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규 지음/ 김영사

조선사상 최초로 반역의 깃발을 들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은 누구였을까? 놀랍게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다. 태종 이방원이 이성계의 아들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이고 용상을 빼앗다시피 차지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중간에 정종이 끼어 있었지만 이방원이 잠시 세워둔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1402년 11월 5일, 안변 부사 조사의가 군사를 일으켜 이성계를 복위시키고 이방석과 그의 어머니 신덕왕후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했다. 안변은 함흥과 함께 함경도의 요충지로 이성계의 근거지였으며 조사의는 신덕왕후 강씨의 족속이었다. 겉으로는 난을 주도한 인물이 조사의인 듯 보였지만 조사의를 움직이는 것은 이성계였다. 조사의가 군대를 일으킬 당시 이성계는 함흥에 머물렀다. 함흥에 머물기 전에는 안변에 머물렀는데, 조사의를 안변 부사로 삼게 한 것은 자신의 복위 전쟁을 위한 포석이었다.

이성계와 이방원은 비록 부자지간이었지만 이성계는 아들 이방석과 이방번을 죽이고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간 이방원을 용서할 수 없었다. 조사의의 반군이 함경도를 장악하고 동북면에서 위세를 떨치자 이성계는 함흥에서 서북면의 맹주로 향했다. 동북면의 민심을 얻었다고 판단하고 반군이 서북면까지 장악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11월 27일 조사의의 반군은 평안남도 안주까지 진출해 있었다. 그런데 반군 내부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반군은 청천강 인근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 병력 속에 포로병인 김천우란 자가 있었다. 반군 병사들이 그에게 진압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는데, 김천우가 약 4만 명은 될 것인데, 그대들이 어떻게 당할 수 있느냐고 하자, 반군 내부에 이탈자가 속출했다. 조화란 자가 군영에서 달아나기 위해 군막에 불을 지르자, 반군들이 놀라서 사방으로 흩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조사의는 수하들을 거느리고 안변으로 돌아갔지만 그때 휘하 군사는 기껏 기병 50여 기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도안무사 김영렬이 군대를 이끌고서 조사의를 포위한 후 사로잡았다. 조사의를 앞세워 다시 한번 용상에 오르리라 다짐했던 이성계는 패배 소식을 듣고 맹주에서 평양으로 옮겨갔고, 조사의가 도성으로 압송된 다음 날 도성으로 돌아왔다. 조사의의 난 이후로 이성계는 더 이상 이방원과 맞서지 않았다. 결국 태종의 왕위 계승을 받아들이고 용서하기로 한 것이다.

반역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에서부터 비롯된다. 반역은 그 시대를 부정하고, 다른 시대를 꿈꾸는 일이며, 다른 권력을 생산하는 일인 까닭에 그렇다. 따라서 조선의 역사를 반역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것은 숨겨진 조선의 속살을 들춰내는 일이기도 하다. 역사는 늘 이긴 자 입장에서 서술된다. 때문에 반역자는 항상 악인으로 기술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서술의 행간을 자세히 살피고, 그 행간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진실을 찾아내면 반역의 그늘 속에 숨겨진 그 시대의 진짜 모습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그동안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두었던 12개의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했던 조선사의 진실을 찾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징옥, 이시애, 정여립, 이괄, 이인좌 등 조선사 500년 동안 금기시되었던 이름들이 역사의 수면 위로 올라온다. 모쪼록 '조선반역실록'이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조선사를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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