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범의 ‘영화 톺아보기’> ‘택시운전사’

1000만이란 가치를 그 영화의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는 게 이젠 난센스에 불과하단 점은 누구라도 알 만한 주지의 사실이다. ‘필견 1000만’으로 불린 ‘군함도’가 스크린 독과점 논란으로 무너진 모습만 봐도 뻔하다. 영화의 됨됨이는 이젠 가치 기준으로 볼 수 없는 또 다른 기준이 돼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1000만 돌파(19일 오후 기준)’에 성공한 ‘택시운전사’가 그 정도의 찬사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불편한 시선을 전하고 싶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사태’란 천인공노할 단어를 사용하는 역사다. 이 역사를 다루는 이야기에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대체 얼마나 될까.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기억도 없고 경험도 없다. 그저 종이로 영상으로 입으로만 전해들은 역사다. 37년이 지난 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은 한 가지다. 아픔이다. 그리고 그 아픔을 다루는 방식이다.

여러 작품이 있었지만 광주의 입장에서 그 날의 아픔을 다룬 첫 번째 영화는 아마도 2007년 ‘화려한 휴가’일 것이다. 물론 이 영화도 한계는 있었다. 그저 시민군의 입장에서 무고함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시대의 아픔과 시대의 고통을 다루는 방식은 분명히 ‘어떻게 다루느냐’가 있어야 한다고 봤다. 그리고 그 ‘어떻게’에 ‘왜?’란 질문도 필요했다.

‘택시운전사’는 외부인의 시선이 주된 장치다. 독일인 기자의 눈으로 바라 본 그 날의 참상. 그리고 당시 권력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외부인(서울 시민)의 시선으로 보게 된 동질감의 아픔. 이 두 가지로 만들어 낸 ‘택시운전사’는 고민도 없고 공감도 없다. 그저 여름 시장의 흥행을 위해 해외 스타와 국내 톱스타란 ‘차용증’을 빌린 질 떨어진 ‘그 날’의 이야기에 대한 모욕 같았다.

이 영화는 시작부터 잘못됐다. 먼저 송강호의 캐스팅이다. ‘그의 얼굴이 시대의 얼굴이다’는 찬사까지 나왔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예상 가능한 지점을 보게 될 것이란 예고만 뻔히 하게 된다. 그는 언제나 소시민의 얼굴에서 시대의 보편성을 말하는 배우로 성장해왔다. ‘변호인’은 그 정점이었다. 동어반복의 의미 지점에서 ‘택시운전사’는 착각으로 출발한다.

 

▲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1970년대 중동 건설 노동자 출신인 택시운전사 만섭(송강호)은 민주화 운동 시대의 대학생 데모에 자신의 보편성과 보수성을 대입시킨다. 삶이 곧 정신이고 시대였던 그 시기다. 그것이 정답이었다. 모든 인생의 목적이 호구지책에 집중했던 소시민들의 시대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전두환을 시대의 영웅으로 추앙하는 그 시절의 사람들.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영화는 ‘5.18’ 반대급부적 이미지 상승효과를 노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건 정확하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다른 택시기사의 손님(위르겐 힌츠페터)을 가로채고 광주로 향한다. ‘왕복 10만원’의 택시요금이 발단이다. 그것이 필요한 만섭은 그저 아무런 정보도 없이 향한 광주에서 목도한 참상에 어리둥절해 한다. 사실 그의 어리둥절에 관객인 필자가 더욱 어리둥절했던 이유는 그저 이유도 모른 채 싸우는 광주 시민들의 모습이었다. “우리도 왜 우덜한데 그러는지 모르겠어라”는 대사. 그저 그렇게 만들어 버린 ‘택시운전사’의 모습이 경악스러웠다. 그 안에서 숨 쉬는 광주 시민보다 외부인 만섭이 점차 각성하고 변화되는 모습이 이 영화의 불손함을 더욱 가중시키는 느낌이었다.

사실 더욱 큰 문제는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자세다. 일본 동경에 주재하던 독일 언론 소속 기자는 대한민국 광주의 일을 전해 듣고 신분을 속이면서까지 입국한다. 대체 왜? 무슨 목적으로? 어떤 저널리즘의 의식으로? 그에 대한 정보 자체에 영화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도 않았다. 그저 외부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대체 그는 어떤 이유로 광주행을 택했을까. 10만원을 꺼내 들고 ‘Go To 광주’를 외치는 그는 그저 특종에 목마른 속물인가. 아니면 설명되지 못한 저널리즘의 화신일까. 단지 태술(유해진)의 가족과 함께 한 만찬에서 매운 김치를 먹고 ‘핫’을 외치는 외국인 그 이상 이하도 아닌 주변인으로 전락하고 만다. 할리우드의 유명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을 캐스팅하면서 그를 ‘서프라이즈’의 재연 배우로 전락시킨 감독의 의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도 궁금할 따름이다.

“왜 기자가 됐느냐”란 질문을 받는 힌츠페터 기자. 그의 대답을 듣기 위해 귀를 세우고 스크린을 응시했다. ‘택시운전사’의 목적의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 대답이 허무하고 좌절스러울 뿐이었다.

외부인(외국인 기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광주의 참상은 그동안 다뤄진 적 없는 ‘5.18’의 새로운 시선이 될 뻔 했다. 하지만 ‘택시운전사’는 인간미도 목적성도 영화적 장치로 보기에도 지극히 단선적이고 맥락 없는 각성의 도구로 만섭의 시선만 강조한다.

그것을 통해 ‘택시운전사’가 새로운 5.18의 진중한 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방식은 시대의 설득도 감정의 설득도 안 된다. 소비의 측면에서 가장 저열한 방식일 뿐이다.

<영화전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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