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묘량 농사문화재들의 봄맞이-④

▲ “논 둘러보러 갔제. 못자리 해놨은께. 삽은 항시 갖고 댕기는 것이여. 물꼬도 보고 풀도 파고. 삽 없으문 곡석이 안 나와.” 김재영 할배.

“삽 없으문 곡석이 안 나와”

안동의 숨은 군자 김씨는 악한 것을 미워하고 구차스럽게 처세하지 않는 것으로 이름이 난 사람이었다. 원님으로 나가서는 백성을 좀먹는 일을 가장 힘써 제거하였으므로 그가 이르는 곳마다 아전들이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하였다. 물러나와 시골에 살면서는 삽과 낫과 칼을 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이름하기를 ‘삼우(三友)’라 하였다.

고려말 학자 권근의 <삼우설(三友說)>에 나오는 이야기다.

<저들의 힘이 능히 악을 제거할 수 있으므로 내가 그 힘을 얻어서 내 뜻을 이룰 수 있으니 어찌 벗하지 않으랴>.

어떤 이의 ‘벗’의 기준은 그러하였다.

뒷짐 쥔 손에 삽자루가 들려 있다. 김재영(79․신천리 진천마을) 할배의 걸음걸음은 당당하다.

“우리 영감이여. 저 냥반 말 안 내놀 냥반이여. 어서 뭔 소리를 듣고 와도 나헌테 말을 안 넘겨. 이날평상 자분자분 자부랑자부랑 말헌 것을 못봐.”

열아홉 살에 혼인하여 그이와 해로하는 정금자(77) 할매가 과묵한 할배를 대변한다.

“애러서부터 가방 대신 지게 지고 농사만 진 사람이여. 아조 상일꾼이었어.”

해보다 먼저 일어나 캄캄밤중까지 논들을 굽어살펴온 그 사람. 말만 앞세우는 대신 오로지 몸으로 행하며 살아온 그 사람. 그이의 ‘일언중천금(一言重千金)’을 떨어뜨릴까 받자옵는다.

“논 둘러보러 갔제. 못자리 해놨은께.”

“삽은 항시 갖고 댕기는 것이여.”

“물꼬도 보고 풀도 파고.”

“삽 없으문 곡석이 안 나와.”

달막한 삽 한 자루를 벗으로 삼아 날마다 땅을 두드려 온 그 사람. 삽자루 놓을 날 없었던 농부의 한 생애가 있어 이 땅의 목숨줄이 이어져 왔다.

 

 

▲ “냄시도 문지(먼지)도 엄청나제. 나는 꽃냄시로 생각해 불어. 이 냄시를 고소허니 맡아불어. 안 그러문 못해.” 한점임 할매.

“거름냄시를 꽃냄시다 생각해 불어”

여름날 초록그늘 광활하고 장엄할 것이다. 나이를 400살 잡순 느티나무가 선 왕촌마을 언덕.

“할머니당산이여. 나무 속에 옴팍한 구녘이 있었어. 지금은 메꽈져서 안 보인디, 애렸을 땐 맨나 그 구녘 속에 들어가서 놀았제.”

한점임(77․삼학리 왕촌마을) 할매의 말씀. 그 째깐한 애기가 할매가 된 세월이 흘렀다. 할머니당산이 저만치서 말없이 지켜보는 밭에서 ‘여그서 나서 여그서 늙어가는’ 이가 오늘도 꼼지락꼼지락 밭일을 하고 있다.

냄새가 진동한다. 천지간을 뒤흔든다.

“냄시도 문지(먼지)도 엄청나제. 나는 꽃냄시로 생각해 불어. 이 냄시를 고소허니 맡아불어. 안 그러문 못해.”

밭에다 퇴비를 넣고 있는 중이다. 한껏 힘을 주어 내두르는 서슬에 너울을 그리며 허공에서 땅으로 흩어지는 거름.

“인자 여그다 꽤 심을라고, 꼬추도 심고.”

봄날의 구상이다.

“즈그 직장 좋다 그러는 사람 없는디, 요거시 싫으문 못해. 고생이라고만 생각하문 못해.”

“땅이 팽야 내 직장”이라는 할매, 아직 정년은 멀었다.

“아깝잖애, 묵히문. 일 년만 묵혀도 산 되야불어. 묵쿠문 암것도 나오는 것이 없잖애. 내 몸뚱아리 움직이문 여그서 나오는 것이 얼맨디.”

 

▲ “논두럭에 풀 맬라고 나왔어. 아침밥 묵고 나와갖고 인지까 한 것이 요만치여.” 줄타기라도 하듯 앉은걸음으로 찬찬히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는 중인 김종님 할매.

“인자 째까 남았어”

높으막한 논둑에 동그마니 작은 몸피의 할매가 올라앉아 있다.

“논두럭에 풀 맬라고 나왔어. 아침밥 묵고 나와갖고 인지까 한 것이 요만치여.”

‘요만치’가 명징하다. 김종님(덕흥리 고교마을) 할매가 지나온 길의 자취. 이제 막 쓸어낸 흙마당처럼 정갈하고 말끔하다.

할매는 줄타기라도 하듯 앉은걸음으로 찬찬히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인자 째까 남았어.”

‘당아 멀었다’가 아니라 ‘인자 째까 남았다’는 그 맘으로 헤쳐왔을 길, 혹은 생애.

“매야제, 안 매문 못써. 내가 서울서 있다 와갖고 요러코 생갰구만.”

“매야제, 안 매문 못써”라는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 할매.

할매가 집에 돌아와갖고 제일 처음 붙든 것은 호미.

“서울서는 흙도 못 보고 풀 맬 일도 없제. 흙 본께 반가와. 농사는 인자 우리 큰아들이 지서. 아들 한자 할란께 심들제. 긍께 내가 논두럭 풀을 아조 매불라고.”

아들이 일할 몫을 어떻게든 덜어주고픈 어매의 맘과 결의가 ‘아조’란 말에 서린다.

“깨깟하니 좋소, 안.”

어매가 지나온 논두럭, 오로지 자식에게 향해온 일심(一心)처럼 환하다.

 

 

▲ “놈의 밭이라도 해 주문 좋제. 여그 쥔이 매고 있응께 나도 한손이라도 보태줄라고.” 최귀님 할매.

“놈의 밭이라도해 주문 좋제”

마을회관에서 나오는 길, 최귀님(77·삼학리) 어매의 발길은 회관 옆에 뽀작 붙어 있는 양파밭으로 자연스레 향한다. 이윽고 ‘ㄱ’자로 허리를 굽혀 밭에 엎드린다. 평생 거듭거듭 반복돼 왔을 몸짓이 그 ‘ㄱ’자에 깃들었다.

“머이든 뇌력(노력)을 해야 돼. 가만히 앙겄으문 암것도 안 나와, 암것도 안 되야.”

어매에게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는 원천은 몸뚱아리. 어매에게 ‘뇌력’의 구체적 형태란 땅을 향해 한껏 엎드린 자세.

“날마동 땅에다 대고 절하제. 우리는 팽생 눈앞에 젤로 가찬 것이 땅이고 흙이여.”

천연스레 풀을 매는 양이 영낙 어매 밭인 것만 같더니만, 정작 주인은 따로 있다.

“놈의 밭이라도 해 주문 좋제. 여그 쥔이 매고 있응께 나도 한손이라도 보태줄라고.”

쌀농사를 접은 지가 올해로 5년차. 영감님 돌아가신 해수와 정확히 일치한다.

“인자 밭농사도 크게는 못 져. 보도시 째까 지서. 내가 뇌력을 해서 딸 서이(셋) 아들 서이한테 꽤도 주고자프고 꼬치도 주고자프고 뭐이라도 많썩많썩 주고자프제.”

마을회관에서 집까지 가는 길, 어매는 남의 밭에 손 넣어 풀 한줌 매어주는 일을 거듭한다.

“오늘 일하기 존 날이구만.”

일을 손에서 거의 떠나보낸 지금도 어매에게 모든 날은 ‘일하기 존 날’과 아닌 날로 가름된다.

“촌사람은 만날 풀하고 싸와. 도시사람은 뭣하고 싸우까”

지구라는 푸른 별에 오늘 하루의 이력을 저렇듯 명료하게 새겨놓은 사람. 강대례(81․월암리 문례마을) 할매가 논둑 위에서 풀을 매고 있다.

“작년 겨울에 따수왔어. 눈도 안 와서 크고자운 대로 컸어. 안 나야 할 자리에 났으니 곱들 안해.”

‘밉다’는 말 놓을 만한 자리에 ‘곱들 안하다’는 말을 가만 내려놓는 할매.

한 목숨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음을, 천방지축 발 뻗대는 풀포기일망정 그 또한 애쓰고 버텨낸 목숨인 줄 아는 까닭이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끼리 결혼헌께 나는 가난한 집으로 와서 가난하게 살았어. 평생 못 살았어. 도시사람은 풀 보고 푸르러니 이삐다 그러드만. 그런 사람은 따로 벌이가 있은께. 우리는 풀 저런 것을 이겨야 묵고 살아.”

<논밭을 갈마들여 삼사차 돌려 맬 제/ 날 새면 호미들고 긴긴 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김매기가 그러하듯, 호미 쥐고 엎드린 용맹정진 오체투지의 일생이었다.

 

 

▲ “도시사람은 풀 보고 푸르러니 이삐다 그러드만. 우리는 풀 저런 것을 이겨야 묵고 살아.” 강대례 할매.

“촌사람은 만날 풀하고 싸와. 도시사람은 뭣하고 싸우까.”

“매고 나서 돌아서면 도로 자라나 있다”는 억센 풀들하고 싸워서 해마다 이기고 살아온 사람. 강대례 할매의 주름진 손엔 나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다는 듯 올해도 푸른 물 들 것임을.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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