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집 장맛은 콩밭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집 장맛은 콩밭에서부터 시작된다
  •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승인 2017.07.18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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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닷컴> 묘량 농사문화재들의 봄맞이-⑥

[위클리서울=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

▲ 벼랑벽에 매달아둔 남은 한 덩이로는 고추장을 담글 요량이다. 조점순 할매댁.

“까뜩 채와놓고 주란 대로 퍼주는 맛”

보릿고개는 높고 밥그릇은 깊었다.

자고새면 됫박땀을 흘리며 농사일을 하는 식구들을 먹여야 하는 이가 어매라는 자리였다.

“그 세상에는 정지에 묵을 것이 암것도 없어.”

쌀도 된장도 장도 고춧가루도, 소금마저 넉넉지 않았다. 밥은 언감생심, 죽그릇에 그림자가 비치게 멀건 죽조차도 식구대로 배를 채울 만치 담지 못했다.

“시방은 쌀도 많고 된장도 많고 장도 많애. 부자가 되았는디 인자 식구가 없어.”

암것도 없는 캄캄정지에서 올망졸망 식솔들의 밥상을 기적같이 차려내온 조점순(88·월암리 성도마을) 할매.

대문간에 동백꽃 흐드러진 날, 장을 담근다.

<인간의 요긴한 일 장 담는 정사로다. 소금을 미리 받아 법대로 담그리라.> ‘농가월령가’의 3월령도 이즈음 중한 일은 장 담는 일이라 하였다.

장 다리는 날은 깐깐하게 택일하였다. 손 없는 날인 10일, 20일, 그믐날, 또는 말날(午日), 닭날(酉日), 돼지날(亥日)이 좋다 하였다. 그믐날 얼굴을 북쪽으로 두고 담그면 벌레가 안 생긴다고도 하였고, 장 담그는 날에 개를 꾸짖지 말라 하였다.

 

 

할매는 지난해 겨울 콩 한 말을 삶아서 메주 덩어리 스무 개를 만들었다. 벼랑벽에 매달아둔 남은 한 덩이로는 고추장을 담글 요량이다.

그 집 장맛은 콩밭에서부터 시작된다. 콩이 좋아야 하고 메주를 잘 쒀서 잘 띠워야 허고 장독에 메주를 넣고 부을 소금물의 염도가 알맞아야 한다. 모든 과정마다 백 가지 정성을 넣었다. 항아리에는 삿된 기운을 막기 위해 붉은 색 고추를 넣고 균을 없애려고 숯을 넣었다. 옛날에는 왼새끼를 꼬아 솔잎, 고추, 한지를 끼운 금줄을 장독에 쳐 장맛을 지켰다.

반찬이 변변찮던 시절이니 밥상에서 장맛은 그만치 중했다.

“촌야의 사람이 고기를 쉽게 얻지 못해도 여러 가지 좋은 장이 있으면 반찬에 아무런 걱정이 없다”(《증보산림경제》) 하였고, “장은 팔진(八珍)의 주인으로 만일 장맛이 사나우면 비록 진기하고 맛난 반찬일지라도 능히 잘 조화치 못할 것이니 어찌 중하지 않겠느냐”(《규합총서》)하였다.

“메주를 요러코 건져서 받쳐서 손으로 비벼서 잉깔르문 된장이고 남지기(나머지) 물을 데리문 간장이여.”

이제 장독 깊숙이 된장을 따독따독 채워 넣는다. 조점순 할매네 장독대 일년 농사가 오늘 마무리됐다.

“나는 묵는 맛보다 까뜩 채와놓고 주란 대로 퍼주는 맛이여.”

 

 

▲ 뭣이든 사는 것보다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살아온 이두신 할배.

“뭐시든 나놔쓰제, 돈 거서기할라고 안해”

주부의 동선을 획기적으로 절약해 줄 첨단시스템이 여기 있다. 장독대에 한몸마냥 붙은 한뎃부삭.

어엿하니 시멘트단을 올리고 솥단지 두 개를 걸었다. 장독대를 병풍처럼 빙 두르고 굴뚝까지 처억 갖췄으니 위용 넘친다.

“연기가 나가게끄름. 부엌 연탄 때던 구덕을 인자 안쓴께 아깝길래 굴뚝으로 맨들았제.”

‘업사이클링’이 별거드냐. 이두신(85․운당리 영당마을) 할배의 묘책이 도처에서 빛난다. 부삭에 불 안 땔 때는 비 새지 말라고, 굴뚝 마개까지 덮었는데 그 정체는 바로 냄비뚜껑. 할배의 손에 이르면 그 모든 버려진 것들이 창의적으로 ‘쓸모’를 되찾는다.

 

▲ 어엿하니 시멘트단을 올리고 솥단지 두 개를 걸었다. 장독대에 한몸마냥 붙은 한뎃부삭.

 

“젙방살이를 스무 해도 더했어. 웃대부터 재산이고 뭣이고 암것도 없어. 농사일 함서 미장일도 하고 부지런히 몸 놀려서 요만치 일궜제.”

오로지 몸뚱아리를 믿고, 자신의 손을 믿고 헤쳐온 인생길이다.

아내 정정윤(82) 할매는 “말도 못하게 보지런하고 꾸꿈시롭고 정갈시로운 양반”이라고 남편의 성정을 말한다.

집 구석구석 할배의 손길 닿지 않은 곳 없다. 뭣이든 사는 것보다 만드는 것을 원칙으로 살아왔고,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든 못하더라도 마누라 한 사람이라도 이롭게 하려는 궁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큰 고무다라이 뚜껑에 붙은 손잡이도 그러한 궁리의 한 증거.

“없어도 되지만, 있으문 쪼깨라도 핀하제”라는 정신의 산물이다.

메주가 못생겼다는 소리 따위 이집에선 나올 수 없는 소리.

할배는 이른바 메주 ‘성형틀’도 사각으로 반듯하게 짜 맞추어 쓰고 있다. 수수빗자루도 몇 벌씩 매서 창고에 간수해 뒀다가 필요한 사람 있을 때마다 나눠 쓴다.

“애시당초 나놔쓸라고 생각하고 매. 여그는 뭐시든 나놔쓰제, 돈 거서기할라고 안해.”

 

 

▲ 박토인 삶의 자리를 옥토로 만들어 온 장한 농부 강성열씨. 그이가 한 땀 한 땀 늘쿼온 논에는 굽이굽이 곡절 많다.

농부 강성열의 월남논, 길밑닷마지기논

신천리 진천마을에서 제일 젊은 농부 강성열(71)씨.

한창 때는 1만6천평에 남의 것까지 한 2만평 농사를 짓다가 지금은 8천평 나락농사를 짓는 일꾼 중의 상일꾼이다

그이가 농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서른 살. 농부 이력 40년이 넘었다.

그이가 한 땀 한 땀 늘쿼온 논에는 굽이굽이 곡절 많다.

 

▲ 조선낫.

“486평 그 논이 우리집 씨앗이 됐어요”

농부 강성열은 딸 다섯 아들 둘인 집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지서에서 면사무소로 군청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공무원으로 일한 아버지는 보증을 잘못 서서 대대로 물려받은 논밭을 다 날리고 월급에는 통째로 차압이 붙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도 도시락 한번을 못 가져갔다.

“싸갖고 갈 것이 없어요. 닭을 몇 마리 키웠는데 가을운동회날 달갈 네 개에 보리밥 가져간 것이 추억이에요.”

낫을 들 근력이 생기기도 전에 낫을 먼저 들어 근력을 키웠다.

“국민학교 다님서도 집에서 키울 것이 뭐 있으까 궁리를 했어요. 다른 짐승은 곡물을 줘야 헌께 안되겄고, 토끼장을 만들어서 토끼를 키웠어요. 학교 갔다 올 때문 풀을 매갖고 묶어서 들고 와요. 토끼를 50수까지 늘려서 고놈을 싹 팔아서 어머니한테 드렸어요.”

어렸을 때 소년 성열의 꿈은 의사, 변호사가 아니라 어서 커서 20년 손아래 막내동생 밥을 절대 안 굶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남을 갔어요. 월남 가서 만약 내가 죽으문 우리 식구들이라도 편히 살겄지 그런 생각으로 간 거예요. 식구들 먹고살으라고 월급을 고스란히 송금했어요. 그런데 울 어머니가 울 아버지한테도 말을 않고 그 돈을 그대로 우체국에다 적금을 넣었어요.”

마침 그때 동네에 싸고 좋은 논이 나왔던가 보다.

“울 아버지가 ‘아따 그 논, 돈 있으문 사문 좋겄는디 돈이 있어야제’ 그리 한탄허는 말씀을 듣고 우리 어머니가 ‘성열이가 월남에서 송금한 돈을 내가 우체국에다 예금을 시켜놨소, 그 돈 갖고 사시오’ 그래갖고 그 논을 샀어요. 그때 산 것이 500평이 약간 못 돼요. 486평 그 논이 우리집 씨앗이 됐어요.”

산중턱 천수답일망정 소발굽을 들이고 모를 심던 시절이었다.

“바늘 꽂을 자리만 있어도 모포기 꽂는다 그랬어요. 오죽 작으문 삿갓 속에 들어간다고 삿갓배미가 있고, 소 몸뚱아리 들어가기도 작은 다랑치도 있었어요. 그런 디는 쇠시랑이라고 발 4개 달린 것으로 파갖고 골라서 손모를 심었어요. 못자리를 해갖고 지게로 지고 까끔을 올라갔어요. 인자 그런 다랑이 논은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땅이 귀하고 논이 귀하던 시절, 그이한테는 씨앗논이 생겼다. 동네 사람들은 ‘월남논’이라 불렀다.

“월남논은 지금도 벌어요. 다 팔아도 그 논은 절대 못 팔아요.”

 

박토인 삶의 자리를 옥토로

스물 일곱살에 두 살 아래 큰애기 정경자(69)와 결혼했다.

혼례식을 한 첫날밤에 그이가 아내한테 한 말은 호강시켜 주겠다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앞으로 혼합곡을 딱 10년만 먹자, 그러문 나중에 당신 배 안 곯고 살 수 있게 해주마”였다.

보리 70%에 쌀 30%인 혼합곡은 가격이 절반 아래였다. 그 첫날의 약속을 18년간 이어갔다.

“맨 나중에는 쌀 70에 보리 30으로 좀 나아지긴 했죠, 하하. 좌우지간 우리가 농사 진 것은 하나도 안 먹었어요. 볏짚으로 짠 가마에 담은 나락 한 섬을 ‘샛거리’로 놈한테 주문 그 이듬 해 한 섬 반이 와요. 그렇게 샛거리로 불려서 제일 먼저 이 밑에 논 여덟 마지기를 사고 그 담에 유성것을 사고 요 밑에다 또 사고 허다 보니까 논이 점점 새끼를 치듯 많애졌어요.”

지난해엔 40킬로 가마 540개 나락 농사를 지어냈다.

“나는 허문 열심히 하는 편이에요. ‘열심’이 몸에 배 버렸어요.”

그이의 논 관리는 치밀하고 과학적이다.

“논은 가을걷이하고 바로 갈아요. 쪼그만 버러지들이 삼동에도 땅 속에서는 사는데 뒤집어노문 못살아요. 갈아논 논에 겨우내 눈 오고 비 오고 얼었다 풀렸다 허문 땅이 비료 헌 놈보덤 영양분을 더 받아요. 비 오고 나문 작물이 생생하고 잎이 반들반들 윤기가 나잖애요. 땅을 파서 얼그렁설그렁 뒤집기를 해 논 것은 판판이 그대로 둔 논하고 달라요. 판판이 있다는 것은 잠자는 것하고 똑같아요. 갈아논 논은 사람이 인나서 돌아다니는 것하고 똑같애요.”

이 근동에서 제일 좋다고 소문난 논이 ‘길밑닷마지기’논. 길 밑에 있다고 그리 부른다. 그 논도 이제 그이의 것이 됐다.

“논 한 마지기 스무 섬일 때 스물 닷섬쯤 주고 샀어요. 물빠짐이 좋고 물질(물길)이 좋으니 수확이 좋아요. 카만히 놔둬도 잘 돼요.”

잘되는 논에는 신경이 덜 쓰인다.

“안 좋은 논은 기언치 좋게 맨들아야겄다 그런 투지가 내한테는 있어요. 땅에 노후현상이 오문 퇴비를 매년 넣어요.추수하고 짚을 안 묶어내고 그대로 썰어서 넣고 썰어서 넣고하다 보면 죽은 땅이 살아나요.”

“내 능력껏 한 발 한 발 걸어오니 이만치 왔다”고 말하는 그이. 배고픈 소년이 닿고자 했던 그곳은 아득하였으나 일흔줄에 생애의 목적지에 이미 도달한 사람. 자식들한테 노상하는 말이 있다.

“돈 따라댕기지 마라. 사람이 돈 따라가면 돈의 노예가 된다. 열심히 하다 보면 돈이 따라와 붙더라.”

땅에서 확인한 신념이다.

“농사라는 것은 열심히 허문 무조건 되야요. 내 몸 들인 만큼 작물이 되야요. 주인 발걸음 소리 듣고 큰다, 그 말이 맞는 말이에요. 그만치 내 작물한테 관심을 갖고 보살피는 것이죠.”

논뿐이랴. 박토인 삶의 자리를 옥토로 만들어 온 장한 농부. 그이의 ‘거름론’을 듣는다.

“지금 양파에 마지막 거름 할 때에요. 쪼끔 더 있다 거름 더 허문 양파가 물러져요. 거름이 많다고 좋은 것이 아녀요. 넘치문 작물한테 피해가 와요. 사람도 어렵게 부족한 듯 포도시 큰 사람이 딴딴허죠.”

포도시 딴딴하게 살아온 생애의 자취가 아름답다.

 

 

▲ 하루도 그치지 않던 흙일 내려놓고, 이제 저기 저만치 누워 계시는. 덕흥리.

아버지는 죽어서도 밥을 지으리

<아버지는 죽어서도 쟁기질 하리
죽어서도 살점 같은 땅을 갈아 모를 내리
아버지는 죽어서도 물 걱정 하리
죽어서도 가물에 타는 벼 한 포기에 애타 하리
아버지는 죽어서도 낫질을 하리
죽어서도 나락깍지 무게에 오져 하리
아버지는 죽어서도 밥을 지으리>
(고재종, ‘땅의 아들’ 중)

쌀(米) 한 톨에 여든여덟(八八)번 손 넣으며 평생 논과 눈맞아 살던 농부.

생애의 일터이자 싸움터였던 그 땅에 이제 누워 계신다.

<땡볕 불볕에도 모자를 안 쓰시네/ -벼가 타들어간디 나 혼자만 어떻게…/ 소낙장대비에도 우산을 안 쓰시네/ -벼가 살아나는디 이런 단빌 어떻게…>(손동연, ‘아부지는 농부라서’)

땡볕 속을, 소낙장대비 속을 맨몸으로 지나온 농부.

삽자루 내려놓고 괭이자루도 내려놓고 하루도 그치지 않던 흙일도 내려놓고, 이제 저기 저만치 누워 계신다.

 

그 어떤 위인들보다도 더 존경스러운 사람, 바로 당신

신천리 진천마을 참샘 뽀짝 앞엔 유영조(80) 할아버지 댁이 있다. 열린 대문 안으로 그 집안을 들여다본다. 정갈하기 이를데 없는 살림이다. 강금순(76)할머니는 필시 ‘살림의 여왕’이신 게다. 장독대도 신발도 옷가지도 부엌에 그릇도 정갈하게 나란하게 줄을 맞춰 앉아 있다.

어느 한 가지도 대충 늘어놓은 것이 없다.

물건도 사람도 단정하게 대하는 것이 이 집 내외의 사는 법인가 보다.

품앗이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 없던 시절, 인심 잃으면 그 집 일엔 하루 품도 내어주지 않고 연장 한 자루도 내어 주지 않던 무언의 약속이 존재하던 그 시절부터 어우렁더우렁 한데 얼려 지내온 이웃들을 가장 귀하게 대접하며 살아가는 내외다.

“그때는 너도나도 밥 못 먹고 살았어. 인자 다 밥 묵고 살아. 다 부자 되았어. 근디 지금은 어찌 다들 가난하다고 해싸까.”

자식을 키울 때, 부자로 살란 말은 부모의 입으로 내어 본 적이 없다.

“나 좋자고 놈 못헐 짓 시기지 마라.” 가르침은 그 한가지였다.

1남3녀 네 자식은 사람 될 만치 고생하고 남의 어려움 알 만치 애로를 겪고 세상으로 나갔다.

“내가 고상을 해 봐야 남 고상한 속을 알아.”

공주로 자라,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아픔도 눈물도 고통도 모르는 박씨 딸하고는 근본이 달랐다. 부족하게 키웠지만, 돈보다 사람 중한 것을 가르쳤기에 원망보다 감사를 돌려받았다.

“우리가 농사를 60년, 70년을 지었어. 그래도 농사같이 어려운 것이 없어. 자식농사는 그보다 훨썩 어려와.”

이 집 모퉁이 벼랑박에는 씨옥수수가 곱단하게 걸려 있고 이 집 안방 흰 벽에는 특별한 상장이 걸려 있다.

농부로 살아온 부모의 한생애에 바친 ‘부모님 감사장’이다.

‘소속 행복이 가득한 우리집, 성명 유영조 강금순’에게 드리는 상장이다.

<사랑합니다. 이 세상 한번 멋지게 살아보라 저를 낳아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힘들게 기르시며 저를 사람되게 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언젠가부터 그 어떤 위인들보다도 더 존경스러운 사람이 생겼다면 바로 당신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몇만 년을 살아도 갚지 못할 무한의 사랑을 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당신입니다(중략)

하늘 아래 가장 위대한 분! 나의 아버지 유영조님. 나의 어머니 강금순님입니다…>

1남3녀 중 막내딸 유선씨와 사위 박진형씨가 함께 써 올린 그 마음을 읽는다.

이 나라 농부의 자식들, 흙에 사는 부모가 흙에서 배운 것을 받자온 떳떳하고 깨끗한 흙수저들이 가슴마다 품은 물큰한 감사가 꼭 이와 같을 것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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