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나무들의 춤이다. 노래다.
길고 짧고, 굵고 가늘고, 직선인 듯 곡선인 듯 다양한 생김새의 서까래들이 어울려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운율을 빚어낸다. 우람한 대들보를 가운데 두고 사방으로 촘촘히 뻗어나간 서까래. 섣부른 인공을 더하지 않았기에 숲 하나를 그대로 품어버린 듯한 천장이다.
나무가 가진 곡(曲)과 직(直)의 성정을 두루 존중하여 이뤄낸 뼈대의 아름다움과 역동성에 가슴이 뛴다.
‘무위이무불위(無爲以無不爲, 하는 것이 없으면서 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라 하였던가.
그저 반듯하게 치목(治木)하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휘어진 나무도 굽어진 나무도 다만 ‘생긴 대로’ 썼다. 어떤 나무든 그 ‘스스로다움’을 지켜주며 저마다의 쓸모와 제자리를 찾아주는 살뜰함으로 이뤄낸 아름다움이다. 단순·획일·정형·반복·동일…. 이런 자(尺)의 재단을 피할 수 있었기에 얻어진, 일견 엉성한 듯하나 단순 소박 질박 은근 담대한 미덕이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는 것이 오는 것인지 가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고, 하는 일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틀린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 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기주장만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 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빙빙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 자 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냇물처럼 천 가지 만 가지일 것이다.> - 정조의 ‘만천명월 주인옹 자서’(萬川明月 主人翁 自序) 중.
냇물처럼 천 가지 만 가지인 사람들을 모두 품고자 했던 이의 마음가짐을 본다.
<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 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을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주고 나쁜 점은 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뒤로 돌려주고, 규모가 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면서 재주보다 뜻을 더 중히 여겼다.>
그 모든 존재들이 ‘참으로 쓸모있게, 참으로 가치있게’ 제자리를 찾은 한세상이 이 모정들에 펼쳐져 있다.
목수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나무를 동량으로 삼는 것이라 했다. 알매흙에, 서까래에, 도리깨까지를 제 어깨에 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 대들보다. 무겁다고 내려놓을 수 없는 삶처럼, 평생 그 한자리에서 지붕을 떠받들고 있어야 하는 대들보.
그런데 굽은 재목이라니. 중심축을 잡기가 역학적으로 불리한 굽은 나무인 줄 알고서도 목수는 그 한마음을 내었다. 나무들 또한 서로에게 서로를 맞추며 오랜 세월 버텨 주리라는 목수의 신뢰를 오롯이 지켜냈다.
“높은 산에 남글(나무를) 찍고 낮은 산에 터를 닦아/ 휘여진 남근 굽다듬고, 굽은 남근 휘이게 다듬어….”
‘성주풀이’에 드러나는 옛분네들의 집짓는 마음가짐이 그러하였다.
‘크게 공교로운 것은 마치 서투른 것 같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미감을 담고 있는 세상이 여기 넓지도 크지도 않은 모정 안에 있다.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심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