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 류승연

초등학생들에게 ‘똥’은 절대시되는 무언가다. ‘똥’이라는 말만 들어도 까르르 웃어대지만 한편으론 ‘똥’에 대한 거부감 역시 극대화돼 있어서 똥에 얽힌 일화라도 하나 있으면 평생 놀림거리가 된다.

우리 딸도 ‘똥’이라는 말만 들으면 웃음부터 터트린다. 친구들과 남녀로 편을 갈라 세력 싸움을 할 때도 “이 똥꼬야!”라고 하던가, “너 자꾸 그러면 입에다 똥을 먹일 거야”라는 말을 하고는 지가 더 좋다고 숨넘어갈 듯 웃는다.

대신 그렇게 재미난 똥이라도 친구들 앞에서 똥 싸는 모습을 보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크다. 화장실에 가지 않고 참다가 팬티에 똥물을 살짝 지리고 온 적이 두 번 있었던 것이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아이들과 가는 놀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한 엄마가 있다. 자꾸 곁눈질로 남편을 쳐다본다.

“아는 사람이야?”라고 물으니 6학년 때 동창이란다. 자주 마주치는데 가서 인사라도 하고 오라니까 질색을 한다. “싫어. 쟤 6학년 때 바지에 똥 쌌던 애란 말이야.”

숫기 없는 6학년 여학생. 수업 중에 선생님에게 화장실 갔다 오겠다는 말을 못하고 끙끙대다 결국 바지에 실례를 해버렸나 보다. 벌써 30년 가까이 지난 과거의 일인데 아직도 남편은 그녀를 애 엄마가 아닌 ‘바지에 똥 싼 여자애’로 대하고 있다. 그 때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지금까지도 그녀에 대해 질색을 하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 안에서 용변을 본 학생을 휴게소에 두고 간 뉴스를 보고 “어쩌나~”라는 걱정이 먼저 들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그 학생이 느꼈을 수치심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후에 아이가 학교생활에 잘 적응을 할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남편이 놀이터에서 만난 40대의 동창생을 ‘바지에 똥 싼 애’로 기억하듯, 그 학생 역시 ‘버스에서 똥 싼 애’라는 낙인이 붙어 놀림거리가 될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해당 학생은 전학을 갔다고. 감수성 예민한 어린 소녀가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땐 마음을 다칠 환경으로부터 부모가 차단을 해주는 것도 좋다고 본다.

문제는 ‘버스에서의 똥 사건’ 그 이후의 일이다. 휴게소에 아이를 놓고 갔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담임교사에게 혹독했던 여론이 점차 동정론으로 바뀌어 가고 있는 추세인 것도 같다.

같은 반 학생들의 입을 통해 속사정이 전해지고 나서부터다. 해당 아이의 장염 증세 때문에 담임은 수련회에 가지 말 것을 권고했으나 부모가 수련회 참석을 강행했다고.

아이가 고통을 호소하자 담임은 버스기사에게 갓길에 정차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고도 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의 응급조치로 버스 안에서 용변을 보게 한 것이라고. 휴게소에 놔두고 간 것도 해당 아이의 부모가 그러라고 했다고.

“그래도 담임이 잘못이다. 아니다. 부모가 잘못이다. 아니다. 버스기사가 문제다. 비상 깜박이를 켜고 갓길 주차를 했어야 했다.” 이 사건을 두고 여론은 갑론을박 중이다.

나는 여기서 ‘개근 강박’에 걸린 우리나라 부모들에 관한 얘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다. 아이가 아파도 굳이 학교에 보내는 게 미덕인 줄 아는 이 시대의 부모들에게 “그게 최선입니까?”라고 묻고 싶은 것이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졸업식 날. 졸업장과 ‘예쁜 미소상’ 등을 받은 우리 딸은 친구들이 받은 개근상을 부러워했다. “엄마~ 친구들은 개근상을 받았는데 나는 왜 못 받았어?”

개근상을 못 받은 이유는 아플 때마다 엄마가 유치원에 안 보냈기 때문이지. 아픈데도 유치원 가서 놀다오면 다음 날 더 심해졌거든. 그래도 딸은 친구들보다 상장의 개수가 하나 더 적은 게 못내 아쉬운 눈치다.

아이가 아플 때는 쉬어야 한다. 놀이도 공부도 다 필요 없다. 부모 모두 직장에 나가 아이를 맡길 데가 없으면 양가 할머니들을 호출 하던가 그도 여의치 않으면 각종 돌봄 시스템을 이용해서라도 아이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해야 한다.

개근상이 성실성과도 연관되는 걸로 생각하는 부모들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학교에 빠지지 않고 등교하면 아이가 성실해지게 되나? 아니다. 어린 아이들의 개근상은 부모 고집의 산물이지 아이 성실성의 발현이 아니다.

딸의 초등학교 입학 오리엔테이션 날. 교장 선생님이 먼저 말을 꺼낸다. 학교에 부지런히 보낼 생각들 마시라고. 아이가 아프면 집에서 쉬게 하고, 가족들끼리 여행 갈 일 있으면 마음껏 다녀오시라고.

“이 자리에 앉은 어머님들. 학창 시절 개근상 받은 분들 손들어 보세요.”

대다수가 엉거주춤 손을 든다.

“많으시네요. 그렇죠. 우리 때는 그랬습니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아파서 죽을 것 같아도 어쨌든 학교는 꼬박꼬박 다 갔지요. 그래서 어머니들 성공하셨습니까? 개근상 받아서 성실한 사람이 되어서 성공한 인생들 살고 계십니까?”

엄마들이 와르르 웃는다. 그렇다. 학창 시절의 개근상은 성인이 되었을 때의 성실성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 굳이 아이가 아파도 ‘성실한 인간을 만들기 위해’ 학교에 보내는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얘기다.

‘버스에서의 똥 사건’을 보며 안타까운 건 그 지점이다. 장염이 있는 아이를 굳이 무리해서 수련회에 참여시킨 부모의 판단이 아쉬운 것이다. 설령 엄마가 직장맘이라 낮 시간 동안 등교하지 않는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없었다면 학교에서의 돌봄 교실을 이용했어도 좋았을 걸 그랬다.

그럴 여력이 없는 학교였다면 낮 시간 동안 도서관이나 자료실 등에 아이를 보내 자원 봉사하는 학부모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어도 좋았으리라. 초등학교 도서관과 자료실 등에는 요일 별로 늘 상주를 하는 학부모들이 있다.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면 보건실(양호실)에서 보건 선생님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고. 어찌됐든 방법은 많았다.

장염은 성인이 된 후에도 흔하게 걸리곤 한다. 성인들의 장염은 주로 술병과 함께 찾아오곤 하는데 나 역시 안주 없이 깡소주만 진탕 퍼마시던 20대 때에는 장염도 여러 번 걸렸었다.

장염일 때의 내 똥꼬는 내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배의 통증. 찌르는 듯하다가 곧이어 부글부글하는 느낌과 함께 똥꼬가 반응을 하기 시작한다. 버스 안에서 이동 중일 때가 가장 무섭다. 지하철에서 신호가 왔다면 벌렁대는 똥꼬를 부여잡고 다음 정거장에 내리기라도 하지.

버스에서는 내릴 엄두가 안 난다. 모르는 낯선 곳에 내려 화장실을 찾아다닐 엄두가 안 나는 것이다. 때문에 버스에서 신호가 오면 초인적인 인내로 식은땀을 흘려대며 집까지 가곤 했다.

어른도 참기 힘든 장염을 초등학생이 달리는 버스 안에서 극한의 극한까지 참아댔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진다. 버스 안에 평소 좋아하는 남자애라도 있었다면 상황은 더 최악이다. 나라도 친구들 얼굴 보기 창피해서 학교에 못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것은 결국 무리해서 학교를 보낸 부모의 책임이 가장 크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부모도 마음속에서는 이런 죄책감을 느끼고 있기에 사건을 공론화시켜 담임교사에게 죄책감을 미루려 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찌됐든 어른들의 싸움은 어른들이 알아서 잘 하시되 부디 아이는 충격을 빨리 털어내고 새 학교에서 적응을 잘 했으면 좋겠다. 초등학생들에게 ‘똥’에 관련된 사건은 세상 무엇보다 크게 다가온다. 그 지점을 부모나 교사 등이 잘 캐치해서 아이의 마음 달래기에 당분간 집중을 했으면 좋겠다. ‘버스에서 똥 싼 애’가 아닌 평범한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로 살아갈 수 있도록.

 

 

 

키워드
#N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