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엄마~ 나 남자친구 생겼다.” 딸의 느닷없는 고백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쓴다. 벌써? 외국 영화 보면 아직 2차 성징도 안 온 초등학생들이 애인사이로 지내며 뽀뽀도 하고 그러던데 설마 우리 딸도 그 세계에 진입하려고 하는 건가?

누구냐고 물으니 김지태(가명)란다. 주말에 가끔 딸이 전화를 걸던 같은 반 친구다. 통화가 연결되면 “지금 뭐해? 난 밥 먹었어. 좀 이따 마트 갈 거야” 등의 일상적인 얘기를 대략 30초 정도 나눈 뒤 전화를 끊곤 했다.

어떻게 남자친구가 됐냐고, 서로 애인하기로 약속했냐고 물으니 아니란다. 지금은 자기 혼자 좋아하는 거란다. 아직 지태는 그 사실을 모른단다. 아하~ 그러니까 딸은 좋아하는 아이가 생겼다는 말을 남자친구 생겼다고 표현한 것이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딸은 지태에게 푹 빠져 있다. 너무 귀엽단다. 발표를 할 때도 뿌잉뿌잉 귀엽게 말하고, 밥 먹을 때 입을 오물거리는 것도 귀엽단다.

나는 웃음을 참고 딸의 풋사랑을 응원했다. 지태를 좋아하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라고 다독였다. 나는 딸에게 감정이란, 마음이란 표현을 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어도 말로 하지 않으면 정확히 전달이 안 된다고.

화나는 마음도 마찬가지다. 혼자만 화내고 있으면 아무도 그 마음을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다고. 언제나 마음은, 감정은 말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딸은 “아~ 뭐라고 말하지?”라며 고민에 빠진다. “나랑 사귈래?”라고 물어봐도 되냐고 묻는다. 음,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들이댈 경우 거절당할 수도 있는데…. 아직은 거절당하기에 이른 나이인데….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가 망쳤어”라는 말이 듣고 싶지 않아 혼자서 방법을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며칠 뒤 학교에서 돌아온 딸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를 찾는다. “엄마! 엄마~ 나 지태한테 좋아한다고 말했어.” 딸보다 내 마음이 더 바짝 조여 오는 걸 느낀다. “뭐라고 했어? 지태가 뭐래?”

쉬는 시간에 지태랑 놀다가 지태 귀에 대고 몰래 말했단다. “나 너 좋아해~.” 그 말을 들은 지태가 두 번 세 번 확인을 하더란다. “날 좋아한다고?” “응.” 그걸로 끝. 딸의 고백에 어떠한 화답도 없고, 딸 역시 지태에게 그 이상의 반응을 요구하지도 않았단다. 초등학교 2학년의 사랑은 아직 이렇게나 순수하다.

딸은 지태에게 마음을 고백한 자체로 행복하다. 그림 그리기 과제를 제출하는데 자기 그림을 지태 그림 옆에 나란히 뒀다며 자랑을 한다. 단지 그림끼리 나란히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거다. 이 아이는. 사랑을 하는 대가로 그 만큼의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어른들의 사랑과는 다르다.

남편에게 이 일을 얘기하니 피식 웃는다. 그래도 이제부터 슬슬 시작될 거라 느꼈는지 딸을 호출한다. 지금은 아직 어리니까 괜찮은데 나중에 진짜 남자친구가 생기면 꼭 아빠엄마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신신당부한다. 남자는 남자가 만나봐야 안다고. 만약 나쁜 놈이면 아빠가 혼내줄 거라고.

나도 거든다. 남자친구 데리고 오면 아빠엄마가 좋은 데 가서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꼬신다. 부모에게 남자친구의 존재 자체를 꽁꽁 숨기며 살아왔던 나와는 다른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다. 연인으로 인해 웃고 울게 될 날들을 곁에서 함께 해주고 싶다.

친정엄마는 연애와 사랑이 서툴렀다. 첫사랑은 아닐지 몰라도 처음 사귄 남자인 친정아빠와 결혼을 했다. 그러다보니 딸에게 연애에 대한 조언은 해줄만한 게 없었다. 집안 분위기도 그런 얘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는 나쁜 남자에게만 빠져들어 인생을 소비하곤 했다. 다행히 결혼은 착한 남자와 했지만 그래도 여자인 나는 여자인 엄마로부터 남자 보는 안목을 배웠어야 했던 것 아니냐며, 나쁜 남자에 빠져 허비해버린 젊은 날의 시간을 은근슬쩍 엄마 탓으로 돌리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딸에게 공부하란 소리보다 좋은 남자 만나야 한다는 말을 더 많이 하는 엄마가 되어 버렸다. 가장 강조한 대목은 남자 얼굴 보지 말 것! 그래. 맞다. 내가 남자 얼굴만 봤기 때문에 딸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수인아~ 남자를 볼 때는 뭐를 봐야 한다고?” “착한 마음”

“남자를 볼 때는 뭐를 보지 말아야 한다고?” “얼굴”

기습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딸은 익숙한 듯 대답을 한다. 장난처럼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일종의 세뇌효과를 노리고도 있다. 딸은 눈치 채지 못한다.

딸이 조금 더 크면 구체적인 이야기를 해주리라 마음먹는다. 남자를 보는 안목은 배워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택은 본인의 몫이지만 알고서 선택한 것과 모르고 당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내가 딸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문제’를 대하는 남자의 태도를 보라는 것이다.

살면서 보니 인생은 크고 작은 문제의 연속이다. 금수저로 부족한 것 없이 태어났다 해도 그만이 가진 인생의 문제들을 비켜나갈 수는 없으며, 흙수저로 가진 것 없이 태어나 고된 인생을 살아나간다면 더더욱 다양한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어떤 태도로 그 문제들을 마주하느냐 하는 것이 이후의 인생을 바꾼다.

인생의 고비에 직면했을 때마다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이미 너무나 많이 봐왔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게 비난하고 지적하는 일이다. 그것엔 재능도 필요 없고 힘들일 필요도 없다. 필요한 건 단지 입 하나 뿐이다. 나불나불 지적만 해대는 입 하나면 충분하다.

하지만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 문제에 가로막혀 버렸다. 나는 그런 남자가 사위로 들어오길 바라지 않는다. 우리 딸이 꾸리게 될 가정을 책임질 가장이 되길 원하지 않는다.

문제를 마주하면 ‘자, 이제 어떻게 이 문제들을 풀어나갈까?’라며 방법을 먼저 찾는 남자를 골라야 한다. 채가야 한다. 남자 보는 안목을 가진 다른 멋진 여자들이 채가기 전에.

그런 남자라면 능히 내 딸의 가정을 책임감 있게 지켜낼 수 있으리라. 인생의 길목마다 어떤 고비가 와도, 어떤 문제들에 직면해도 내 딸에게 마음고생을 시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이들은 문제를 풀어나간다. 방법을 찾는다.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이들이 입만 놀리고 있는 시간에 이들은 묵묵히 침묵하며 행동을 개시한다. 문제를 해결한다.

아직은 어려운 이야기라 초등학교 2학년 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 그래서 시기를 가늠해 본다. 중학생 쯤 되면 이런 대화도 가능하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질풍노도의 중학생이 된 딸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건 즐겁다. 아마 집에 오면 자기 방에 틀혀 박혀 지내는 시간이 많을 테고, 가족 모임보다는 친구들끼리의 만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런 청소년이 되어 있겠지.

키는 나보다도 몇 센치쯤 더 클 것이며, 학원에서 마주치는 남자아이나 성당 오빠 등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의 사랑은 지금의 사랑과는 또 달라 단순 고백만으로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고, 가슴앓이 또한 더 깊어지겠지.

사춘기를 맞은 딸이 엄마와 놀아줄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때가 되면 나는 딸에게 데이트 신청을 할 거다. 받아주지 않으면 예쁜 옷 한 벌을 사주겠다고 꼬드겨서라도 데리고 나가야지. 아빠와 남동생 없는 곳에서 단 둘이 ‘남자’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거다. 엄마의 경험담을 듣고 싶어 하면 가감 없이 다 말해주련다. 남편이 들으면 열받을만한 이야기도 딸한테는 다 해줘야지.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에게 고백을 한 딸. 성별이 없던 어린이에서 점점 여자가 되어가려고 하고 있는 딸. 딸 키우는 재미가 쏠쏠한 요즘이다. <류승연 님은 언론인입니다.>

 

<주부, '아주머니'는 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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