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마을모정 ③-정자나무

▲ 저 나무그늘의 평수가 얼마일까. 큰 나무와 벗한 모정의 세월이 유장하다. 남원 대강면 수홍리 수촌마을.

뙤약볕에 그늘 찾는 마음이야 뉘라고 다를까. 하물며 염천 불볕을 겉옷인 양 걸쳐야 하는 농사꾼들이라면.

“사뭇 더울 직에는 솔개그늘에라도 들어서고 시프제.”

작은 솔개 날 때 그 그림자, 손바닥만한 그늘도 아쉬운 것이 들녘의 농부인 것이다. 땀을 동이로 흘려야 하는 일 마디에 잠시 장화 벗고 냉수 한 사발 들이키고 나무그늘 아래 깜박 조는 낮잠이 농사꾼한테는 제일락(第一樂)이라 하였다.

“농사꾼들 좋아하는 나무는 그늘나무여.”

키 큰 귀목나무 둘이서 막내의 머리라도 쓰다듬듯 낮은 기와지붕을 쓰다듬고 있는 듯한 쌍수정(雙樹亭·화순 동면 복림리)에서 만난 할매의 말씀.

 

▲ 없는 바람도 이곳에선 절로 만들어질 것 같은 초록. 정읍 칠보면 반곡리 원반마을.

 

모정은 네 개의 기둥이 떠받친 지붕 아래 마루의 면적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연년세세로 그늘농사를 잘 지어온 정자나무 언저리가 모정이 놓이는 맞춤한 자리. 그늘의 면적까지가 모정의 영역이다. 정자나무는 그늘의 평수를 넓혀주는, 모정의 벗이다.

2009년 인간이 자연에게 드리는 ‘풀꽃상’은 정자나무가 받았다.

<새 잎 피는 봄날 햇살, 사람들이 가득 차 있던 여름 날의 그늘, 가을의 고운 단풍과 눈이 하얗게 쌓인 이 정자나무는 오랜 세월 변함없이 마을을 지켜주는 큰 어른이었습니다. 속도와 경쟁만을 추구하는 세상 속에서 마을공동체는 사라지고 해체되어 그 나무 아래는 텅 비게 되었으나, 마을 사람들의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과 기쁨과 슬픔들을 달래주던 이 나무는 마을의 역사를 의연하게 지켜왔으며 지금도 지켜보고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되어 공동체를 이루며, 지금도 곳곳에 그 풍요함과 우람함을 자랑하며 우뚝서 있는 마을의 상징인 이 땅의 모든 정자나무를 대표하여 ‘임실 진뫼마을의 정자나무’에게, 희미해지는 마을공동체를 되살리고 돕고 나누던 두레의 마음이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염원하며 열세 번째 풀꽃상을 드립니다.>

꼭 당산나무가 아니더라도, 몇백 년 된 보호수가 아니더라도 듬직한 그늘을 드리울 만한 나무라면 모두 모정과 벗할 자격을 지닌다.

 

▲ 큰나무 벗한 자리에 목침 두어 개. 여름집의 서늘한 풍모를 갖췄다. 나주 남평읍 우산리.
▲ 양철지붕을 인 작은 정자는 이름부터 서늘한 심량정(尋凉亭). 이 모정을 짓고 당산나무 마을숲을 앞마당처럼 정갈하게 소지하는 어르신들의 쉼터다. 고창 아산면 반암리 영모마을.

 

여수 소라면 사곡리 장척마을엔 큰 나무 한 그루 대신 도래도래 나무숲이 모정을 둘러싸고 있다.

“옛날에는 아조 큰 나무가 있었어. 오래 돼갖고 구덕이 패였는디 얼매나 큰지 비가 오문 나무 구녕으로 사람이 서이는 들어가서 비를 피했다요. 근디 부잡시럽게 애기들이 거그서 불을 피와갖고 나무가 넘어가불었어. 요 알로 그 나무 뿌리가 시방도 있어. 땅속으로 뻗어 있어. 그런께 그 뿌리를 뺑 둘러서 도래도래 나무를 심었어.”

마을사람들이 개미실(소라면 봉두리 의곡마을)에서 옮겨 심었다는 나무들은 죽은 나무의 뿌리를 가운데 모시고 울울창창 키를 세우고 몸피를 늘려가는 중이다.

“죽은 가지가 생기문 사뭇 걱정들을 해싸. 영양제 맞촤 갖고 살려내고 그래.”

김상문(64) 아재는 “이만치 잘해 놓은 모정 숲이 드물다고 헙디다”고 짐짓 자랑으로 말끝을 맺는다.

 

▲ 보고만 있어도 일어나는 흥. 송무도(松舞圖)라고 할까. 소나무의 군무 속에 들어앉은 모정. 남원 운봉읍 산덕리 삼산마을.

 

화순 춘양면 월평리 옥평마을 모정을 양쪽에서 호위하고 선 나무는 키가 완연히 다르다.

“옛날에 ‘해방 바람’에 나무들이 다 씨러져불었어. 얼매나 바람이 씨었는가 몰라. 한쪽이 자꼬 죽어불어서 새로 심고 새로 심고 해서 제우 저만치 키와놨어.”

이 모정에 여름날에도 사람이 없다면 그것은 모정이 너무 추워서라고 허허 웃는 이우(87) 할아버지.

나무와 짝하여 모정은 비로소 여름집의 서늘한 풍모를 갖춘다. 더위를 씻는 척서(滌署)의 공덕을 나무와 더불어 지어낸다.

뙤약볕이 아무리 내리쬔들 초록의 위용 시들지 않는다.

 

▲ 둘레둘레 강강술래라도 하듯 나무들이 손잡고 선 곳에 자리한 장수정(長壽亭). 여수 소라면 사곡리 장척마을.

 

큰 나무 한 그루 선 그곳, 혹은 여럿 어울려 숲을 이룬 그곳이 모정의 주소. 멀리서 보아도 온 하늘을 어루만지며 도도록허니 존재감 뚜렷한 나무의 품 속에 모정은 안겨 있다.

“뜨거와서 일 못할 때 거그 아래만 들문 씨언해.”

“일하다 땀나문 거그서 파싹 땀을 식후제.”

“우리는 여름내 거가 놀아.”

그런 말들이 으레 따라붙는다.

함벽정(涵碧亭)이니 심량정(尋凉亭)이니 그런 이름들을 달지 않았을 뿐, 큰나무에 기댄 모정들이란 그 이름들마냥 온통 푸르름에 젖어 있고 잠겨 있으니, 서늘함을 찾아서 갈 만하다.

오가는 이 누구라도 품어주는 넉넉한 그늘이 거기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심홍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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