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닷컴> 마을모정 ⑤-모정 살림
‘있어 보이려는’ 것들은 없다. 꼭 필요한 것들만 갖춘 곳.
궁극의 미니멀리즘이 실현된 공간, 모정이다. 여름집 모정에서 가장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것은 목침이다. 거기 가만 놓여 있는 것만으로도 모정의 풍경과 의미를 완성한다.
그렇다. 여름은 누군가에게는 목침의 계절. ‘송뢰고허침(松籟高虛枕)’이라 하여, 높은 베개를 베고 솔바람소리(송뢰)를 듣고 있노라면 세상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다 여겼다.
반들반들 윤기나는 마룻바닥을 지닌 모정이라면 목침이 놓일 자리로 더욱 제격. 빈 마룻바닥에 툭 던져진 듯 무심히 놓인 목침은 여름 한낮 산들바람 덮고 잠드는 쾌(快)한 오수에 필수. 그저 나무토막일 뿐이지만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으로, 다듬고 매만졌을 동네사람 누군가의 살뜰한 정성이 거기 스며 있다.
세월에 닳고 여러 사람들의 손때를 많이 탄 목침일수록 시나브로 갖게 된 부드러운 직선의 풍모가 온유하다. 늙어진 몸에 동고동락한 오랜 시간이 쌓인 목침은 그 자체로 모정의 역사와 연륜을 증거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베개에 기대어 고단한 삶으로부터 잠시 잠깐의 쉼과 잠과 꿈을 얻고 갔을까.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번거로움 없이 언제든 거기 있으라고, 마루를 반으로 가르는 턱처럼 길게 놓은 장침(長枕)도 있다. 반영구적인 설치인 셈인데, 모정살림의 으뜸이 목침이란 걸 증명한다. 양편으로 엇갈려 눕든, 일렬로 나란히 눕든, 서로 머리 뽀짝 맞대고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다정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
‘물을 베고’ 눕는 물베개도 있다. 빈 페트병에 물을 채우면 뚝딱 완성. 재활용의 정신에 충실한 베개이기도 하다.
‘여름집’인 모정의 필수품으로는 파리채도 빼놓을 수 없다.
목침, 부채와 더불어 모정의 삼총사. 한시도 손 놀리길 아까워하는 할매들이라면 파리채를 손에 꼬옥 쥐고 앉아 있기 십상이다.
모정 마루의 정갈함은 닳아진 빗지락 몸뚱이와 그 누군가의 손길의 합작품. 마을사람 누구라도 들명날명 쓸고 매만진다. 그 마을 사람들의 정갈한 성정은 빗지락 내걸린 맵시에서도 티가 나기 마련.
텔레비전이며 라디오며 모정에 자리한 모든 살림은 마을의 공물(公物)이다. ‘내야’가 아니라 ‘우리야’여서 더욱 귀한 몸으로 대우 받으며 높은 곳에 모셔진다.
둘둘 말아놓은 ‘국방색’ 담요가 응당 품고 있기 마련인 화투짝도 모정에 없으면 서운할 물건. 사람들 둘러앉게 하고 떠들썩한 활기를 낳는 막중한 소임을 해낸다.
“서로 따갈라고 해야 쌈이 나제. 욕심 없으문 쌈 없어.”
십원 백원짜리 내기화투에도 공정함을 위한 기록정신은 빛나노니, 화투짝 주변 어딘가에 화투 장부가 세트로 자리해 있기도 한다.
모정 한피짝엔 전화번호부가 놓이기도 한다. 스마트폰 시대에도 마을 사람들이며 읍내 이러저러한 가게들에 급한 전화 넣을 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마을사람들 전화번호를 아예 기둥에 손글씨로 써놓은 모정도 있다. 그 전화번호의 주인들이시여, 오래오래 모정의 주인으로 남아주시길.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심홍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