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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소가 지역축제에 돈을 내는 까닭은?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김수복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09.11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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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이 온다고, 고추 축제에 항꼬 가자고, 영숙 언니한티 전화 왔는디요?”

내 옆의 그녀가 느닷없이 그렇게 전라도 사투리를 애써 강조하며 배시시 웃고 있었다. 멀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는, 그러나 가깝다고도 말하기 어려운 곳에 살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생 부인 이름이 영숙이었다.

 

▲ 아이들의 굴렁새 굴리기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다. 선운사 차밭 일이 끝나면 찾아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끝나도 끝난 것 같지 않게 끝나버린 탓이었다. 한 달 동안 피나게 뛰고 얻은 보상은 찝찝함 뿐이었다. 인건비는커녕 자동차 유지비조차도 한 푼 안 들어오는 이상하기 짝이 없는 일이 되고 말았으니 이게 뭔가. 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으므로 누구 원망 할 것도 없이 ‘기분 참 지랄 같다’는 둥 어쩌고 혼자 미친놈처럼 중얼거리는 나날이 무려 두 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런 와중에 친구라도 생각나서 찾아갔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나는 아무래도 그런 넉넉한 정신머리를 갖고 있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날이 되어, 친구 부부가 마당으로 들어왔다. ‘고창 해풍 고추축제’는 고창군 해리면에서 하는 행사이고, 내가 사는 곳이 해리면 하고도 축제 현장 바로 맞은편 마을인 까닭에 그들이 내 집으로 올 수밖에 없는 구도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이미 여러 차례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던 탓으로 ‘빚갚음’을 위해서라도 찾아가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형국이 되고 보니, 내 마음에 미안함이 보통 수준을 확 넘어버렸다.

무슨 사죄를 할 일까지는 아니라 해도, 그렇다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그야말로 ‘개무시’해 버리고 말 일 또한 아니어서, 어쨌든 대충 변명은 해야만 했다. 내가 도시에 살면서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조금이라도 신의가 배반되는 일을 당하고 나면 상처가 되고, 그 상처가 오래 간다 등등 어쩌고 그렇게 선운사 차 밭에서의 일을 주마간산 격으로 설명해 주고 양해를 구했다. 그러자 영숙씨가 대뜸 한 마디 하신다.

“아니 요새는 뭔 고따위 황당한 일이 많기도 한가 몰라.”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지난 6월 초에 오디즙을 짜서 팔았는데 아직까지 그 값을 못 받고 있다고 했다. 친구네는 서울에서 이른바 귀농을 할 때 뽕나무 농사를 짓기로 하고 그 일을 계속 해오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오디즙은 친구네의 생계수단인 셈이었다. 판매는 백 퍼센트 직거래이고, 수단은 카카오톡 친구나 알음알음이었다. 그런데 카카오톡 친구가 주문을 해 와서 물건을 보냈는데 돈을 안 보낸다. 독촉을 하면 내일이나 모레를 무슨 염불처럼 반복하고 있을 뿐이어서, 많지도 않은 돈 십칠만 원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고, 이러다가 무슨 암이라도 걸리지 않을까 싶다는 것이었다.

 

▲ 서대를 발견하고 시누이를 생각한 영숙씨

 

듣고 보니 그 경우도 믿음의 훼손이 문제였다. 내가 상대를 믿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하면 상대는 저렇게 해주겠거니 하는 믿음 하나만으로 물건을 먼저 보냈다. 후결제를 선택한 것은 그만큼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흘이 지나고,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더니, 깜빡 했다고, 곧 대금을 입금시킨다고 해놓고는 다시 또 감감무소식이다. 다시 또 전화를 하면 내일이나 모레쯤 입금한다 하기를 벌써 몇 번이나 했는지, 그게 벌써 두 달이 넘었다는 거였다.

듣고 보니 친구네와 나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나는 5월 중순에서 6월 초까지 차 밭 일을 했고, 친구네는 5월 말에서 6월 중순까지 뽕나무 오디 일을 했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5월과 6월이 문제였다. 생각해보라. 5월이 무엇인가. 제아무리 후지게 잡는다 해도 장미의 계절 아닌가 말이다. 그 화려한 계절에, 돈을 물 쓰듯이 펑펑 써대며 놀러나 열심히 다녀야 마땅한 연령대의 인간들이 새빠지게 일이나 해 처대고 있었으니 이게 뭐냐. 뭐냔 말이다.

“긍게 우리가 시방 놀아야 할 나이가 됐다, 이것인디 잉?”“그려 인마, 여태 뭔 지랄했길래 놀러다닐 팔자도 못 되고 말야.”

“얀마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한 달만 연속으로 놀아봐라. 미치제, 미쳐.”

“하긴 일하는 것도 복이다, 큰 복이여. 우리 모두 크게 복 받았응게, 그렁게 앞으로도 많이 당하고 살자 뭐.”

그런저런 시시껄렁한 얘기에 취해 있는 동안 시간은 잘도 가고 있었다. “와따 이거이 뭐냐 벌써 네시다야.” 깜짝 놀랐다는 듯이 그렇게 호들갑을 떨어대고 나니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네 사람 다 아직 점심도 전이었다. 밥을 해 먹을까? 라면이나 끓일까? 아니면 감자나 쩌 먹을까? 등등 어쩌고 찌질한 고민을 하다가 깜짝 놀랐다는 듯이 벌떡 일어섰다.

이 판국에 집에서 밥 짓기를 할 것이냐. 나가자. 나가서 돈 주고 사 먹자. 아 참 그렇지. 오늘이 고추 축제 하는 날 아니냐. 축제 가기로 하고 만나서 지금 이게 뭔 짓이냐. 빨리 나가자. 어서 나가자. 어서 빨리 나가서 일단 밥부터 사 먹자. 이것저것 실컷 배터지게 먹어 버리자.

실제로 우리는 배터지게 먹어댈 각오를 하고 이것저것 마구 주문을 했다. 파전에 장어볶음에 바비큐까지, 그래봐야 세 가지뿐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 모든 음식을 탁자 하나에 진열해 놓고 보니 탁자가 너무 작다. 작아도 너무 작다. 그러나 역시 축제 현장은 축제 현장이어서, 입에 넣고 씹을 만한 것은 몇 점 안 되었다.

“저기요, 여기 소주 한 병 주실래요?”

그놈의 ‘저기요’를 몇 번이나 했던가. 소주 한 병은 두 병이 되고 세 병, 네 병이 되었다. 밥 같은 것은 있지도 않았지만 먹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서는 그렇게도 고프던 배가 흥청망청한 분위기 속에서 술 냄새를 맡고 보니 하나도 안 고파 버리는 것이어서, 술병이 언제 이렇게 작아진 것이냐느니, 술잔에 무슨 구멍이 뚫린 것 같다느니, 내 술잔을 누가 마셔버렸느냐니, 어쩌고저쩌고 등등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말이 되는 것처럼 태연하게 지껄이는 동안 취기는 쑥쑥 잘도 올라와 주고 있었다.

 

▲ 배터지게 먹어보자고

 

그리하여 취흥이 도도해진 우리는 바야흐로 거리로 나섰다. 무서울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고, 쭈뼛거릴 일 또한 없었다. 아무 데나 불쑥 머리를 들이밀고 “그거이 뭐이다요?”하고 묻기를 얼마나 했는지, “이거 한 개 먹어봐도 돼요?”하고 집어먹기는 또 얼마나 했는지, 그야말로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여기저기, 이곳저곳, 돌기를 얼마나 하고 있던 중에 영숙씨가 돌연 소리를 질렀다.

“와아, 서대다, 서대야.”

“서대가 뭐, 그게 왜요?”

세상의 이치란 역시 그런 것인가 보다. 무엇을 아는 사람은 알아서 환호성을 지르고, 모르는 사람은 왜? 왜? 한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포장마차를 하는 영숙씨의 시누이가 그랬단다. 지난 번 고창에 왔다가 우연히 서대를 발견하고 그것을 사 가지고 갔는데 포장마차 손님들이 고창 서대를 그렇게도 좋아한다고, 다니다가 서대를 보거든 보이는 대로 사서 보내 달랬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있는 내 가슴에서 뭔가가 쑥 올라온다. 밖에 나와서 한참 잘 놀다가 “어매 으쩌까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왔네 잉?”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와도 같은, 아니 그것과는 약간 다른 차원의 당혹스러움이다. 고창 바닥에 서대가 얼마나 많은데 그것을 보이는 대로 다 사 달랬단 말인가 하는 어처구니없음에 이어지는 그 어떤 것. 내가 만일 영숙씨를 미워한다면 ‘꼭 저따위로 살아야만 하는가’ 했겠지만, 그게 아니고 보니 ‘이른바 서민들의 마음이란 게 결국은 이런 것 아니겠는가’하는 깨달음 같은 것이 불쑥 솟아나서 나를 휘청거리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영숙씨는 서대를 이른바 ‘아도치기’로 그냥 몽땅 사 버리고 있었다. 고추도 좀 살까 하고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었지만, 우리가 소주를 마시는 동안 출품된 고추는 죄다 팔려 버리고 단 한 근도 안 남아 있고, 구경이나 하라고 전시해놓은 몇 자루가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게 또 그렇다. 금년의 고추 축제는 그야말로 축제다운 맛이 느껴진다. 가수 남진씨가 출연한다는 소문에 힘입은 바도 크지만, 고추 자체가 일종의 대박을 터뜨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년에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다 보면 초벌 고추를 따기도 전인 6월에 벌써 탄저병이 돌고, 7월이면 여기저기 도처에서 푹푹 쓰러져 가고, 고추 축제가 열리는 8월이면 남아 있는 고추밭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곤 했지만 금년은 전혀 아니었다. 정상적(?)인 장마철에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은 덕분이었다.

초기에는 비가 없어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등의 수고로움을 겪기는 했지만, 고추 농사에는 그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일이었던가 보았다. 초기에 죽지 않고 튼튼하게 자라난 고추는 나중에 시작된 느닷없는 장마에도 끄떡이 없었다. 그 바람에 빗속에서 고추를 따는 매우 이채로운 풍경이 도처에서 자주 목격되곤 했다.

“야 이거 이러다가 금년 고추값 폭락하는 거 아냐?”

그런 걱정도 하고 있었지만, 중부 내륙지역에서 극심한 봄 가뭄으로 고추 모종 자체를 아예 해보지도 못한 경우가 속출한 까닭에 걱정은 현실화되지 못했다. 게다가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 당국의 무역보복이 또 한몫을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중국산 고추가 도처에서 돌았지만, 금년에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운 까닭에 그야말로 국산 고추가 금값이 되어 있었다.

“살다 살다 이런 횡재도 다 해보네 잉?”

 

▲ 해풍고추와 원자력본부가 나란히
▲ 남진씨와 정면으로 승부를 거는 영숙씨

 

해마다 고추 농사를 반 마지기씩만 하다가 금년에는 무슨 미친병이 들었던 것인지 세 마지기씩이나 지어놓고 걱정을 했다는 우리 동네 앞 동네 선배 한 분의 그런 말씀이야말로 아마 고창의 금년 고추 농사에 대한 최종 결산이라 봐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었다.

어쨌든 우리는 고추 축제 현장에 와 있었다. 가수 남진씨를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영숙씨의 강력한 주장이 없었다면 예년처럼 소주나 몇 잔 마시고 금방 돌아갔겠지만, 금년에는 가수 남진씨가 출연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심도 좋게 기다렸다. 아 참, 오래도 되었다. 언제 적 남진이란 말인가. 나도 한때는, 그러니까 청소년 시절에는 남진에 열광도 했었다. 그의 노래를 읊조리고 있노라면 내가 금방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어쩌고 저쩌고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 속의 현실이란 역시 무서운 것이어서, 웃기지 마라 그림 같은 집은 개뿔이나 무슨, 꿈을 버려, 꿈을 버려, 그것을 버리지 않으면 넌 죽는다니까, 하는 뭐 그런 메시지를 끊임없이 듣고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무엇이, 누가 나를 그렇게 위협하고 있었는가의 문제는 너무 복잡하니까 일단 생략하고 넘어가야겠지만,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그 중에 하나, 권력집단 중에 하나인 ‘한수원’이 나도 여기 와 있느니라, 하는 듯이 축제현장 정중앙에 현수막을 걸어놓고 있었다.

“원자력발전소가 이 축제를 지원하는구나?”

금시초문이라는 듯이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사실 오래된 일이었다. 고추뿐만 아니라 이런저런 온갖 스포츠와 문화관련 행사를 원자력발소는 지원해 왔었다. 그래서 이제는 그것이 아주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력발전소의 지역축제 지원은 언제나 새삼스럽고, 뜨악하고, 낯설기만 하다. 아마도 원자력발전소라고 하는 이름 자체가 지닌 거대한 힘 때문일 것이다.

자기가 개발한 논리를 자기 자신도 믿기 어려울 때, 그러니까 떳떳하지 못하고, 정의롭지도 못한 자들은 돈으로 사람 마음을 후려 간다. 선거 때면 으레 등장하곤 했던 박정희의 고무신과 막걸리 역사가 그랬듯이, 제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라도 민심을 얻지 못하면 아무 짓도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민심은 언제나 코앞의 푼돈에 기꺼이 자신을 팔아버리곤 해 왔다.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하룻밤을 그야말로 미쳐버린 듯이 놀아보자는 생각으로 논다 해도, 최소한 권력집단이 우리의 그 모든 행위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뭐 그따위 생각을 하면서 남진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울화가 팍팍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어쨌든 축제는 축제고, 축제는 성황리에 끝났다는 것을 우리는 나중에 알았다. 남진의 등장에 어찌나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는지, 배가 고파서 뭘 좀 먹고자 여기저기 음식점을 돌아보았지만, 밥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 다 팔려버렸다는 것이다. 원 세상에, 이렇게도 완벽하게 성공적인 축제도 있을 수 있다니.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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