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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것에 더 단호하게…시여, 침을 뱉어라

<연재>강진수의 ‘서울, 김수영을 읽다' - 에필로그 강진수 기자lrkdwlstn96@naver.coml승인2017.08.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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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읽는다는 것은 분명 어려운 일이다. 일단 김수영을 이해한다고 나서는 사람이 드물 뿐더러, 김수영의 작품 세계에 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는 사람 역시 없다고 봐야하기 때문이다. 그의 시는 평가될 수 있는 의도로 쓰인 글이 아니기 때문에 평론이라는 틀 속에서 그의 시를 읽어나가기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일부러 김수영을 읽으면서 평론이 아닌 일상의 틀을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사실 김수영의 시작은 아주 작은 일상의 분열, 또는 괴로움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그가 어떻게 소화해내었고 어떤 방식으로 그의 글 속에서 분출해내는가는 김수영을 읽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조금이나마 쉽고 가볍게, 김수영이라는 커다란 메시지를 읽어나가는 것이다.

 

 

수많은 김수영의 작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김수영 본연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시는 ‘사랑의 변주곡’이라고 생각된다. 그간 보아온 김수영이라는 인물이 쓴 시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는 그 시 속에서 투박하게 사랑을 노래한다. 그리고 그건 김수영의 척박함 속에서 피어나는 불꽃, 하나의 씨앗과도 같은 것이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인류의 비애와 거대하고 매정한 도시 사회의 줄다리기와 같은 세상에서 결국 개미와도 같던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위대한 사랑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그는 강조하고 있다. 그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주어진 모든 것을 걸고 있고, 그의 예술가적 모든 점의 정점은 그 사랑을 향하고 있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김수영이 얼마나 로맨티스트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감정을 어딘가에 감추려고 하지도 않고 위악으로 무마하려고 하지도 않으려는 그의 노력이 돋보인다. 이처럼 김수영에게는 미친 예술가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김수영이 대놓고 보여주던 ‘무언가에 미친 예술가’로서의 모습 역시 간과할 부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마음속으로는 여리고 사랑을 꿈꾸는 시인이었다 하더라도, 그의 삶과 일상은 척박하고 메말라 있었다. 김수영 스스로도 타인에게 대하는 모습들이 때로는 이해되지 않고 복잡한 사고의 메커니즘 속에서 비롯되었음을 그의 수많은 시와 에세이들을 통해 읽을 수 있다. 수필 ‘금성 라디오’에서 끝 단락이 되어 아나운서에게 부탁하는 말투는 꼭 무언가를 선언하는 투와 같다. 그리고 도저히 평범한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그의 선언들이 나열되는 기분이다.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예술가의 이야기들이 번잡하게 흐르고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길을 잃는다. 길을 잃는 것 같지만 사실을 길을 찾은 것이다. 김수영은 솔직하게 자신의 복잡한 머릿속과 정신을 드러내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김수영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그러한 접하기 어려운 모습보다 김수영에 대해 눈살 찌푸리게 되는 행동들은 그의 부도덕성과 위악이다. 그의 부도덕성은 그의 가족, 특히 그의 아내에 있어서 많이 드러나게 된다. 아내에게 욕이나 막말을 하는 것은 다반사요, 지우산으로 아내를 두드려 패는 것을 시로 쓴 일은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게끔 한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위악은 일상 전반에서 드러나는데 그러고 나서 그것을 시로 쓰며 자신을 성찰하는 김수영의 모습은 시인으로서 위악의 절정에 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부도덕성과 내재되어 있는 분노, 그 분노를 참지 못하는 비열함과 온갖 감정들을 시로 하여금 정화하려고 했다. 결국 시란 김수영에게 카타르시스의 도구와 같은 것이다. 수많은 위악적 모습들과 괴로운 자아를 배설해내고, 스스로는 카타르시스를 얻어 생을 영위한다. 그의 시에서 그의 배설적인 수많은 단어들, 문장들, 그리고 그 이후에 찾아오는 정화 작용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이다.

▲ 시인 김수영

궁극적으로 시인이란 감정을 배설하는 사람이 된다. 수많은 위악과 거짓, 위선, 가증스러운 삶의 행태 따위들의 것을 감정으로 소화해내어 모조리 배설해내는 시인. 우리는 시인의 배설물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배설물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보다 배설하는 시인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시인 그 사람 자체다. 어떤 소화 과정을 거치고 감정의 변이와 역동을 헤쳐 냈는지는 김수영이라는 사람을 보아야만 알 수 있다. 우리는 그의 시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를 읽은 것이다. 대체 김수영이라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았고, 다시 말하자면 어떤 경험을 하며 어떤 판단을 해가며 또는 실수와 후회를 해가며 살았는지 깊게 조명해보는 것이다.

결국 시란 사람을 읽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시도, 물론 시에는 다양한 깊이와 흐름이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란 그 쓴 사람을 지표로 향하고 있다. 쓴 사람의 내면을 담아내고 있고 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이 어떤 내면을 가지고 살아갔는지, 그리고 어떤 자신만의 세계를 구상하면서 그 안에서 살았는지에 대해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들의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이런 내면과 세계 속에서 살아갔기에 이 시인은 이런 행동을 택할 수밖에 없었구나, 라는 이해심으로 그 시인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해서 그건 아마 시를 쓰는 행동에 대한 이해심이 될 것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라고 외친 시인 김수영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김수영을 평론할 때 그의 시를 배설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문학의 지평에 있어서 배설과 카타르시스의 개념화를 한 인물로서 그를 바라보면 이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문학을 배설이라는 단어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에 부정적이고 결국 시를 배설물로 여기는 것에 대한 꺼림칙함을 주체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김수영이 남긴 말과 글에는 그가 얼마나 시를 배설의 창구로 이용했는가에 대해 논하고 있다. 그는 누구보다 솔직하게 시라는 것이 다듬어지고 아름답게 꾸며져야 할 것이 아니라고 논한다. 그의 논조는 누구보다도 단호하고 솔직하다. 그리고 시란 가래침을 뱉듯이 감정을 거슬러 오르는 것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배설의 방법이다. 감정의 소화가 아닌, 그것을 거슬러 올라 응어리 맺힌 감정을 뱉어내는 것.

김수영이라는 사람을 보았을 때, 결국 이런 시작법이 얼마나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는가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은 무엇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사랑을 했는지. 그리고 그런 점들을 어떻게 시로써 다시 써냈는지. 우리는 사실 전혀 알 수 없지만 이해하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김수영, 그가 뱉어놓은 침 자국을 따라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엮어야 한다. 적어도 그의 시는 맑고 깨끗한 눈밭과도 같았다. 위악은 있었어도 위선은 없었다. 비겁할 줄은 알았어도 위대한 척은 전혀 하지 않았다. 김수영은 그래서 끝없이 자신의 이론의 끝에서 침을 뱉고 서있는 것일 테다. 힘으로서의 시, 그가 말했던 수많은 힘이 작용하던 시의 세계에서 우리는 결코 침을 뱉는 것을 두려워해선 안 된다.

우리는 오히려 더 단호히 침을 뱉어야 한다. 두려운 것에 더 단호하게. 시여,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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