의 힘으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그 일을 쉬지 않고 해낸다.

 

 

들꽃은 베풂과 나눔이 뭔지도 알고 있다. 들꽃은 자신이 가진 향기를 이웃들에게 아낌없이 베풀 줄 안다. 베풀고 나눌 줄 아는 마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변덕이 죽 끓듯 하고, 탐욕의 손길을 서슴없이 내밀고, 거짓이 하늘을 찌르고,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들꽃의 겸손과 겸양은 무엇을 말하는가, 곰곰이 되새겨 볼 일이다.

꽃을 보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추억이 있다. 빛바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고향의 여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수업을 끝내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 친구들을 데리고 산으로 들로 꽃구경을 다녔다. 산과 들에서 만난 숱한 꽃들. 그 모습이 생생하니 살아 있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니 흰 눈 덮인 겨울 산에도 꽃은 피어났다. 언 땅을 뚫고 나온 복수초와 수선화는 우리들 눈을 의심하게 했지만 그 진실을 아는 순간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경이이자 환희였다. 산에 들에 지천으로 피어나던 온갖 꽃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그 고운 빛깔과 무늬에 감탄하고 향기에 몸을 들썩거리고 손에 닿는 보드라운 질감에 놀라고 주변 풍경과 너무도 잘 어울려서 감동하고…. 그것은 자연이 보여주는 훌륭한 예술의 기교였다. 이른 봄, 마을 뒷산으로 가면 양지바른 산비탈 여기저기 봄꽃들이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꽃을 꺾어 향기를 맡곤 했다. 나이가 들어 객지에 살면서도 고향은 언제나 내 품에 안겨 있다. 삶이 힘들고 각박할 때 고향은 아랫목처럼 내 마음을 따듯하게 감싸준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철따라 산에 들에 풀꽃이 지천으로 피어난다. 때로는 한겨울에 봄꽃이 피고 한여름에 가을꽃이 피기도 하지만 제철에 피는 꽃이 더 아름다운 건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들판을 따라가면서 만나게 되는 숱한 꽃들은 다 이름과 사연을 지니고 있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며 이름을 낱낱이 알 수 없으니, 들꽃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다만 부끄러울 따름이다. 게으름 탓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이즘 산하는 들꽃들의 잔치 마당이다. 저마다의 정서를 아름답게 가꿔주는 들꽃이야말로 자연의 고마운 선물이 아닐 수 없다. 매일 경쟁 속에 내몰린 이들에게 한 떨기 꽃이 던져주는 위로와 기쁨은 참으로 고마운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꽃을 보고도 별다른 감정이 없다. 빡빡한 현실이 삶의 여유를 앗아간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삶이 아무리 고달플지라도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나 삶을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 그래, 지금부터라도 이런 관조의 삶을 실천해볼 일이다.

바쁘단 말을 하루에도 수 십 번 되뇌는 사람들에게 꽃은 한낱 사치로 여겨지기 십상이지만 생각을 바꾸면 진정한 ‘나’를 되찾을 수 있다. 한 송이 들꽃을 앞에 놓고 가만히 내면에 귀를 기울여보라. 보다 순수하고 성숙해진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온 나 자신에 대한 반성은 늘어진 삶에 자신감을 불어넣어준다.

아무도 찾지 않는 외진 곳에 홀로 피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꿋꿋하게 나는 들꽃의 생애는 거룩하다. 크고 화려한 것만이 꽃이 아니다. 돌 틈 새로 피어난 여리디 여린 작은 풀꽃이 더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은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다. 세상 이치에서 나온 말이다.

 

 

햇볕 괸 산비탈에 다분다분 피어난 들꽃 무리. 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오늘도 그렇게 한 송이 꽃으로서 살아간다. 산바람 강바람에 꽃 대궁을 흔들며 몸속에 지닌 향기를 어디론가 실어 보낸다. 들꽃의 삶이란 이처럼 질서정연하다. 저 들꽃에 견주어 인간들이 보여주는 삶의 행태란 얼마나 부끄러운가. 시기하고 헐뜯고 싸우고…. 세상이 빨리 변할수록 인간 본연의 순수함으로 돌아가야 한다. 햇살 한 줌, 향기 한 줌, 물 한 모금의 고마움을 아는 사람으로 거듭나야 한다.

요즘 도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풀 냄새 가득한 들판을 만날 수 있다. 집 근처, 밭둑, 기찻길 옆, 도로가 할 것 없이 여름 꽃들이 담뿍담뿍 피어 있다. 큰길가에 핀 들꽃들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이쪽저쪽으로 휩쓸린다. 흙먼지 자욱이 뒤집어쓰고도 아무런 불평불만이 없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오늘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솔길 산책에서 얻은 삶의 지혜를 그대들에게 나눠주고 싶다. 들꽃 향기를 그대들 가슴에 안겨주고 싶다.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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