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소설-겨울 코스모스' 55회

이율 작가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07.06 15:28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거친 바닷바람은 여전했다. 아직 해는 중천에 떠있다. 다행이었다. 들고 있는 짐이 다소 부담스러웠고 장갑도 끼지 않은 손이 얼얼할 정도였지만 참을 만 했다. 동네까지 들어가는 버스에서 내린 것도 차가운 바닷바람을 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 버스 안의 몇몇 사람들이 흘깃, 경훈을 바라보았지만 이미 경훈의 존재를 기억하는 이는 없는 것 같았다. 얼마 걷지 않아 질마제 고개가 눈앞을 가로막았다. 반질반질 해진 버스 타이어 자국이 이제 막 따뜻한 기운을 머금기 시작한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을 발하고 있다. 경훈은 몇 번이고 넘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버티며 약 70-80미터는 되는 언덕배기를 느릿느릿 올라갔다. 이마에 땀이 맺히려는 찰라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고개의 정상에 오른 것이었다. 한층 거세진 바람에 바지가랑이가 찢어질 듯 나부껴댔다. 잔뜩 마른 몸이 넘어갈 듯 휘청거렸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검푸른색의…. 한껏 눈을 머금고 있을 파도도 보였다. 마치 군청색의 치마 끝단에 하얀색 꽃을 수놓은 듯한 모양새로 끊임없이 밀려들어 백사장을 희롱해댔다. 그리고 그 밑으로 숲이 보였다. 숲은 마치 모자이크를 한 것처럼 군청색과 백색이 어우러져 묘한 조화를 이뤄내고 있다. 쌓인 눈 때문이리라….

경훈네가 살던 동네는 바로 그 숲이 끝나는 언저리에서 시작되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집들은 일정한 지점에 이르면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마치 여러 개의 성냥갑을 모아놓은 것 같다. 아직도 군불을 때는 집이 있는지 모락모락 피워오르는 연기도 보인다. 거기서부터 이곳 질마제까지는 너른 들판이다. 경훈이 어렸을 적엔 중간중간 밭들도 섞여 있었으나 언젠가부터 전부 논으로 변해 있었다. 파도를 몰아온 세찬 바람은 이번엔 나뭇가지의 눈들을 실어서 너른 들판 한가운데로 뛰쳐나왔다. 들판 한 가운데 몇 채씩 어울리지 않게 들어서 있는 대형 비닐하우스에 부닥친 바람은 약간의 눈들을 마치 삯이라도 내는 양 헌납하고 또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질마제 고개가 연해 있는 산자락이 안착지다. 그들은 거기서 새로운 주자에게 바통을 건네고는 자신들의 임무를 마쳤다.

경훈은 짐을 내려놓은 뒤 두 팔을 한껏 벌려 보았다. 축 처진 국방색 상의 겨드랑이 부분이 마치 날개라도 되는 양 펄럭거렸다. 몸을 띄우면 날아가기라도 할 듯이. 그리고 두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백태가 군데군데 끼어있는 혓바닥을 길게 내밀었다. 바람이 혀끝을 타고 입안으로 들어와서 목젖에 걸렸다. 컥, 하고 숨이 막혔다. 하지만 경훈은 애써 참았다. 이윽고 그의 얼굴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바람 때문에, 그 놈의 바람 때문에 감고 있는 눈에서는 눈물이 새어나왔지만 입가에는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바람에 실려온 짠 기운이 혀끝에 살포시 실리는가 싶더니 그것은 이내 향긋한 솔내음과 합해졌다. 달콤한 침이 입안 가득 고였다.

경훈은 마치 자신의 폐부 깊숙이 배어있는 비릿한 살육의 냄새들을 모두 씻어내기라도 할 듯 한참 동안을 그렇게 서 있었다. 그런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 바람은 거세게, 더욱 거세게 그의 사지 곳곳에 사무쳤다.

바람은 한결 약해져 있다. 두 사내가 걷고 있다. 덥수룩한 머리에 허름한 옷차림의 사내가 열 발자국쯤 앞서서 걷고 있고 다른 사내는 새삼 감회가 깊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천천히 뒤를 좇고 있다. 소나무 숲 사이로 난 길. 애처롭게 매달려 솔가지들에 짐이 되고 있던 물기를 잔뜩 머금은 눈들이 두 사내의 출현에 놀랐는지 푸드득 푸드득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내렸다. 숲 속엔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지만 그나마 사람들의 발길이 거쳐간 길 한 가운데는 거뭇거뭇한 흙들이 드러나 있다. 저것들은 이제 따뜻한 햇살에 눈이 녹고 그리고 한바탕 아지랑이를 발산하고 난 다음엔 겨우네 자신들을 감쌌던 칙칙한 수분을 털어내고 찬란한 황금색의 모래알로 화할 터. 그리고 그 위엔 또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날 것이었다.

파도 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리고 열을 지어 늘어선 소나무들 사이로 파아란, 질마제 위에서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선명한 파란색의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앞서가던 사내가 걸음을 멈추었다. 조심스럽게 자세를 낮추었다. 뒤를 좇던 사내의 걸음이 빨라졌다. 그러면서도 그는 앞선 사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두 사내가 나란히 함께 한 그곳. 길 옆 아직 눈이 쌓여있는 그곳에 역설이 탄생해 있었다. 꽃. 생명의 꽃 한송이. 하얀색의 눈과 극명하게 대조돼 더욱 찬연한 빛을 발하고 있는 꽃. 코스모스였다. 한겨울의 이슬을 잔뜩 머금고, 슬프도록 투명한 파아란 하늘을 담은 채 금새라도 꺾여 버릴 듯 애처롭게 피어있는 코스모스. 언젠가 뉴스에서 겨울에 지천으로 핀 코스모스 예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다지도 외롭게 홀로이 피어있는가.

앞선 사내가 행여나 다칠까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꽃 주변의 눈들을 치워냈다. 그리고 다른 사내를 쳐다보았다. 코스모스가 머금고 있던 이슬방울을 그에게서 발견했다. 이슬방울에 코스모스가 담겨 있다. 가녀리게 흔들리는 꽃. 앞선 사내의 눈에도 같은 이슬방울이 소리없이 맺혀졌다. 잠시 후 사내는 꽃이 피어있는 바로 옆, 길 한가운데로 한 두 걸음 발을 떼었다. 그는 침착한 태도로 한겨울 내내 거기 쌓여있었을 혹한의 잔해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내 젖은 흙들이 나타났다. 그는 그것마저도 조심스럽게 걷어냈다. 황금색의 모래알이 나타났다. 그는 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해온 것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소주와 마른 명태가 놓여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주머니에서 다른 뭔가를 꺼내 그 옆에 조심스럽게 묻었다. 바로 그가 서울로 유학을 떠나기 전 남순이 그에게 건네주었던 코팅된 코스모스 잎파리였다. 사내는 종이컵에 소주를 반쯤 부은 뒤 황금색의 모래 위에 올려놓았다. 잔잔하게 떨리는 손. 그는 일어서 크게 절을 두 번 올렸다. 그리고 다시 술잔을 조심스럽게 들어 모래 위에 쏟았다. 황금색 모래들은 금새 알코올을 빨아들였다. 사내는 뒷사내에게 눈을 돌렸다. 뒷사내가 다가왔다. 이미 알겠다는 듯. 그곳이 남순이, 칠흙같은 어둠의 세계에 버거워하다 끝내 홀연히 떠나가버린 자신의 누이 남순의 무덤이라는 걸. 봉분 하나 없었다. 대신 차가운 눈이, 바람이 그 위를 감쌌다. 얼마나 추웠을까. 저 시린 서해의 바닷바람을 온 몸으로 게워내면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명조차 끊어진 오욕의 분신만을 안고 지새웠을 밤들이. 그래서 꽃으로 피어났나. 한 겨울 찬바람도 결코 꺾어버릴 수 없는 찬연한 색의 코스모스로.

절을 하던 사내가 그대로 널부러졌다. 입에선 꺼억, 꺼억,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고 있던 다른 사내의 눈에서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코스모스는 잔잔히, 아주 잔잔히 흔들리며 둘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다.
 

엄마, 
아기울음소리가 들려
한길 가에서
엄마, 
아기가 보여
바닷가 한길 가에서
엄마, 
아기가 계속 울어
묘지 옆에서
근데 엄마, 
왜 울지 아기는?
아기 옆엔 엄마도 있는데
근데 엄마, 
아기 엄마는 왜 달래지 않지?
아기가 우는데
그냥 안고만 있어
아무런 말도 없이
엄마, 
아기 엄마도 우나봐
눈물이 보여
달빛에
엄마, 
엄마도 우는 거야?
난 아닌데
내 눈이 빛나는 건 
그저 
달빛 때문일 거야

 

<끝>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광고책임 : 김정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