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밤에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집으로 가는 복도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위에서부터 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헐레벌떡 뛰어내려오는 남편이다. “아빠가 위독하대. 형도 오고 있대”라는 한 마디 외침만 남기고 맞은편의 시댁으로 달려간다.

가슴이 두근두근. 처음 겪는 위기상황은 아니지만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급한 상황이면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아이들만 내버려두고 집을 비울까. 집에 와서도 내 귀는 밖을 향해 쫑긋 서 있다.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시댁. 혹시나 통곡소리가 들려올까봐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다행히 그 날 밤의 위기는 잘 넘겼다. 다음 날 일찍 가보니 아버님은 편안한 숨을 쉬고 계신다. 기력이 없는 것만 빼곤 큰 탈은 없다고. 눈, 허리, 무릎에 문제가 있고 지병으로 당뇨까지 앓고 계셔서 매번 병원 가는 게 일이다보니 아버님은 전날처럼 위독한 상황을 맞이해도 병원에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신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이번은 잘 넘겼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더 자주 발생할까봐 겁이 난다. 사실 아버님은 몇 년 전부터 몸이 안 좋으셨기 때문에 가족들 모두가 아버님의 임종에 대해선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편이다. 아버님 스스로도 평소 ‘죽음’에 관련된 책들을 읽으며 스스로의 마지막을 차근차근 준비해 오셨다.

그런데 이 순간 내가 걱정이 되는 건 아버님이 아니라 내 딸이다. 아버님의 임종이 걱정되는 게 아니라 그 임종의 순간을 우리 딸이 옆에서 지켜야할지 말지가 걱정이 됐던 것이다. 자식 키워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말이 이래서 나오는 걸까? 아버님 죄송해요.

우리 딸은 시댁 쪽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어난 유일한 여자아이다. 남자들만 가득한 광산김씨 가문에 기적처럼 등장한 공주님. 꽃 장식이 있는 머리띠, 레이스 달린 치마, 보석이 박힌 구두 등을 볼 때마다 시댁의 어른들은 감탄을 자아냈다.

형님들은 기꺼이 딸의 머리를 묶어주겠다고 자처했다. 사내아이들의 짧은 머리만 빗겨주다 여자아이의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묶어주는 게 색다른 즐거움이었기 때문이다. 형님들도 그러는데 아버님은 오죽할까.

처음으로 태어난 손녀. 멋대가리 없는 손자들은 할아버지 집에 와도 자기 스마트폰만 쳐다보고 있다. 하지만 살랑거리는 손녀는 할아버지 옆에서 쉴 새 없이 쫑알거리며 뽀뽀도 하고 껴안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말도 한다. 눈에서 꿀이 안 떨어질 수가 없었다.

시댁이 바로 맞은편에 있어도 서로의 스케줄이 워낙 바빠 매일 얼굴을 볼 수는 없다. 어쩌다 3~4일씩 못 보게 되는 날이 있으면 어머니가 전화를 걸어온다. “제육볶음 해놨으니 수인이 보내라.” “상추 뜯어놨으니 가져가라.”

어머님이 이런 전화를 하는 건 아버님이 우리 딸을 찾는다는 뜻이다. 손녀 얼굴을 보고 싶으니 심부름 핑계로 보내라는 뜻이다. 그냥 손녀만 놀러오라고 하면 성격 지랄 맞은 며느리가 손자도 데려가서 같이 봐달라고 할까봐 손녀만 보내 반찬 가져가라는 핑계를 대신다.

이럴 때 남편이 눈치 없이 “제가 갈게요”하면 날벼락이 떨어진다. “수인이 보내라고! 아버지가 보고 싶대.”

시댁에 갔다 온 딸은 한 손엔 반찬통을, 다른 한 손에는 할아버지한테 받아온 군것질거리를 들고 있다. 주머니엔 천 원짜리 돈도 들어있다. 심부름 값으로 받아온 용돈이다.

어쨌든 그렇게나 예뻐하는 손녀. 만약 임종의 순간이 온다면, 내가 아버님이라면, 마지막으로 그토록 사랑했던 손녀의 얼굴이 보고 싶을 것 같다.

그 마음을 알면서도 나는 망설인다. 이 다음에 또 이런 순간이 오면 그 때 딸을 데려가야 할까 말아야 할까. 아홉 살짜리에게 ‘죽음’의 순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게 해도 괜찮을까?

형님의 큰 아들, 그러니까 내 조카가 5학년 때 외할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다고 한다. 화장터까지 따라가서 할아버지가 하얀 재로 변하는 모습을 전부 지켜봤다고. 당시엔 의젓한 모습을 보이던 조카였는데 나중에 시간이 지나 그 때의 충격이 불거졌다고 한다.

사춘기를 맞으면서 인생의 허망함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빨리 깨달아 버렸다고. ‘죽음’에 대해 너무 가까이 느끼게 되어 버렸다고. 그 때문에 조카가 사춘기를 벗어나기까지 마음고생을 많이 한 형님이었다.

당시의 조카보다 더 어린 나이인 아홉 살 우리 딸. 할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봐도 괜찮을까?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발생하면 나는 딸의 손을 잡고 시댁으로 함께 건너가야 하는 걸까?

조부모의 죽음은 충격이 크다. 마흔 살 나이에 할머니의 죽음을 겪은 나조차도 입관식 때 본 생명 없는 할머니 육체에 충격을 받았었다. 그런데 아홉 살에게 그런 경험을 하게 해도 괜찮은 걸까?

아예 멀리 살면 안 해도 되는 걱정인데 바로 앞집이다 보니 고민을 하게 된다.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에 마음이 철렁해지는 게 아니라, 앞집에서 걸려온 전화에 헐레벌떡 뛰어가 마지막의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게 두려운 것이다.

손녀를 향한 아버님의 마음을 다 알면서도 딸을 보호하고자 하는 내 의지로 마지막 인사를 안 시키는 게 옳은 행동인지 고민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털어놓자 소위 ‘심리학’을 공부한 주변 분들이 “괜찮다”고 말을 한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잘 받아들인다고. 마지막 인사의 기회를 갖게 해주라고.

그래. 멀리 살던 친척도 아니다. 딸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는 나무늘보보다 느린 걸음으로도 매일 손녀를 데리러 학교에 마중 나가던 할아버지다. 마지막 인사의 기회는 있어야겠지.

혹시나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할아버지 임종의 순간을 보게 되어 버릴까봐,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이 어떤 것인지 보게 되어 버릴까봐, 나는 지금부터 딸에게 죽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기 시작한다.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기 때문에 언제든 돌아가실 수 있다고 말을 한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 10년 후가 될 수도 있다고. 하지만 그 일은 언제고 갑작스럽게 찾아올 거라고.

물론 그 때가 오면 슬프겠지만, 슬프면 마음껏 슬퍼해도 되지만, 그래도 나중에 100년 뒤에는 다시 천국에서 할아버지를 또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딸은 죽으면 천국에 가서 천사가 되거나 하늘의 별이 되는 줄 알고 있다. 자기도 원래는 하늘나라에서 사는 천사였다가 엄마아빠의 딸로 태어났다고 알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가끔은 “엄마, 내가 천사였을 때 아주 즐거웠을 것 같아”라며 자기가 경험한 적도 없는 천사 시절의 이야기를 꺼낼 때가 있다. 아마 자기는 이러저러했을 거라고. 천사일 때. 지금에 와서 뻥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에 그냥 웃으며 들어주는데 가슴이 뜨끔하긴 하다.

어쨌든 대부분의 사람은 천국에 가서 천사가 되거나 아니면 하늘의 별이 되어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지켜줄 거라 믿고 있는 딸. 아주 나쁜 사람들만 지옥엘 가는 줄 알고 있다.

사실 죽음 후의 일에 대해선 나도 모르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사후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지만, 그냥 무로 돌아가서 그걸로 끝이길 바라지만, 아니 딱 한 번은 다시 살아보길 바라기도 하지만, 딸에게 그런 얘기는 하지 않는다.

기력이 갈수록 쇠해지면서 아버님 스스로가 죽음을 준비하듯, 다른 가족들도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제 딸도 그 대열에 합류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조금씩 조금씩 지금부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순간을 대비하고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슬픈 일은 슬퍼하기로 한다. 대신 슬픔 속에 너무 오래 있지는 말자고. 나중에 100년 뒤에는 또 만날 수 있으니까. 그 때 가서 다시 할아버지를 껴안고 뽀뽀해주면 되니까.

그리고 아직 할아버지가 우리 곁에 있는 지금, 더 많이 사랑을 표현하기로 한다. 오늘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심부름이 아니더라도 시댁에 보내기로 한다. 딸은 아마 할아버지에게 “먹기 싫어도 밥 많이 먹고 병원에 꼭 가~”라는 말을 하고 올 것이다. 그리고 그런 손녀의 모습을 보며 아버님은 또 하루를 살아갈 힘을 내시겠지.

아버님이 급격히 쇠약해지시면서 우리 가족에게도 삶과 죽음의 세계가 공존하기 시작했다. 나부터 마음을 다잡아야겠다.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주부, '아주머니'는 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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