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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그저 강한 침묵으로 일관했다

<청춘 &> ‘혼자 떠난 제주도 배낭여행’ 3회 / 김혜영 김혜영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06.3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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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를 사랑하는 여행객들에게는 특이한 대화법이 있다. 자기소개를 마치자마자 어디를 여행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동쪽? 서쪽?’ 다음으로 ‘거기 몇 시에요?’라는 질문이 종종 따라붙는다. 타원형인 제주 섬을 시계로 빗대어 설명하는 것이다. 제주를 동과 서로 나눠 이야기하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특정 지역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것은 꽤 낯설고 어색한 일이다. 제주의 유명한 관광지보다는, 누군가 직접 경험한 작은 마을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0시 가량에 위치한 00리 00마을 등으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그 방법대로라면, 필자가 첫날밤에 묵은 숙소는 12시, 금능해변은 8시, 고흐 전시가 열린 중문은 6시에 위치한다. 반시계 방향으로 제주의 서쪽을 훑을 수 있는 루트인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반대로 고흐 전시를 보고 해변으로 이동하는, 비효율적인 방법을 택했다. 바다에 갈 때는 다음 일정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질리도록 바다를 보고, 파도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히는 지경에 이르고 싶었다.

설렘을 안고 도착한 금능해변은 전날 만난 게하(게스트하우스)의 스텝이 알려준 곳이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협재해변 바로 옆에 위치하는데, 이상하게 사람이 없는 조용한 바다라고 했다. 사실 모든 자연이 그렇겠지만 바다는 더더욱 구분이란 게 없는 자연물이다. 사람이 제멋대로 구역을 나누고 이름을 붙인 것인데, 금능해변과 협재해변은 하나의 바다였다가 각각의 이름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협재해변은 유명한 관광지가, 금능해변은 제주도민만 찾는 한적한 바다가 되었다. 똑같이 아름다운 두 바다를 보면서 이질적인, 어딘가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전, 한 동성애자 군인이 구속되었다. 근무시간에 근무지에서 성행위를 한 것도 아니었는데, 감옥에 갔다. 그는 이성애와 동성애라는 구분이 없었다면 감옥에 가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성적지향이나 사적인 성행위를 구분해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자리에 그저 존재하고 있는 두 바다가 그렇듯이,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는 행위에서 어떠한 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답답했다.

 

 

자동차의 소리나 사람의 말소리는 소음이 되고, 바다만이 그럴듯한 소리로 들렸다. 바다는 누군가를 정죄하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저 강한 침묵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강하게 온몸으로 나그네의 말에 듣고 답했다. 답답할 때 바다에 가고 싶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래, 오늘 테마는 바다다.’ 큰 고민 없이 바다가 보이는 게하를 찾고 곧바로 예약했다. 바닷바람에 얼어버린 몸을 빨리 녹이고 싶었는데, 숙소는 버스 한 대를 타고 내리면 바로 보이는 돌담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정류장과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니, 운이 좋았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도착하고 보이는 건 웬 공장 같은 건물이었다. 숙소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통 숙박을 전문으로 하는 저렴한 게하는 허름한 건물이나 평범한 상가인 경우가 많다. 숙박에 적은 돈을 투자하는 여러 명의 여행객들이 다 같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그 거대한 공장 같은 건물이 게하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근처엔 가로등도 적었다. 호스트의 안내문을 다시 읽고서야 게하 근처로 다가갔는데, 다시 보니 공장은커녕 유채꽃밭과 작은 바다에 어우러진, 꽤 운치 있는 풍경이었다. 이리저리 날뛰는 큰 개, 그리고 그 옆에 웃으며 서 있는 독특한 인상의 호스트까지. 어딘가 편안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들의 화룡정점이었다.

 

 

호스트 ‘보상’은 이런 반응이 익숙하다는 듯 돌담집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돌담집은 제주와 잘 어울리면서 건강에 좋은 집을 구상하다 만들게 된 것이고, 2층과 연결된 건물은 카페라고 했다. 휴식을 원하는 여행객을 위한 공간이었다. 그는 직접 숙소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는데, 카페에 무심하게 놓여있던 책 한권을 보여주며 마지막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여행 작가였다.

우연히 찾은 숙소의 호스트가 여행 작가일 줄이야. 그는 덤덤하게 자신을 소개했는데, 여행 책을 많이 출판한 것으로 손에 꼽히는 유명 인물이었다. 시간이 늦어 많은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이 아쉬울 따름인데, 오랜 시간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던 그는 여행객을 위한 게스트 하우스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제주도를, 금등리 마을을 택했다고.

사실 보상은 만나자마자 어떻게 여행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했는데, 아무 계획 없이 그날 만난 호스트의 추천지로 여행 중이라는 필자의 말이 흥미롭게 들렸나보다. 향긋한 커피 한 잔을 내려주며 여러 곳을 추천해주었는데, 여행 작가 출신 호스트로서 일종의 책임감과 부담감이 느껴진다며 웃었다. 그가 추천한 곳은 수월봉과 예술인 마을이었다.

자기 전 애인과 짧은 통화를 나누었다. 아름다운 풍경과 좋은 기운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는데, 갑자기 자신도 제주로 오겠다며 비행기 표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재학생인 그는 다음날까지가 시험 기간이었는데, 시험을 끝내자마자 오겠다는 것이다. 사실 홀로 여행을 시작한 것에 큰 의미를 두기보다는, 떠나고 싶을 때 떠난 결단력과 자유로움에 심취한 것이기 때문에 누군가 합류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지 않는가. 또 다른 추억을 남길 수 있을 것 같아 기대되었다. 누군가 올 것을 기다리며 보내는 밤은 유난히 길었다.

 

 

3일째 아침. 보통 여행의 녹이 들기 시작하면서 몸 이곳저곳이 뻐근해지는 시기인데, 이상하게 전보다 숙면을 취하고 잘 쉰 느낌이었다. 범상치 않은 매트리스 덕분인 것 같았다. 호스트에게 물어보니 그는 여행객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에 매트리스만은 가격에 타협하지 않았다고 했다. 게다가 돌담집이라 바다 근처임에도 집 자체가 따뜻한 느낌이었고 새 건물처럼 깨끗하면서도 불편하지 않은 곳이었다. 조식을 먹으러 카페로 올라갔더니 밤에는 보이지 않던 바다 뷰가 시원하게 펼쳐지고, 보상이 굽는 토스트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SNS에서나 볼법한 여유롭고 분위기 있는 아침이었다.

괜히 여행 작가가 아니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멍하니 바다를 보고 오늘은 어디에 갈지 구상하기 시작했다. 수월봉과 예술인 마을을 후보지로 두고 고민하다가, 오늘은 혼자 하는 여행의 마지막 날인만큼 트레킹을 하면서 자연과 가깝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수월봉을 가기로 했다. 저녁엔 사람이 북적거리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요즘 유행이라는 파티를 경험해보기로.

 

 

나중에 소중한 사람과 같이 와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숙소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다. 호스트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는데, 지금 예술인 마을로 가려는 참이니 함께 가자는 고마운 호의를 받았다. 아쉽게도 함께 가지는 못했지만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전혀 아쉽지는 않았다. 꼭 다시 만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서일까. 서로 명함을 주고받고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로 이른 아침의 마무리를 지었다. 다음엔 많은 이야기를 나눠봐야지.

유채꽃에 둘러싸인 한적한 버스 정류장에 앉아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렸다. 숙박 예약용 어플에서 계속 알림이 떴는데, 확인해보니 호스트와 게스트가 서로에게 피드백을 남길 수 있는 기능이 있었다. 벌써 무슨 피드백을 남긴 걸까. 괜히 설레는 마음으로 짧은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나갔다.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여행을 할 줄 아는 여행자입니다. 좋은 여행자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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