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자연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남자 박시도 이야기-다섯번째

박씨와 박씨가 만났다. 그들의 만남으로 선운산 골짜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흉물스럽기 짝이 없었던 차 밭 주변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인연이라면 인연이겠고, 우연이라면 우연일 것이며, 필연이라면 역시 필연이기도 할 것이다. 한 사람과 또 한 사람의 만남을 누가 뭐라고 똑 부러지게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것은 애당초 규정할 수도 없거니와, 규정하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박시도씨와 박봉진씨는 만났다. 나이는 한참이나 차이가 나고, 성씨는 같지만 친척 같은 사이는 아니다. 예전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소문이라도 들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박봉진씨는 사십여 년 전에 우연히 선운골에 들어 왔다가 정착한 이를테면 선운골 원주민 격이고, 박시도씨는 선운사 참당암 인근에 산재한 야생차를 둘러볼 목적으로 몇 차례 방문한 전력이 있을 뿐이다. 그때 그 시절에 두 사람이 어쩌면 잠시 스쳐갔을 법도 하지만, 두 사람 다 그런 기억은 없다.

 

▲ 가장 행복한 시간

 

돌아보면 역사도 깊다. 전화 한 번 걸자고 하면 이십 리도 넘는 우체국까지 타박타박 걸어야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선운골이 아직 도립공원도 무엇도 아닌 그저그런 절간 하나만 있어서 아무나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두 남자가 들어왔다.

한 남자는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울부짖는 아내를 달래가며 동백여관을 지었고, 다른 한 남자는 복숭아 과수원을 운영하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막걸리 같은 것을 파는 장사를 겸했다. 동백여관을 지은 황용성씨는 오늘날 동백모텔과 선운산호텔로 사업을 확장시켰고, 농원 운영과 막걸리 장사를 겸했던 박봉진씨는 귀곡산장 하나를 상징처럼 남겨놓은 채 여전히 막걸리 장사를 한다.

그렇다. 박봉진씨는 자기가 지은 집을 귀곡산장이라고 부른다. 멀리서 보면 그럴싸하지만 가까이 가서 보면 귀신도 곡을 할 것만 같은 느낌이기 때문이란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주인 자신은 어쨌든 그렇게 느낀단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느낌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어떤 괴기한 느낌을 목적으로 집을 지은 것도 당연히 아니었다. 복숭아 농사를 지으면서 막걸리 장사를 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이를테면 정체성 같은 것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런 집을 지은 것일 뿐이었다.

 

▲ 일명 귀곡산장

 

북녘에 고향을 둔 그는 한때 소설가를 지망하기도 했지만, 수상한 세월 탓에 도시 생활조차 포기하고 잠시 머물고자 했던 선운골에서 그만 붙박이가 되고 말았다. 어리버리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고 나니 더 이상은 떠돌이생활조차 할 수가 없게 되었다. 복숭아 농사에 막걸리 장사에 그야말로 정신없이 세월 보내기를 십여 년쯤 하고 나니 “내가 이게 뭔 짓이냐”싶더란다.

이제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을 원하게 되었다. 마누라도 새끼도 그 무엇도 눈앞에 보이지 않는, 완벽하게 혼자인 시간을 하루에 많이도 말고 한 시간쯤만이라도 갖고 싶어진 그는 자기 혼자만의 집을 짓기 시작했다. 집 주변에는 오죽이며 시누대 같은 대나무도 심었다. 그리하여 그는 비가 내리거나 밤이 깊어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혼자 그 집안에 틀어박혀 음악을 듣기도 하고, 서로의 몸을 비비며 뒤척이는 대나무 소리들 속에서 철학이며 문학 관련 서적들을 뒤적거렸다. 가끔은 마음에 둔 스님을 초대해서 벽암록이니 아함경 같은 불경을 주제로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 개인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 귀곡산장은 한때 수많은 청춘 여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청춘남녀 연인들이 아니라 여인들 말이다. 그래, 한때 그런 시절이 있었다. 세상사에 의문을 느끼고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나선 여인의 뒷모습이 호젓한 산길에서 자주 목격되었다. 그들 중에 일부는 대웅전 맞은편 개울 너머 층층나무와 대나무들 사이로 아련하게 서 있는 귀곡산장을 주목했다. 무심히 걷다 보면 층층나무와 대나무들 사이로 그 건물은 보일 듯이 안 보일 듯이 수수께끼처럼 보이게끔 돼 있으니,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발견한 그 건물이 주는 어떤 느낌에 끌린 여인들이 조심스레 다가오곤 했다.

 

▲ 귀곡산장 주인 박봉진씨와 함께

 

팔십년대 중반부터 구십년대 후반까지를 아마 귀곡산장의 전성시대였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전성시대라는 표현이 다소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루에도 몇 장씩의 쪽지가 문틈에 꽂혀졌다. “여기가 대한민국 땅이 맞는가요?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아서 그냥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하는 식의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는 내용의 쪽지가 있는가 하면, “주인이 뉘시온지, 뵙고 싶어 온 종일 기다렸음에도 땅거미가 밀려와 인연이 아닌가 하여 이만 떠나 가옵니다”같은 청순가련이 뚝뚝 묻어나는 쪽지도 있었고, 마치 무슨 궁합이라도 보자는 듯이 자신의 나이와 생일과 태어난 시간에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적나라하게 적어놓고 떠난 여인도 있었다.

그 많은 쪽지들 중에 남자로 짐작되는 필체도 아주 없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여성임이 분명한 필체와 문장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그 집은 문을 닫아놓긴 했어도 자물쇠 같은 것을 걸어본 적은 없었다. 누구든지 언제라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앉아 있으라고 자물쇠를 두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누구든지 언제라도 용기를 낼 수만 있다면 문을 열고 들어가서 주인을 기다리기로 하자면 못할 것도 없는 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니 어쩌면 순수하게도 그렇게까지 무례하거나 혹은 용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렇게도 순수한 팔십년대가 지나고, 구십년대도 지나서 이천년대에 접어들었을 즈음부터 그 집에 대한 주인의 애정은 식어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다 커버린 아이들이 서울로 유학을 가서 고시를 본다 어쩐다 부산을 떨어대는 판이고 보니 자기 자신의 정체성 같은 것은 이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돼버린 까닭이었다. 마음의 양식보다는 돈이 더 중요해진 그는 이제 자신이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집을 가리켜 귀곡산장이라는 등의 험담을 늘어놓기까지에 이르렀다.

 

▲ 차 만들기 열공중인 스님

 

자기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이건만 흐르는 세월에 부대끼고 나서 보니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고, 가만히 쳐다보고 있노라면 귓속으로 귀신 소리가 막 들리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 평이 채 안 되는 이층 방을 암벽등반 전문가들에게 세를 놓고, 두 평이 채 안 되는 아래층 방은 찾아오는 친구나 손님들에게 빌려주기나 할 뿐 자기 혼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책들과 음반들, 그리고 오디오세트는 먼지가 쌓이고 또 쌓인 채로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단다’하는 얘기나 어렴풋이 들려주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런 귀곡산장이 박시도씨의 눈에 띄었다. 차에 관심을 갖고 차에 빠져든 이후 어디에서 어떤 풍광을 접하든 차와 관련해서 상상하기를 즐겨하는 박시도씨에게 귀곡산장은 일언이폐지하고 귀물이었다. 별 인연도 없는 도립공원 선운산 골짜기 어디에서 어떤 인연으로 이런 장소를, 이런 건물을 빌릴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전기까지 들어온다. 산골짜기에서 냉장고를 쓸 수 있고, 선풍기를 쓸 수도 있는 것이다. 장소는 또 얼마나 넓은가. 자동차를 몰고 와서 주차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임대한 몽골텐트를 필요한 대로 여유만만하게 설치할 수도 있다.

와아, 이게 뭐냐. 이게 천국이 아니고 뭐란 말이냐. 장소가 넓어서만 좋은 게 아니다. 저마다의 독특한 생김새를 자랑하는 거대한 고목들, 대나무와 층층나무와 구지뽕나무들, 그 사이를 요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들처럼 빠져 나가는 바람과 안개와 상서로운 기운들, 이것은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는 진품이요 명품이라 이를 만하다고 박시도씨는 얘기한다.

 

▲ 손님들의 체험학습

 

그 중에서도 안개는 특히 명품 중에 명품이었다. 선운사 도솔암 옆으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보이는 바다에서 가끔 밀려오는 안개가, 이른 아침에 그 무슨 비밀작당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순식간에 한 치 앞도 못 보게 만들어버리곤 하는데 이 안개 속에 풋풋한 바다 냄새가 들어 있는 것이어서, 산속의 과묵한 나무들이 바다의 상큼하고 발랄한 기운으로 흠뻑 목욕을 한다. 그때 바다와 산중의 두 에너지가 섞여서 무엇인가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해 내는데 이게 바로 보물이라는 것이다.

바다의 생명을 잔뜩 머금은 자욱한 안개와 고목들, 안개가 걷힌 뒤의 쨍쨍한 햇볕과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이파리들, 밤이면 나타나는 반딧불이와 낭랑한 휘파람새 소리들, 이 모든 자연현상들이 어우러져서 차의 맛을 풍부하게 하고, 향기를 깊고 그윽하게 하며, 약성 또한 풍성하게 한다고 박시도씨는 주장한다. 차를 잘 모르는 사람은 저게 뭔 뚱딴지도 아니고 자다가 봉창 긁는 소리냐 하겠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것이다.

박시도씨의 등장을 누구보다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사람은 아무래도 선운사의 스님들일 것이다. 스님들 전체가 차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해도, 제다법에 대해 대충 들어보기만 했을 뿐 직접 해본 적이 없는 스님들은 손수 찻잎을 따 들고 와서 어떻게 하는 것인지 묻기도 하고, 알고 있는 이론대로 해보기도 한다. 더러는 부처님 전에 올린 떡을 들고 오기도 하고, 각종 사탕이며 과일이며 소금이며, 심지어는 치약까지 들고 오는 스님도 있다. 이를테면 체험비랄까 강의료랄까, 하여튼 그런 어떤 감사의 보답 같은 것을 그렇게 하는 셈이다. 그러면 박시도씨는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빼서 멍석이며 채반이며 유념기 같은 각종 도구들을 내주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친절하게 지도편달까지 해준다.

 

▲ 시간을 빼앗아가는 손님들

 

“이 방식은 제가 대만에 갔을 때 본 것을 응용한 것인데요.”

“이것은 제가 무이산에 갔을 때 보고 느낀 뒤에 생각해낸 것이거든요.”

듣다 보면 박시도씨 본인이 누구한테서 직접 배운 것은 거의 없다. 그 어떤 귀신도 놀랄 만한 계기가 있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하루아침에 싹 터득해낸 것도 아니다. 모두가 어디에서 우연히 발견한 어떤 현상을, 혹은 얼핏 보고 느낀 것을 잊지 않고 마음에 두고 다니면서 자기 나름대로 연구하고 고민한 뒤에 얻어낸 결과들일 뿐이다. 하긴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이 무엇 있으며, 영구불변으로 고정된 방식은 또 무엇이 있으랴.

물론 세상에는 그런 교조적인 믿음에 경도된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스스로를 차의 명인이라 칭하는 어떤 사람은 자신의 차 만드는 방식을 절대 비밀로 하는 것은 물론이고, 외부인은 작업장 근처에도 드나들지 못 하게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무릇 기술이란 특허에 관한 법률도 있듯이 개인의 자산이요 보물이기 때문에 유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서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박시도씨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자신의 작업하는 모습을 하늘이며 땅이며 나무며 풀이며 이 세상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게 공개해 버린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아는 모든 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전수해주고자 애를 쓴다. 천하는 공물이요 기술은 나누는 데서 오는 기쁨이 소유하는 데서 오는 자족감보다 더 크고 훌륭하다는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고나 할까.

 

▲ 즉석 강의

 

어떤 사람은 박시도씨의 이런 태도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오해를 하기도 한다. 돈이 빤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대뜸 취하지 않는, 혹은 못하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나 더 많은 것을 도모하는 음모를 가슴에 품고 있으리라는 의심이다. 이런 음모론자들에 관한 얘기를 들었을 때 박시도씨가 보이는 반응은 딱 한 마디뿐이다.

“나아 참, 진짜로 이상한 사람들이라니깐.”

음모론자들이 보기에는 박시도씨가 이상하고, 박시도씨가 보기에는 음모론자들이 이상하다. 그런데 나는 양쪽 다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사람을 의심하는 사람은 당연히 이상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인가 의심을 하게 하는 박시도씨의 세상 살아가는 방식 또한 나로서는 아직 이해가 잘 안 돼서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다양성에 관한 훈련이 덜 된 탓일까? 어쩌면 그런 까닭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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