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마을모정 ②-복합문화공간 모정

▲ 겨울에는 마을회관에 모여앉아 발 모두고, 여름에는 모정 기둥에 기대앉아 천지사방에서 모여드는 바람을 함께 맞는다. 화순 북면 길성리 길성마을.

<우리 마을 어귀에는 이야기가 사는 작은 집이 있지요. 사방 팍 터져 있어 아무나 드나드는 열린 집. 벽도 없고 문도 없어 사람사람 단절도 없고요 마을 사람 누구라도 한 말씀 툭 던지면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이야기. 앉아 들어도 좋고 누워 들어도 좋지요. 일 보러 가는 사람 잠시 엉덩이 붙여도 좋고요 일 마친 사람 목침 베고 듣다가 까무룩 잠이 들어도 좋지요. 이야기는 돌고 돌아 두레 일 사람 일 누구네 집 다락방 은수저까지 들고 나와…>
(서정우,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것들-작은 모정’ 중)

‘제 몸보다 억만 배 큰 이야기보따리 안고 사는 작은 집’. 모정은 약속 없이도 모이는 길다방이다. 소소한 담소와 여흥이 시없이 때없이 펼쳐지고, 마을 대소사가 논의되고, 온갖 정보와 소식의 발신지 수신지가 되는 곳. 공동체의 토론과 합의가 이루어지는 광장이기도 하다.

 

▲ 고향에 성묘하러 온 자식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뵈옵듯 동네 어르신들께 대접한 수박 두 덩이. 이제 동네 사람들 다 모이면 갈라먹을 참이다. 순창 적성면 대산리 대산마을.
▲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마을 공동울력 끝에 잔치마냥 밥상이 펼쳐졌다. 신안 영산도.

 

‘나눔’은 모정의 불문율

“뭐이든 생기문 혼자 묵기 아깝다 허고 다 갖고 나오제. 오늘 너 주문 내일 나 주고 항꾼에 나놔묵어.”

담양읍 가산리 회룡마을 이순남(85) 할매의 말씀. ‘나눔’은 모정의 불문율이다.

수박 두 덩이 덩실하게 놓여 있다. 순창 적성면 대산리 대산마을 모정.

“여그가 고향인디 부모는 돌아가셨어. 인자 여그는 암도 없제. 오늘 그집 아들이 산소에 왔다가 들고 왔구만.”

모정에서 쉬던 참인 할매가 전하는 ‘이 수박이 어디서 왔는고 하니’의 내막. 고향 다녀가는 자식들이 동네어르신들을 부모 대하듯 모시는 맘으로 과일이고 술이고 받아다놓는 자리, 모정이다.

 

▲ “이 동네가 좋아라. 인심 좋고 단체심 좋고.” 시방도 한데 모태앉아 ‘단체심’ 기르는 중. 무안 해제면 송석리 송계마을.

 

“인자 다 모태문 함께 보고 짤라야지. 다 모태문 묵어야지.”

‘공동것’이면 수박 한 덩이라도 임의로 손대지 아니하고 함께 감상하고 난 연후에 비로소 갈라먹는 것이 모정의 관행.

모정에는 ‘품앗이’의 불문율도 있다. 그늘에 들어서도 일을 놓지 않는 어매들의 습성. 그리하여 모정에서도 따듬고 매만지는 손길은 계속되고,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일거리에 내남없이 누구나 손길을 보탠다.

‘평화롭게 살아온 언골사람들 이웃과 사이좋게 살아가면서 어른을 공경하고 효도하자고 이곳에 경로당을 건립했노라.’

곡성 곡성읍 구원리 동막마을 모정에 걸린 말씀이다.

‘이웃과 사이좋게’는 그냥 걸어둔 말씀이 아니다. 어디라도 모정을 둘러싸고 수시로 펼쳐지는 일상의 풍경이다.

 

▲ 모정 그늘에 들어서도 일을 놓지 않는 어매들의 습성.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일거리에 내남없이 누구나 손길을 보탠다. 정읍 칠보면 반곡리 벌수마을.
▲ 윷놀이판 하나만 펼쳐도 그곳은 떠들썩한 놀이판. 함평 해보면 산내리 잠월마을.

 

“항꾼에 모태야 재밌제, 웃음나제.”

‘달에 갔다 왔지만 길을 건너가 이웃을 만나기는 더 힘들어졌다’는 제프 딕슨의 ‘우리시대의 역설’은 모정이 살아 있는 마을에는 통하지 않는다. 겨울에는 마을회관에 모여앉아 발 모두고, 여름에는 모정 기둥에 기대앉아 툭 터진 바람을 함께 맞는다.

“우리 동네가 좋아라. 인심 좋고 단체심 좋고.”

한데 모태앉아 그런 자랑과 긍지를 내놓는 곳.

농정(農亭), 농청(農廳), 동각(洞閣), 우산각(雨傘閣), 양정(凉亭), 시정(時亭) 등으로도 불리는 모정은 ‘항꾼에 정신’으로 뭉치는 마을공동체의 중심이다.

“항꾼에 모태야 재밌제, 웃음나제.”

윷놀이판 하나만 펼쳐도 그곳은 떠들썩한 놀이판. 때로는 심심풀이 십원짜리 내기화투가 벌어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누가 이겼는지 누가 얼마를 땄는지 ‘마을 소사’도 엄중하게 기록된다.

십시일반이란 이런 것이라고, 모월 모일 마을잔치 때의 부조 내력도 세세하게 새겨진다.

‘술2홉1박스’ ‘대병4병’ ‘되야지머리1개’…. 정읍 신태인면 백산리 원백산마을의 모정에선 기둥에 붙여진 마을잔치 부조목록이다. 세월따라 빛바래가는 채 이 마을의 한 역사가 되어가고 있다.

 

▲ ‘술2홉1박스’ ‘대병4병’ ‘되야지머리1개’…. 마을잔치 부조의 세세한 내력 새겨졌다. 정읍 신태인읍 백산리 원백산마을.
▲ 때로는 심심풀이 십원짜리 내기화투가 벌어지는 복합문화공간. 담양 월산면 중월리 중방마을.
▲ 당제라는 마을공동체의 제의가 치러지는 당산나무 가까이 자리한 모정. 마을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광장이다. 곡성 죽동리 죽동마을.

 

“저 하나씨가 마을을 보살펴줘”

당산나무 가까이 자리한 모정은 당제라는 마을공동체의 제의가 치러지는 중심터이기도 했다.

“저 하나씨가 마을을 보살펴줘. 나는 당산하나씨하고 유재여.”

500그루 울울창창한 숲을 이룬 방풍림 속에 당집이 있고 모정이 있는 여수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에서 듣는 전설 같은 말씀이다.

영광 묘량면 영양리 장동마을 모정 앞엔 선돌이 서 있다. 해마다 옷 새로 지어 입히는 그 정성으로 마을을 가꿔 왔으리니.

 

▲ 선돌에 해마다 옷 새로 지어 입히는 그 정성으로 마을을 가꿔 왔으리니. 영광 묘량면 영양리 장동마을.

마을의 광장이고 운동장인 모정 둘레엔 들독들이 꼭 있었다. 애오라지 몸공으로 하루하루를 이어가는 농사꾼들에게 모정 혹은 당산나무 아래 들독(들돌) 놓인 자리는 힘을 내보이거나 힘을 키우는 곳, 이를테면 동네 헬스장이었다.

“한방에 못 들문 우세여.”

모정 앞 정자나무 그늘에선 들독 하나를 둘러싸고 아이가 어엿한 일꾼으로 진입하는 농경사회의 성인식이 치러지기도 했고, 떠들썩한 힘자랑이 펼쳐지기도 했다.

 

▲ “한방에 못 들문 우세여.” 들독 하나를 둘러싸고 아이가 어엿한 일꾼으로 진입하는 농경사회의 성인식이 치러지기도 했고, 떠들썩한 힘자랑이 펼쳐지기도 했다. 화순 능주면 천덕리 회덕마을.

 

어떤 거짓도 꼼수도 통하지 않는 단순하고 명쾌한 힘겨루기. 들독은 오로지 자신의 몸뚱아리와 체력으로 식구들 건사할 농사를 지어야 했던 농사꾼들에게 힘을 재는 척도이자 힘자랑의 근거였다.

들독은 마을의 힘의 상징이기도 했다. 외지 사람이 함부로 걸터앉든지 발을 얹든지 했다가는 예사로 혼쭐이 났다.

마을마다 사내들의 근육을 키운 것은 이 깡깡한 들독이었다. 둥근 돌 하나만 있어도 마을공동체를 한데 묶는 오락과 스포츠로 대동단결과 화합의 장이 펼쳐지던 곳.

모정은 내남없이 서로를 보듬고 살피며 ‘항꾼에’의 마음을 모태고 보태온 곳이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심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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