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산을?”
“네가, 산을?”
  • 류승연 기자
  • 승인 2017.10.31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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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류승연의 아주머니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깜짝 놀란다. “네가, 산을?” 벌레공포증이 있고, 조금이라도 경사진 곳은 걸으려 하지 않는 내가 온갖 벌레들의 집합소이자 오르막 천지인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는 건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운 일이다.

산을 다니기로 한 건 아들 때문이다. 발달장애인 아들에게 등산만큼 좋은 감각통합 치료가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부부 모두 산을 좋아하지 않아서, 아니 등산을 싫어해서 할 일 없는 주말에야 간신히 동네 뒷산을 오르곤 했었다.

그랬던 우리 부부였는데 두 달 전부터 매주 산을 의무적으로 다니기 시작했다. 7살에 신청해 2년 넘게 대기 중인 감각통합 치료실에선 아직도 연락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다, 더 늦기 전에 아들에게 필요한 자극을 직접 제공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 사진= pixabay.com

 

산. 생각하면 한숨이 나온다. 그 힘든 오르막은 둘째 치더라도 날아다니고 기어 다니는 온갖 벌레들이 드글드글 할 게 뻔했다. 처음부터 무성한 나무가 진을 친 곳에서 등산을 시작하면 내가 먼저 못하겠다고 손사래를 칠 것 같았다.

산이 아닌, 산책로의 형태를 띤 남산 주변의 둘레길부터 시작을 했다. 잘 다듬어진 넓은 산책로는 벌레공포증 환자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화장실에서 꼬물거리는 애벌레를 한 번 마주치긴 했지만 산책로에선 벌레와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다람쥐와 청설모를 보는 재미마저 쏠쏠했다.

무엇보다 포장된 길이 걷기가 편해 아이들이 좋아했다. 아들은 앞으로 쭉 뻗은 넓은 길을 보자 무조건 달리기부터 시작했다. 아들을 따라 남편과 나, 딸도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넓은 산책길을 질주하는 네 식구. 웃음이 절로 나고 숨도 찬다.

남산 둘레길이 좋은 건 산책이 끝난 후 남산 왕돈까스와 비빔밥, 우동 등으로 끼니를 때우고 올 수 있어서다. 마침 산책로 옆에 유명한 음식점이 있으면 가서 먹어주는 게 또 예의 아닌가! 결코 밥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사실 밥하기 싫은데 부담 없이 먹고 올 데가 있어서 좋았다는 건 비밀!)

남산을 정복하고 나자 한 단계 수준을 올린다. 이번엔 서대문에 있는 안산 둘레길에 도전이다. 안산 둘레길은 나무로 둘러싸인 잘 정돈된 평지를 걷는 느낌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산책코스가 아이들 걷기에도 좋을뿐더러 나무를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어 뭔가 좀 더 등산을 하는 듯한 만족감이 있다.

이곳도 아이들이 무난히 소화를 하자 본격적으로 북한산 등반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북한산은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런데 우리 부부가 등산을 얼마나 싫어했던지 결혼 11년차인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북한산에 가 본 적이 없다. 신혼 때 둘이 살을 빼겠다고 수영도 함께 다니고 걷기운동 하겠다고 청계천도 찾아다니고 했었는데 그 때 주말마다 북한산만 부지런히 다녔어도 지금의 몸매가 되지는 않았으리라.

어쨌든 아들 덕분에 북한산도 와보고. 출세했다 우리.

입구에 도착하니 산 냄새가 물씬 난다. 온 몸을 자극하는 피톤치드에 기분이 좋아지려 하는데 아들이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를 감지했나 보다. 입구에서부터 주저앉아 안 들어가겠다고 버틴다.

주저앉아 떼쓰는 건 좋은데 그래도 어느 정도 산을 오른 뒤 중간쯤에 그래야 하지 않지 않겠니? 입구에서부터 그러는 건 너무 염치없다 얘.

결국 남편이 아들을 업는다. 본격적인 등산을 위한 오르막길 전까지 아들을 업고 안으로 들어간다. 자. 눈앞에 오르막이 보인다.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다.

딸은 의외로 잘 오른다. 몸이 가벼우니 몸에 따르는 부담도 적은가 보다. 나는 요즘 부쩍 찐 살 때문에 다이어트를 할 각오로 무거운 걸음을 옮긴다. 평소 운동량이 많은 남편은 걱정할 필요가 없고 문제는 아들이다. 3m 걷다 말고 잉잉대고, 5m 걷기도 전에 징징대며, 10m 가기도 전에 주저앉는다.

오르막을 오르는 것도 힘이 드는데 아들을 어르고 달래고 잡아끌며 가자니 더 죽을 맛이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아들을 보며 모두 한 마디씩 건넨다.

“어이쿠, 벌써 주저앉으면 어떡해! 어서 일어나. 아직도 갈 길 멀다!”

사람들의 관심에 대항이라도 하려는 듯 아들이 “아갸갸갸~”하며 짜증 섞인 외계어를 발사하면 사람들은 그제야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감지하고 어색하게 제 갈 길을 간다.

북한산 등반 첫 날은 왕복 한 시간의 코스를 마무리하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아들이 주저앉아 버틴 20여분을 빼면 실제 등산시간은 현저히 줄어든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이상하게 배는 또 고프다. 괜히 산 밑에 오니까 막걸리도 한 잔 먹어줘야 할 것 같다. 고양이가 생선가게 그냥 못 지나가듯 우리도 홀린 듯 막걸리를 찾아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남편과 나를 위해선 도토리묵 무침에 막걸리를, 아이들을 위해선 감자전과 칼국수를 시켰다.

그것도 등산이긴 등산이었나. 막걸리 첫 잔을 완샷하는데 찌리링~하고 전신에 취기가 오르는 게 느껴진다. 오호~ 등산 후 마시는 막걸리의 즐거움이 이런 것이로구나. 나보다 더 그 순간을 즐기는 건 남편이다. 막걸리 한 병을 빠르게 비우더니 한 병을 더 주문한다. 등산 후 마시니 취기가 빨리 오른다며 걱정했더니 문제없다고 호언장담한다.

문제가 없기는 개뿔. 막걸리 두 병을 마시고 난 남편은 “아~ 지금 기분은 1:10으로 붙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아”라며 실실거린다. 등산은 고작 한 시간밖에 안 했는데 남편이 대낮부터 뻗어버려서 주말 오후의 애보기가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 되어 버렸다.

다음 주말이 되었다. 남편은 일주일 전 마신 막걸리의 추억이 좋았던지 다시 북한산을 가자고 한다. 나는 그냥 남산이나 가자고 하는데 남편은 물러섬이 없다. 아들을 위해서 북한산을 가야만 하는 이유를 줄줄이 나열한다. 흥! 막걸리를 위해서가 아니고?

어쨌든 또 다시 북한산으로 고고. 이번엔 오르막길이 아닌 그 옆의 둘레길 형태를 띤 곳으로 코스를 바꾼다. 연속된 오르막이 아닌 오르막내리막이 반복되고, 오솔길의 느낌이 나는 흙길도 있고, 나무로 만든 계단도 지나고 등 다양한 형태의 자극이 많은 곳이라 그런지 아들도 저번보다 잘 걷는다.

더 쉽고 재미난 코스라 아들한테는 좋은데 반대로 딸과 나는 여기저기서 소리를 지르느라 바쁘다. 수시로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온갖 벌레들 때문이다. 나는 벌레공포증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오는 반응인데, 딸은 벌레에 놀라는 엄마를 보고 자라며 배운 학습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래도 그렇게 산을 찾아다니며 가족 모두가 주말마다 다니는 등산에 서서히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 남편은 등산 후 마시는 막걸리에 적응을 했다. 저번엔 도토리묵, 이번엔 손두부 등 안주만 바꿔가면서.

산에 다니기 시작하니 좋은 점도 보이기 시작한다. 일단 ‘고요함’이 너무 좋다. 차 소리, TV소리, 웅웅거리는 대중의 소음이 없는 적막한 고요가 너무나 마음에 든다. 고요함 덕분인 걸까? 일상에서 느끼는 피로감이 씻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

온 몸에 퍼지는 나무의 냄새도 좋고, 바람에 스치는 나뭇잎의 솨아아~ 소리를 듣는 것도 좋다. 일상에서 벗어난 휴식 같은 느낌이다.

등산을 하는 동안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좋다. 오로지 눈앞의 길과 옆의 사람만 있는 공간에선 대화 말고는 다른 할 게 없다. 덕분에 남편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딸의 학교생활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된다. 아들도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좋았으리라.

몸이 건강해지는 건 딸려오는 보너스 같은 것이다. 남편과 나는 등산 후 마시는 막걸리 때문인지 다이어트에 특별한 효과는 보지 못하고 있지만 아마 우리도 모르는 새 체력은 더 좋아지고 있을 것이다. 등산 후 종아리가 아프다는 딸을 보니 아이들의 근육도 튼튼해지고 있는 것 같다.

아줌마, 아저씨들이나 산을 좋아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도 아줌마고 남편은 아저씨다. 산을 좋아해도 될 자연스러운 나이가 된 것이다.

비록 산을 찾게 된 계기는 아들 때문이었지만 이제 계기 따위는 중요치 않다. 마침 벌레들도 제 살 길을 찾아가는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벌레 없는 겨울 산. 더욱 적막한 고요함만이 낮게 깔릴 겨울 산. 아이들 목에 목도리를 돌돌 동여매고 겨울 산을 다닐 생각에 살짝 설레기도 한다.

<주부, '아주머니'는 아직은 주인공이 아니지만 머지않아 니가 세상의 주인공이 될 얘기를 가리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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