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
여백

“모다들 강한게 살았제”

<전라도닷컴> 강변에 사람꽃-장에 가는 길 전라도닷컴 남인희·남신희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1.14 13:55

크게

작게

메일

인쇄

신고

내 걸음으로만 사는 세상이었다.

젊어서 나무장사를 한 박대순(80·임실 덕치면 천담리 천담마을) 할아버지는 장날이면 순창장까지 40리 길을 숱하게 걸어다녔다.

“여그 천담은 강이 삼면을 싸고 있응게 배를 타고 건네거나 산질로 돌아가. 그전에는 순창장을 많이 봤어. 한 40리 질이여. 일중리로 걸어나가서 구질로 산질을 넘어서 돌아가. 질이 먼게 가다 묵을라고 밥을 싸갖고 가. 벌컥한 보리밥이나 죽이나 그런 것을 갖고 가.”

 

▲ 내 걸음으로만 사는 세상을 살았던 이들에게 장날 장터로 가는 길은 멀었다. 그래도 집을 나설 적 짐이 무거워야 맘이 가벼웠다.

 

나무는 마을에서부터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니었다.

“순창하고 임실 경계선 요짝에 산이 있어. 거그 깔재 밑에서 히갖고 가. 연장 갖고 가서 비어서 장작 패 갖고 짊어지고 가. 도치는 거그 뒀다가 올 때 챙겨갖고 와.”

장작을 머리 위로 높이 짊어지고 장에 가서 팔면 명태 두 마리는 사갖고 올 수 있었다.

“빈 지게 짊어지고 짓꼬닥(지게 꼭대기)에 맹태(명태) 두 마리 달래달래 걸고 돌아와. 전에 맹태가 아무리 싸다고해도 그 나무짐이 맹태 두 마리 금(값)배끼 안 나와. 맹태 두 마리 갖고 돌아올라문 허망허지. 허지만 그것도 나무해갖고 장에를 갔다 왔응게 묵지. 안글문 맛도 못 보잖여.”

명태는 두 마리인데 식구는 많았다.

“한 덤뱅이씩이라도 국그륵에 떠서 나놔 줄라문 아조 조심해서 낄애. 지푸라기로 생맹태 배를 감아.터져불문 안된게. 정제서 국 뜰 때사 지푸라기를 풀고 떠줬어.”

애비의 나무짐 한 단으로 바꿔 온 명태 두 마리는 도래밥상에 둘러앉은 식구들 얼굴을 그리 환하게 하였다.
 

집 나설 적 짐이 무거워야 맘이 가볍고

순창 적성면 석산리 도왕마을 서옥자(84) 할매는 열일곱에 이 산골로 시집을 왔다.

“첨에는 이러코 째깐헌 동네서 애가 터져서 하래도 못살겄다 했어.”

그러나 심궈논 자리에서 팥이 나고 콩이 나듯이 가매에서 발을 내린 그 자리에서 한 생애를 살아냈다.

장에라도 갔다오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콩 같은 것 밤 같은 것 히갖고 두 말썩을 이고지고 가. 여그 사람들은 잘지고 잘 이어. 보에다 꽉 싸갖고 띠방을 꽉 짼매갖고 보따리 단속을 야물게 허제.”

남자들은 한 가마니씩을 지게에다 지고 갔다. 찻길 있는 데까지 지게로 져다 주는 사람도 있어서 밤 한 가마니 짐 삯으로 5천원을 건네기도 했다.

겨울에도 고무신을 신고 미끄러운 까끄막을 올라 다녔다.

“그때는 신발바닥 닳아진다고 맨발로 고개를 넘어 댕기는 사람도 있다고 했어. 양발이 어디가 있어. 그렇게 애낄라고들 애를 씀서 살았어. 모다들 강한게 그 시상을 살았제.”

그때는 젊었다. 가다 쉬고 가다 쉴망정 집을 나설 적 짐이 무거워야 맘이 가벼웠다.

장사를 시작한 것은 마흔 살 무렵이었다.

“우리 시어마니 친정이 시롱(세룡)이여. 재 너매 시롱. 거그를 지내서 장에를 간디 장에 간게 시롱 어매들이 장사를 헙디다. 내가 시외가집에 가서 외사촌 동서보고 그랬어. ‘어야 나 좀 딜고 가봐. 나도 한번 가보고자와’ 긍게 동서가 그래. ‘성님 뭐더게 헐라 그래라우. 허문 자꼬 허고자운디.’”

그 말을 안 듣고 ‘고상질(고생길)’에 기어이 들어섰다.

“광주로도 가고 목포로도 가고. 목포 가문 나 모른 사람 없었어. 골목골목 다 우리집 사람들 맹기여. 해남 완도 진도같은 디도 갔어. 장에서 곶감 같은 것을 백 접이나 사갖고 딱 부쳐불어. 글고 차 타고 가서 찾아갖고 싹 팔아. 장에서도 팔고 개인집으로 댕김서도 팔고. 보따리에다 싸갖고 가방에다 너갖고 이고지고 댕겨.”
 

‘못쓰게 사는 사람’으로 살지 않으려는 걸음

“애기들은 쫄막쫄막헌디 내가 장으로 돌아댕긴게 우리 큰 딸이 참 애썼어. 우리 시어마니 돌아가실 때 큰딸이 일곱살이었어. 애기를 업혀노문 저도 못걸어간디 비척비척 업고 가다가 애기를 내부쳐불어. 그러문 그 머시매가 강그라지게 울어. 귀헙게(귀하게) 난 놈을 내부첬다고 한압씨(할아버지)가 야단을 허제.”

큰딸은 저녁이면 동산에서 어매가 언제 온가 애기를 업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시방 생각해도 그 눈이 순해갖고 그러고 서 있던 그거이 그리 짠해.”

먼 데로 나가면 사흘은 걸려야 돌아오기도 하는 장사였다.

“고놈 다 팔아야 온게. 그때는 외상도 많애. 많이 덜 받았어. 뭐 어쪄. 돌아댕개 보문 이 시상에는 존 사람이 더 많애. 나쁜 사람은 어쩌다 한나씩 드물게 있어. 나만 존 맘 묵고 살문 되야. 내가 넘한테 덕을 주고 살고 잡제, 넘에 덕을 볼라고 허문 못써. 그런 것이 못쓰게 사는 것이여.”

어매는 세상 속을 다니면서 어느 하루도 ‘못쓰게 사는 사람’으로 살지 않으려고 걸음한 덕에 3남3녀를 키워냈다.

“나는 신세한탄 안혀. 평생 혼차 참은 것이 습관이 들었어. 나는 엄살 안혀. 나 혼차 꿍꿍 앓다 말아. 내 속에 든 짐을 누구한테 맽겨?”

글 남인희·남신희 기자 사진 박갑철 기자·최성욱 다큐감독

 

 

 

<저작권자 © 위클리서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인기기사

기사 댓글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최대 400byte

숫자를 입력해주세요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합니다.
여백
회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주)뉴텍미디어그룹  |  등록번호 : 서울다07108  |  등록일자 : 2005년 5월 6일
발행인 겸 편집인 : 정서룡  |  발행소 : 서울시 종로구 난계로 29길 27(숭인동) 동광 B/D 2층
전화 : 02-2232-1114  |  팩스 : 02-2234-8114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리
Copyright ©2005 위클리서울. All rights reserved.   |  master@weeklyseou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