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네 새끼나 내 새끼나, 이놈의 새깽이들이 문제랑게, 내가 이참에는 그냥, 아주 그냥 결판을 내고 말 거여.”

“맞어. 그려야 쓴당게. 마음을 그냥 아주 모지락시럽게 먹고 닦달질을 해야 쓴당게. 안 그럼 다 망하게 생겼당게.”

추석이 낼모레라고, 결혼을 못 하거나 안 하고 있는 서른 살 이상 자식을 둔 엄마들이 칼(?)을 갈기 시작했다. 떡집에서는 송편 만드는 엄마들이, 갯마을에서는 조개 젓갈을 담그는 엄마들이, 들판에서는 고추 따고 땅콩 캐는 엄마들이, 언제나 어디에서나, 두 명 이상 모였다 하면 자식들을 성토하고 탄핵하며 칼을 가는 일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 감은 익어가고...

 

“내 자식은 어째서 연애도 못하는 것”이냐고, 결혼 청첩장을 받을 때마다 투덜거리던 아버지들은 이제 그만 포기라도 해버렸는지 자식과 관련해서는 아예 언급 자체를 회피하는 이른바 달관의 경지에까지 이르렀지만, 엄마들은 포기가 안 된다. 포기라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언어도단일 것인가. 다른 그 누가 낳아준 것도 아니고 내가 낳은 내 자식의 불행인데, 불행이 척척척 앞으로 달려오고 있는 중인데 어찌 입을 닫고 있을 것인가 말이다.

그렇다. 그것이 문제다. 불행. 그놈의 불행이 어떻게 생겨 처먹었는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달려오는 것인지 안다고 나서는 사람이 누구 있을까마는 엄마들은 직감적으로 안다. 적어도 안다고 생각한다. 내 속으로 낳은 내 새끼가 결혼을 안 한다면, 혹은 못 한다면, 또는 결혼 따윌 왜 하느냐고 투덜거린다면, 그것은 틀림없는 불행이다. 망조가 들 징조이다. 그래서 칼을 간다.

“그려, 그려. 꼼짝도 못 허게 그냥 딱 잡아서 앉혀 놓고 조근조근, 차근차근, 승질 같은 것은 절대로 내지 말고 잉?”

“아 내가 시방 승질 내게 생겼간디.”

“맞어. 승질도 함부로 못 낸당게. 아이고, 폭폭한 이 가심을 으째야 쓰까잉?”

건들면 깨질 것 같고, 잘못 만지면 날아가 버릴 것만 같다. 아들이건 딸이건, 요즘의 자식들은 어째서 그렇게도 약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말 한 마디도 함부로 못 한다. 내 자식이지만 내 자식 같지가 않고, 어디 멀리서 날아온 무슨 오랑캐 같다. 오랑캐란 무엇이냐. 그 하는 짓이 징그럽고 밉지만 밉다고 말할 수 없고, 그 생각이, 그 세계관이 싫지만 싫다고 말해서도 안 되는, 다만 그저 예쁘다고, 사랑한다고, 열렬히 응원한다고만 말해야 한다.

 

▲ 떡집에서 송편을 빚는 엄마들

 

“아 너는 으째서 남들 다 하는 연애도 못 헌다냐 잉?”

이 한 마디 잘못 말했다가 아들을 잃어버리고, 딸을 잃어버린 부모가 얼마나 많은 세상인데 함부로 입을 놀릴 것인가. 오랜만에 맞이한 명절이라고, 선물 상자 들고 내려온 아들들에게, 딸들에게 결혼이라든가 연애 같은 단어는 금기어가 된 지도 벌써 오래다. 세상사에 귀가 밝은 엄마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기술이 필요하다. 결혼이라든가, 연애 같은 단어가 꼭꼭 숨겨진 말을 기술적으로 잘 골라서 해야 한다.

그러자면 시간이 필요하다. 분위기도 잘 조성을 해야 한다. 서로의 눈을 봐가면서, 사람이 세상을 산다는 것은 어떻고, 세상의 이치란 것은 또 어떻다는 둥,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넌지시 결혼은 필수라고, 그렇게 타일러 보겠다고 다짐을 해보지만, 하지만 그것도 이미 옛날 방식이 돼버렸다는 것을 엄마들은 이미 알고 있다. 엄마가 자식을 불러서 거기 앉아봐, 한 마디만 하면 자식들은 벌써 알아채고 달아날 구실을 들이댄다는 것을, 그 무서운 경험학습을 안 해본 엄마가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 것인가. 결국은 딱히 무슨 방법을 찾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칼을 간다고 열심히 갈았지만, 엄마는 엄마일 뿐 장군이 아니기에 자기가 갈아놓은 칼날을 그저 바라만 봐야 하는 형국이 돼버린 셈이다.

“하이고 이놈의 폭폭한 가심을 으째야 쓰꼬, 으째사 써, 응?”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이렇다. 자기 주먹으로 자기 가슴을 몇 번 때리다가 슬그머니 그만두고 다른 이야기를 찾는 것밖에는, 달리 아무런 방도가 없다. 아들이건 딸이건 모두 짝을 찾아서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자식을 둔 엄마들은 마치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엿듣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함부로 나서서 뭐라고 한 마디 보탤 수도 없는 입장이기에, 그야말로 그 자리에 없는 듯이 있는 듯이 납작 엎드린 자세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혼자서 남몰래 고개나 끄덕거리다가, 기회를 봐서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 나가버린다.

만 가지 병이 다 원인이 있듯이, 결혼을 안 했거나 못 한 자식을 둔 엄마들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것은 사실 결혼을 안 했거나 못 하고 있는 자식 그 자체가 아니다. 자기 자식은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산다고, 틈만 나면 자랑을 해대는 이웃 ‘여편네’들만 아니라면, 결혼을 안 했거나 못 하고 있는 자식을 둔 엄마들이 그렇게도 초조하고 불안해 할 필요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 마당에서 젓갈용 조개를 가는 엄마들

 

한 마디로 말해서, 틈만 나면 자식 자랑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여편네’들은 자식 자랑을 할 소재가 없는 엄마들에게 최대의 적이다. 적은 적이지만 적이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당연하게도, 전쟁 같은 것을 선포하지도 못한다.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 적에 대한 선망이요 부러움인 까닭이다. 도대체 꿀려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꿀려야 하는, 내 새끼 결혼만 시켜준다면 그가 누구든 발바닥이라도 핥아주겠다고 나설 것만 같은 자기 자신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적이라고 생각한 그가 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적인 셈이다.

“아 그 에펜네는 하는 짓이 맨날 개차반이더만, 자식 복은 어디서 그렇게도 옹골지게 얻었는가 몰러어?”

“누구? 이분이?”

“아 몰라서 그려어?”

어느 마을 어느 골짜기에나 주는 것 없이 공통으로 미운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공동으로 한 대 칵 패주고 싶은 사람 또한 있기 마련이다. 우리 동네 옆 동네 엄마들이 항상 부러워하면서 미워하는 사람 중에 대표적 인물이 이분이 엄마다. 이분이 엄마는 친정도 가난하고 시댁도 보잘 것이 없어서 자랑할 만한 것도 당연히 없지만 자식들 하나는 기가 막히게도 신속하게 처분했다. 그것도 하나같이 이십대 중반 그 화창한 봄날 같은 나이에 시집도 가고 장가도 갔다.

그리하여 삼십대가 지나기도 전에 아들 낳고 딸 낳고 할 것 다 해버렸다. 아들 둘에 딸 하나에서 나온 손주가 무려 다섯이다. 게다가 무슨 날이 닥치면 저희들끼리 따로 노는 게 아니라 부모님 곁으로 달려온다. 그것도 떼로 몰려온다. ‘이것’들이 한 번 몰려왔다 하면 온 동네가 떠나갈 듯이 시끄럽다. 그리고 ‘그것’들이 썰물 빠지듯이 빠지고 나면, 이분이 엄마는 양어깨에 날개를 달고 훨훨 온 동네를 날아다니면서 자식들 자랑으로 입에서 게거품이 날 지경이다.

“아이고 내 딸이 말이여, 고것이 말이여 잉. 먹고살기도 바쁜 판에 딸년을 대학까지 보내서 어따 쓰겠냐, 해서 대학 같은 것은 아예 생각도 안 했단 말이거든.”그런데 입시 시즌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딸이 그러더란다. 대학은 안 가겠다고, 그렇지만 시험은 한 번 봐보고 싶다고, 그러니 시험을 보는 데 필요한 돈만 조금, 아주 조금만 달라고, 아버지 모르게 달라고 부엌에 와서 소곤소곤 얘기하는 딸의 그 진정어린 말에 속아서(?) 엄마는 딸이 하자는 대로 남편 모르게 돈을 구해서 딸의 손에 쥐어주었다는 것이다.

 

▲ 지난 여름의 상사화

 

“아 그런디 이 써글년이, 빌어먹게도 떡하니 합격을 해서는 그냥, 한바탕 난리가 나버렸지 않았겄어.”

자식 이기는 부모 없더라고, 결국은 빚을 내서 대학을 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학년부터는 장학금을 받기 시작했고, 졸업도 전에 취직을 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더니, 결혼도 잘해서 지금은 자랑거리가 넘쳐난다는, 그런 요지의 딸 자랑을 이분이 엄마는 정말이지 ‘뻔뻔하게’ 잘도 해댄다. 자식들이 한 번 왔다 갈 때마다 그런 자랑을 반복적으로 해대니, 일 년이면 적어도 일곱 번은 같은 얘기를 들어야 하고, 그렇다 보니 동네 사람들은 이제 이분이가 자신의 딸처럼 느껴질 지경이 돼버렸다. 그래서 친근하긴 하지만, 그렇지만 밉다. 싫다. 칵 때려주고 싶다. 어째서 저 혼자만 그렇게 잘되고 말았는가 말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근엄이 엄마는 속이 상해도 너무 상해서 정말로 그냥 가슴이 썩어문드러질 지경이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은, 아들 하나에 딸 하나를 두었으니, 그 얼마나 훌륭한 조합이던가. 부부가 여자 하나 남자 하나이듯이, 자식도 그렇게 딸 하나 아들을 두었다고, 이런 기막힌 재주 있는 사람 나와 보라고 큰소리치기를 얼마나 했던가 말이다.

그랬다.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부모의 가슴을 자랑스럽게 해준 자식들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세상천지 어디에도 없는 보물 같았다. 그래서 꾸중 한 번 안 했고, 방청소 한 번 시켰다. 다른 애들 다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된다고 다짐하고 타이르기를 몇백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학교도 서울대학은 비록 아니지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보냈고, 대학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대학원까지 보냈다. 그 바람에 논을 팔고, 밭도 팔았지만 까짓 하나도 안 아까웠다. 보물 같은 자식들을 위한 건데 아까울 이유가 뭐란 말인가.

한 마디로 말해서 자신이 만만한 세월이었다. 그런 세월이 꿈결처럼, 아니 화살처럼 흘러가 버렸다. 그리하여 딸내미는, 벌써 마흔 살이 넘어버렸다. 미칠 노릇이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시집도 안 간 처녀가 마흔이라니. 이게 뭐냔 말이다. 이놈의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렇게도 이상하게 돌아간단 말이냐. 하지만 근엄이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한다. 집에서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기를 밥 먹듯이 하지만, 밖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마치 아무 일 없는 듯이 태연하고자 안간힘을 쓴다. 그래야만 한다. 그게 무너지면, 그 순간 세상도 무너진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까닭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

 

▲ 고창의 꽃무릇

 

근엄이 엄마의 그런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웃사촌 다정이만정이 엄마도 침묵에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한참 재미나게 웃고 떠들다가도 자식 얘기만 나오면 입을 꾹 다물고 파리 먹은 두꺼비처럼 눈이나 끔뻑끔뻑하는, 가끔은 아랫입술을 씰룩씰룩해서 금방 울어버릴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다정이만정이 엄마는 딸이 둘이라 해서 가끔 ‘딸딸이엄마’라 불리기도 한다. 그녀는 딸들이 아직 마흔 살을 넘기지는 않았지만 곧 넘기게 돼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뭔놈의 가시네 허벅지가 내 허리통만이나 해가지고는 그냥, 뭐라는 줄 알어? 결혼 따위는 자기 프로그램에 없대여. 헛 참 내 기도 안 막혀서.”

그 뒤에 나오는 혼잣말이 “내가 저를 어떻게 키웠는데”다. 첫 아이로 딸을 낳고 보니 세상에 둘도 없는 공주라도 얻은 기분이었더란다. 공주의 이름을 다정이라고 지었다. 처음에는 그 이름이 그저 좋을 뿐이지만 차츰 의구심이 생겼다. 여자가 정이 너무 많으면 안 좋은 거 아닐까? 혹시 헤프다는 뜻으로 오해라도 받으면 어떻게 하지? 의문과 불안으로 잠못 이르는 밤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렇지만 다정이란 이름을 버리고 싶지 않아서 그대로 유지하던 중에 또 임신이 됐고, 또 딸을 낳았다. 둘째 딸 이름을 만정이라고 짓고 나니, 자연스럽게 다정이만정이가 돼서 비로소 안심이 되더란다. 듣는 사람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서 어리둥절하지만, 어쨌든 다정이만정이 엄마는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게도 애면글면 딸을 키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결혼은 관심사항이 아니라는 얘기가 딸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이게 대체 뭔 빌어도 못 먹을 유행이란 말인가.

“우리 딸이 연애를 시작했다는 소식만 들려도 내가 돼지 한 마리 내겠다.”

근엄이 엄마가 오랜만에 한숨처럼 한 마디 하신다. 이웃사촌 다정이만정이 엄마도 오랜만에 한 마디 하신다.

 

▲ 대추도 익어가고

 

“나는 우리 딸이 선을 보겠다는 얘기만 해도 돼지 한 마리 내겠다.”

“하이고 지랄도 해싼다. 나는 내가 시집가서 딸이라도 낳아봤음 좋겠다.”

“오메메, 이 에펜네 좀 보소. 시집가고 자픈가 보네 야?”“시집인들 못 갈까. 우리 딸 둘 중에 하나만 누가 치워줘도, 내가 그냥 아침마다 날마다 문안인사 여쭙고, 청소다 빨래다 다 해주겠다 이 말이제.”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대추도, 감도, 논바닥에 널려 있다시피 한 나락까지도,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다 풍성하기만 하고, 자식들이 오면 차에 실어주려고 말리는 고추도 태양빛에 쨍강쨍강 소리가 날 정도로 잘 말라가고 있건만, 오직 하나 사람만이 빈한하다. 사람 세상에서 사람은 왜 이리도 나날이 왜소해져 가는가. 제아무리 오래 산다 해봐야 기껏 백 년 미만밖에 안 되는 사람이, 그토록 짧은 생명을 갖고 태어난 사람이 왜, 어째서 짝을 못 이루고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술 먹고 혼자서 뒹굴며 기어가는 방식의 생을 선택해야만 하는가 말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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