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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누구나 멈출 수 있어

<청춘 &> ‘혼자 떠난 제주도 배낭여행’ 5회 / 김혜영 김혜영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09.24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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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온지 3일이 되어가니 아름다운 바다가 편안해질 정도로 동네에 익숙해졌고, 이제는 정류장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해변의 모래가 남아있는 정류장 벤치에 무거운 배낭부터 내려두고 멍하니 앉아있는데, 습기 찬 유리창에 붙은 아기자기한 공방의 전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의 공방은 어떤 곳일까, 하는 호기심도 컸지만, ‘겁 먹지마 그다지 멀지 않아’라는 공방의 이름이 더욱 눈길을 끌었다. 혼자 배낭을 메고 여행하는 이에게 다정히 말을 거는 것 같은, 아주 달콤한 문구였다.

전단지에 쓰인 정류장 이름만 외운 채 버스를 타고,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걸었다. 그래도 공방이니까 카페가 많은 애월처럼 번화한 곳일 줄 알았는데, 논과 시골집들만 있었다. 모든 집이 똑같이 생겨서 제대로 온 게 맞는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때서야 인터넷에 공방을 검색하고 전화를 걸었더니, 친절한 목소리의 사장님이 직접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다. 오후 5시가 넘은 늦은 시간인데 민폐를 끼친 건 아닐지 조심스러웠다.

 

 

친절한 사장님과 함께 도착한 공방은 정말 제주도스러운 풍경이었다. 할아버지가 쓰던 창고를 직접 리모델링했다는데, 돌과 시멘트가 섞인 것 같은 거친 외벽 안에는 창고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공방이 있었다. 조개 모양의 조명, 제주 바다 그림, 분홍색 물감을 칠한 작은 냉장고, ‘홍보실장’ 계급이 있는 살가운 고양이까지. 제주의 과거와 오늘날이 공존하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여행의 테마가 뭐에요?”

혼자서 무작정 뚜벅이로 찾아온 손님은 드물었는지, 사장님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오며 질문을 던지셨다. 그냥 발이 가는대로 다니며 누군가 추천하는 장소를 다닌다고 했더니, 눈을 반짝이며 이런저런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거기다 원래 원데이 클래스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데, 예외로 만들기 수업도 진행해주시겠다고 했다.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지만, 분명 따뜻한 인상이었다.

사실 오는 길에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정류장에서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중국인들이 길을 물었는데, 마침 같은 버스를 타게 되었다. 제주 버스는 거리마다 요금이 달라 승차할 때 내릴 정류장을 미리 말해야하는데, 그들은 버스기사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당황하고 있었다. 기사님이 지나치게 화를 내는 모습에 필자마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들 대신 정류장을 검색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기사님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중얼거리셨다. 결국 필자는 크게 당황한 중국인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오지랖이 발동했고, 그들의 짧은 설명을 떠올리며 인터넷으로 길을 알아보았다. 마침내 그들이 가야하는 경로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는데, 홀더에 놓은 커피가 그만 쏟아지고 말았다. 거의 마시지 않은 새 커피였다.

 

 

사실 원래 커피를 마시지 않는 편인데, 하필 우연히 간 카페에서 사장님의 호의로 받은 서비스 커피였다. 그래서 가득 찬 커피를 들고 버스에 탔다가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너무 당황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방을 뒤지며 휴지를 찾고 있는데, 바닥의 커피를 발견한 기사님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정말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지만, 기사님의 화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거칠게 흔들리는 버스에 쭈그려 앉아 열심히 바닥을 닦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 남을 돕는다고 오지랖을 부려서…’하는 생각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몇 번의 사과를 했지만 기사님은 끝까지 거친 말만 뱉으셨다. 분명 불쾌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배출된 감정 덩어리를 그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서러운 마음에 정류장에 앉아 눈물을 훔쳤다. 가득 찬 커피를 받은 것도, 한국말을 할 줄 모르는 중국인들을 만난 것도, 기사님에게 봉변을 당한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도 다 우연이었다. 이 우연들 중 한 사건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겪은 아픔은 쉽사리 회복되지 않았고, 어리석은 후회와 생각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다 이 공방의 사장님을 만난 것이다.

필자는 악몽을 막아준다는 드림캐처를 만들기로 했는데, 예쁜 실로 여러 고리를 만들고 제주 바다에서 주운 조개껍데기와 유리 조각을 붙여 완성했다. 만드는 내내 친절하게 방법을 알려주시던 사장님이 이제 제주 바다 꿈을 꾸게 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그 한마디에 얼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이 드림캐처를 몸에 지니고 있으면 어떤 안 좋은 일도 비껴나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하세요. 혼자 여행하다보면 불안하고 무섭잖아요.”

정류장까지 데려다주신 사장님은 마지막에 명함 하나까지 손에 챙겨주셨다. 든든했다. 오늘은 우연히 겪은 일들, 우연히 만난 사람들로 채워진 하루였다. 공방에 가기 전 애매하게 굶주린 배를 채우려 들른 카페는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었는데, 청소년들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 놀거나 쉴 수 있는 공간이 너무 없어서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전 문학부터 만화책까지 많은 책이 구비되어 있었고, 저렴한 가격에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컵밥과 간식이 가득했다. 단골손님이 많은지 사장님께 아빠라고 부르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고, ‘넌 너이기 때문에 특별해’, ‘항상 널 응원할게’, ‘괜찮아 누구도 멈출 수 있어’ 등의 문구가 계단부터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예민했던 중학생 때나 수험생이었을 때 이런 카페가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운 기분마저 들었다.

문득 그렇게 따스한 카페를 방문했음에도 버스에서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들만 가득했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좋은 공방과 사장님을 만나 금방 기분이 풀어진 것도 참 우스웠다. 이제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낯선 이들이 가득한 게스트하우스 파티에 가야하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하는지에 관해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예민하게 날을 세우고 아무도 상처주지 못하도록 방어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일지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도착한 게스트 하우스는 이미 파티가 시작되어 있었다. 일행끼리 앉지 못하게 한 점이나 적은 양의 술만 구비해놓은 점, 스텝들이 재미있게 끼어들면서 강권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켜보는 점 등등 많은 부분에서 신경을 쓴 티가 났다. 덕분에 조금은 안심하고 사람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없었다. 군 입대를 앞두고 온 사람은 바이크를 타면서 바라본 제주의 풍경을 이야기했고, 혼자 한국을 여행하게 된 교포는 한국의 문화와 분위기에 대한 감상을 들려주었다. 여행 차 제주에 왔다가 게하 스텝으로 머물게 된 사람은 우연히 만난 여행객과의 연애담까지 이야기해주었다. 3일 동안 혼자 고요한 세상에서만 지내다가 왁자지껄한 곳에 있으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았다.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들과 보내는 시간인데도 말이다.

그래, 결국은 사람이다. 어쩌면 모든 걸 두고 제주로 떠나오고 싶게 만든 것도 사람, 내 마음을 움직여서 돕고 싶다는 감정이 들게 한 것도 사람, 따뜻한 호의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아버리게 만든 것도 사람이다. 사회나 사람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쿨하고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나는 사람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힘이 들면 이렇게 도망치면 되고, 상처를 받으면 또 웅크리면 된다.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달큰하게 술기운이 올라 복작복작한 사람들의 말소리도 소음이 아닌 소리로 들리는 밤이었다.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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