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신라 고도 경주 샅샅이 훑기-2편/ 구혜리

엄청난 역사적 가치 지닌 보물단지

오릉을 비롯해 경주 여기저기 버젓이 자리 잡은 커다란 왕릉들은 단순한 무덤을 넘어 사실 엄청난 역사적 가치를 품고 있는 보물단지랍니다. 일제강점기 도로 사업 등의 과정에서 한 왕릉의 해체작업 중 우연히 발견된 것은 금관을 비롯하여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금으로 치장한 신라왕의 모습이었습니다. 화려한 유물에 일제히 놀라 일본은 발굴 작업에 착수했고 파는 곳마다 일제히 금관들이 나왔다고 합니다. 특히 광복 이후 한국은 황남지역 일대의 발굴 작업을 놓고 가장 크다고 붙은 이름의 황남대총을 파기 이전에 연습 삼아 작은 왕릉을 발굴했는데요, 그 안에서도 똑같은 세트의 유물이 나왔고, 천 마리의 말이 그려져 있다하여 그것이 익숙히 알려진 천마총입니다.

 

 

그러니 경주시내에서 가장 큰 고분으로 알려진 황남대총은 어땠을까요? ‘국립경주박물관’의 역사관에 비치된 황남대총에서 발견된 출토품의 규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황남대총은 두 고분이 쌍으로 묶인 모양으로 북분과 남분 중 남분은 왕으로 추정되는 남성의 유골이, 북분에서는 그의 부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유골이 나왔습니다. 특히 여성의 금관은 순도 100퍼센트의 금이었던데 반해 남성의 금관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과 남성이 차고 있던 허리띠에 ‘부인대’라는 글씨가 쓰여 여성에 대한 남성의 애정이 무척 각별한 사이가 아니었나 하는 애틋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그러나 아직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군지는 밝혀지지 않아, 이 애절한 사연을 듣고 있던 저희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다시, 불국사를 만나다

경주에서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아침 6시 일찍이 여정을 나왔습니다. 나올 때 어스름하던 새벽하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밝아져왔고, 자욱한 안개 사이로 햇빛이 새어나왔습니다. 이른 시간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 가장 먼저 불국사로 향했습니다.

매표소는 이제 막 개점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학창시절 빼곡한 버스 대열 사이로 두세 줄씩 대기하곤 했던, 수학여행 단골 코스인 불국사 입구가 텅 비어 있으니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이 시간에는 발길이 적은 탓에 입구에서 불국사 본토로 올라가는 산길이 한적했습니다. 이따금씩 아이들을 데려온 부부와 노부부를 만나 인사를 나눴습니다. 산길을 걷다보니 옅게 향 내음이 밀려왔습니다. 오랜 역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염원 담아 태워온 이 향에 오늘은 누구의 어떤 염원이 담겨 있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불국사는 731년 신라 경덕왕 때 재상 김대성에 의해 발원, 개창되어 774년 혜공왕 때 완성됐습니다. 1593년 임진왜란 때는 의병의 주둔지로 이용되었고, 그 탓에 일본군에 의해 목조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고, 현재의 모습은 대대적인 복원을 거쳐 갖춰진 것입니다. 불국사는 774년, 완전한 삼국 통일이 이뤄진 676년 이후 약 100년이 지난 뒤에 완공된 절입니다. 그 배경에는 삼국통일로써 부강한 국가의 모양을 차리고 왕건을 공고히 하기 위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불가 불, 나라 국, 절 사의 이름처럼 화려하고 장엄한 부처의 나라를 세워 찬미하던 수도자들이 불도를 닦던 곳, 풍부한 상상력과 예술적인 기량이 어우러진 신라 불교 미술의 정수. 오랜 세월동안 높은 터에서 이 땅의 역사를 바라보고, 또 고스란히 몸에 담아 불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해 현재의 모습으로 보존된 우리 불국사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고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되었습니다.

 

로마 다음으로 오랜 역사

불국사에서 약 5km 떨어진 사원에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석굴암과 정윤화 해설사님이 계셨습니다. 정윤화 선생님은 경주 문화유산의 가치를 직접 증명해보이기 위해 아시아 각국의 나라를 비교하며 답사하신 경험으로 유쾌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곳 석굴암은 조선시대부터 불린 이름으로 원래는 별도로 돌로 만든 사원이라고 해 석굴사로 불렸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신라시대 때 만들어진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정확한 시기를 알고 계신가요? 조선왕조 500년을 뛰어넘는 천 년 역사의 신라는 지구상에서 나라로서 가장 오래 버틴 로마 다음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졌습니다. 재밌는 암기법 한 번 따라해 볼까요? 팔을 들어보세요. 팔을 들었으니 손가락도 8을 표시해보시구요. 자 신라 천 년 역사 중에 그 8을 빼면 됩니다. 그렇죠. 신라는 정확하게 992년. 그 긴 세월동안 통치한 왕도 많았습니다. 왕이잖아요, 엄지손가락을 펴볼까요? 손가락을 왼쪽부터 차례대로 세면 엄지손가락은 몇 번째죠? 그렇죠. 5,6. 그래서 신라왕은 992년 동안 56대나 있었답니다.

 

 

그 중 삼국통일은 이룬 왕은 3에 0을 붙이면 쉽습니다. 바로 문(文)과 무(武) 양자에 능통한 신라 30대 문무왕입니다. 그러나 한 나라도 아닌 삼국을 통일하기까지 얼마나 험난한 과정이 있었을까요? 신라는 먼저 김춘추 660년에 백제를 통합하고, 30대 문무왕이 재위한 뒤 고구려를 치는 데 무려 8년이나 걸렸습니다. 이때 막강한 고구려를 통일하기 위해 당나라와 손을 잡습니다. 그러나 이 나당 연합에 의한 고구려 통일을 삼국통일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매초성 전투의 나당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676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한 삼국통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굴암, 그 정교함

우리나라 ‘감정평가사’라는 직군에서는 소위 우스갯소리로 ‘이제 믿을 건 통일밖에 없다’고 하는데요, 국가 간에 통일을 이루면 국부가 증진합니다. 신라도 마찬가지로 가장 부유한 시절은 모두 삼국통일 이후입니다. 그래서 현존하는 문화유산의 대부분은 약 700년대 35대왕 경덕왕 때 해놓은 것이 많습니다. 불국사와 석굴암.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세계종 등 당시 신라의 모습은 굉장한 경제 파급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이 굶주리면 종교고 왕권이고 눈에나 찰까요. 반란이 일어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불국사가 수많은 노동력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토착 신앙 중심의 귀족 세력을 치고 왕권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함도 있지만 바로 백성들이 굶주리지 않고 힘을 쓸 수 있던 경제적 여건에도 있답니다.

 

 

석굴암을 보기 위해서는 또 다른 산을 올라야 합니다. 막상 힘들게 산을 올라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의 석굴암을 보고 실망한 외국인의 모습도 보입니다. 우리도 어릴 적 비슷한 경험이 다수 있지 않았나요? 관광객이 볼 수 있는 거라곤 칠판 정도 크기의 유리창 너머 보존된 본존불의 모습이 고작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그럼에도 이 작은 규모의 관광지가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건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의 석굴이 작은 규모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위산보다 상대적으로 흙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과 관련지어 고려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커다란 바위 하나를 끌어안은 바위산은 찾기 어렵죠. 그러나 불교의 나라를 꿈꾼 김대성은 그가 세운 신라의 비전을 위해 석불사를 짓기로 합니다. 그래서 바위산 대신 돌을 직접 조각조각 깎고, 또 직접 돌끼리 붙여 만든 석굴. 천 년의 역사를 지나 무딘 지진에도 굳건히 견뎌낸 사원. 그것이 바로 석굴암입니다. 또 강한 토함산의 습기에도 불구하고 이끼 하나 없이 발견된 것과 예불을 위해 위로 갈수록 본존불의 비율을 크게 만든 것은 옛 신라인의 미세한 수치 계산, 정교한 건축 기술 없이는 불가능했던 것이기에 대단한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대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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