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것들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국민 노릇하기
나쁜 것들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국민 노릇하기
  • 김수복 기자
  • 승인 2017.11.16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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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헌 집 두고 새 집을 지으며-첫번째

대통령 박근혜의 행태가 매우 변태스럽다 싶을 즈음 시작한 새 집 짓기가 벌써 일 년을 훌쩍 넘어 이 년이 다 되어간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태산처럼, 하루도 멈추거나 중단함이 없이, 몸이 너무 아파서 드러눕지 않는 한 날마다 조금씩 한 뼘이라도 꾸준히 쌓고 또 쌓고 맞추며 발라 가노라면 어느 날 홀연 집이 되어 있을 거라는 믿음 하나로 시작한 일이었다.

내 힘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자재를 구입하는 비용 외에는 가능한 한 돈을 쓰지 않고, 다른 이의 생각이나 힘도 빌리지 않는, 오직 내 머릿속 생각을 손으로 구현해 내는 방식의 이를테면 지구상에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집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은 오래 전에 세워져 있었다. 오래 전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나도 모른다. 친박이다 비박이다, 왕박이다 떼박이다 하는 등등의 괴상한 용어가 난무하던 시절 그때 언제인가 그런 생각을 했고, 장소도 정한 것만은 분명하다.

 

▲ 이것은 집이 아니다.

 

이름도 그때 지었다. 완성은커녕 시작도 하기 전에, 기초도 놓기 전에 이름을 먼저 지었으니 건방을 떨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묶는 밧줄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말하자면 배수의 진 같은 것을 쳐본 것일 뿐이었다.

밧줄이라도 없다면 내 몸이 내 생각과는 거의 무관하게 아무 데로나 마구 뛰쳐나갈 것 같았다. 미친 듯이 뛰쳐나가서 무슨 짓을 저질러댈지 알 수 없었다. 이놈의 나라가 바야흐로 나쁜 것들의 천국이 돼 버렸구나, 죽어라 죽어, 하고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써가며 식칼 같은 것이라도 마구 휘둘러댈 것만 같았다. 잡아야 했다.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남은 생을 하루라도 자유롭게 살자면 내가 나를 묶어서 가둬야만 했다.

그런 생각의 끝자락에서 한 채의 새로운 집을 짓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 집에 대한 이름이 지어졌다. 그때 나온 이름이 사뭇 거창해서, ‘내 무덤’이었다. 내가 스스로 내 무덤을 만들어서 그 안에 나를 집어넣는다는 비장한 생각이었다고 하면 말이 조금은 될 것이다.

아무에게도 나의 그런 생각을 말하지는 않았다. 나 혼자 속으로만 내 무덤이다,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그러던 어느 하루 무덤보다는 감옥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고민에 빠졌다. 무덤이냐 감옥이냐, 무덤이 좋으냐 감옥이 좋으냐, 그런 다소 유치한 선택의 문제로 고민하던 나는 끝내 그 둘을 다 취하는 절충을 하고 말았다. 내 손으로 지은 감옥에 앉아 숨을 쉬다가 더 이상 숨쉬기를 못 하게 되면, 그때 마침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죽은 채로 마르고 굳어 미라 같은 것이라도 된다면, 그 자체가 무덤일 텐데 굳이 감옥이냐 무덤이냐 따질 필요가 뭐냐 하는 일종의 ‘대발견’을 한 것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내 나이 마흔을 넘어서서 몇 년인가 흐른 시기의 어느 날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마흔 살 이전까지는 세월이 매우 천천히 게으르게 마치 그 자리에 멈춰서 있는 것처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밋밋하게 흐르고 있었던 까닭에 딱히 무서운 것도 없었고, 무서워 할 대상도 없었다. 그런데 마흔 살을 넘은 어느 시점에서인가부터는 세월이 매우 빠르게 마치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급류처럼 흐른다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쉰 살을 넘어 예순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 내가 짓는 나의 감옥

 

야 이것 참 뭐냐 이거. 큰일났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이냐 죽어 있는 것이냐.

그런 느닷없는 생각이 마치 뒤통수를 치고 들어온 돌멩이처럼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내 생애 처음인, 너무나 낯설고 어리둥절해서 무섭기조차 한, 숨을 쉬기도 어렵게 무거운 질문 앞에서 나는 간신히 눈이나 깜빡거리는 세월을 한참이나 보내야 했다.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리기를 얼마나 했는지, 아직도 생의 의미를 못 찾고 어리둥절해 있는 아들이 불쌍해 보였던 것일까. 공부를 좀 더 해야 한다고 채찍질이라도 하듯이 어머니가 중증치매 진단을 받았다.

‘중증’이라는 표현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게, 어머니는 아들을 오빠오빠 우리오빠,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내 뒤를 졸졸 따르는 참으로 진귀한 장면을 하루에도 몇 번씩 연출하는 것이어서, 나는 웃었다가 울었다가 데굴데굴 구르는 등 어쩔 줄 몰라 하는 방식으로 천천히 조금씩 미쳐가야만 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아주 미쳐버리도록 놔두지만은 않았다.

“어매, 어째서 저 사람이 대통령이까?”

“응? 뭔 소리여?”

“아이 내가 노무현이를 대통령으로 뽑았단 말이여.”

어느 하루 텔레비전을 보던 중에 문득 중얼거리는 어머니의 한 마디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머니 당신은 대통령 선거 때 노무현을 찍었고, 그래서 당선까지 됐는데, 그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는데, 그런데 어째서 이명박이 대통령 자격으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것이냐고 하는, 시공간을 뛰어넘는 어머니의 그런 놀라운 문제제기에 나는 일순 긴장해서 눈을 깜빡거렸고, 슬프게 웃었고, 그리고 아하 하고 탄성을 질렀다.

중증치매 진단을 받아놓은 어머니가 보기에도 이명박은 대통령 그릇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통령 깜이 아닌 자가 대통령을 짓을 하는 사태가 어째서 가능한 것인지,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잇달아 갸웃거리며 눈을 깜빡이는 어머니를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 간식으로 새우를 까 드시는 나의 엄마

 

내 나이 그때 스물세 살, 그야말로 팔팔한 청춘이었더랬다. 내가 하고자 하면 무슨 일이든 다 이뤄질 것만 같았다. 그래서 결심한 생각 하나가 이른바 사법고시라는 것을 봐서 검사가 되자는 것이었다. 검사가 돼서 양아치 넝마들을 모조리 잡아가두자는 것이었다. 검사가 되자면 법률공부를 해야 하고, 법률공부를 하자면 학원을 다녀야 하고, 학원을 다니자면 돈이 있어야 했다.

돈이야 뭐 까짓 거 벌자면 못 벌겠는가. 물론 지저분한 돈이어서는 안 된다. 깨끗한 돈이어야 한다. 깨끗한 돈은 어디서 나오는가. 노동이다. 그리하여 나는 노동 중에서도 상노동이라고 하는 일명 ‘노가다판’에 뛰어들었다. 하루는 ‘노가다’를 하고, 하루는 학원에서 헌법이니 형법 따위 강의를 듣겠다는 뭐 그런 영악한 계산이었다. 그런 계산으로 시작한 나의 '노가다’ 인생 첫 현장이 하필 남산의 중앙정보부 신축 공사장이었고, 그곳에서 인간이 인간에게 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일들을 너무도 많이 목격해 버렸으니, 지금 생각하면 내 머릿속은 그때 이미 각종 유해한 바이러스로 가득 차 버렸다 싶기도 하다.

한 마디로 말해서 중앙정보부 신축현장 그곳은 지옥이었다. 정해진 시간 일곱 시에서 일 분만 늦어도 돌아가야 하고, 들어갈 때는 반드시 주민등록증을 꺼내들어야만 하는, 아무 데서나 함부로 오줌을 쌌다는 이유로 남자건 여자건 무조건 잡아다가 점심시간 대중 앞에서 자아비판을 하게 하는 그곳을 지옥이라 하지 않는다면 어디가 지옥일 것인가. 그런데 그보다 더 심한 지옥이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현대건설에 이명박이란 놈이 있는데, 그놈의 눈에 띄었다 하면 정강이뼈가 작살나지, 작살이 나.”

그때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이명박. 자신의 아버지뻘은 족히 됨직한 현장소장의 정강이를 구두 발로 가차 없이 걷어차 버리기로 유명한 그 이름은 건설현장에서 잔인함의 대명사였다. 그 유명한 이름을 그 뒤로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다시 들을 줄은 꿈에서도 몰랐다. 어쨌든 그는 대통령 자리를 꿰찼고, 사람이 해서는 안 될 각종 진귀한 짓으로 악명을 한껏 드높인 다음 박근혜를 끌어들여 동업자 관계를 확실하게 구축했다.

 

▲ 광주의 옛 전남도 청서

 

그 시기의 어느 하루 우연히 들은 이야기 한 꼭지는 지금도 새롭기만 하다. 풍문으로 들은 얘기가 아니었다. 기술도 없고 학력도 변변찮은 아들 하나 공무원 만드느라 논 세 마지기를 팔았다는 얘기를, 그 아들의 아버지가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들어대고 있는 이야기를 면전에서 직접 들었다. 논 세 마지기래야 그까짓 현금으로 쳐서 얼마나 되겠느냐, 공무원 명함을 갖게 된 아들이 이 년도 채 안 돼서 그 논 도로 찾았다는 얘기는 덤이었다.

표정의 변화는 물론이고, 손짓 고갯짓에 호탕한 웃음소리까지 섞어가면서 소곤소곤 가만히 남몰래 들려주는 그 이야기는 뭐랄까, 한 편의 무협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기조차 했다. 동네 양아치 건달들이 고수를 만나면 꼼짝을 못하듯이,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마치 뜨거운 물에 데침을 당한 시금치처럼 대번에 날랑날랑 늘어지는 족속이 있으니 그게 바로 공무원이라는 얘기였다.

그런 더러운 공무원을 어째서 하필이면 아들한테 시키려고 논까지 팔아치웠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펄쩍 뛰었다. 공무원이 돈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까닭은 더러워서가 아니라 유연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란 거였다. 사람이 현대 사회를 살자면 엄지손가락으로 등짝 한복판을 긁어댈 수 있을 정도로 유연해야 하는데 공무원은 딱히 무슨 운동을 안 해도 절로 유연해지고, 그래서 굶어죽을 염려 따위는 절대로 없다는 식의 진귀한 논리로 그는 나를 설득하고자 애를 썼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설득돼 가고 있었다. 할 말이 없다는 건 어이가 없어서라기보다 설득당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옳을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아무튼 나는 눈빛을 반짝이면서, 아하, 아하, 소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는 확실히 비범한 데가 있는 사람이었다. 일반인이 공무원을 매수한다는 게 아주 어려운 일은 아니라 해도, 아무나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런데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런 기술을 갖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능숙한 기술이, 그의 몸에 배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 누가 김기춘을 이렇게 말했을까

 

그는 자신의 그런 기술을 사촌 형님에게 가르쳐주었다고 했다. 처남에게도 가르치고, 누이의 남편에게도 가르치고, 흉금을 터놓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아낌없이 전수한 결과 일가친척 대부분이 공무원 노릇을 하게 되는 특이한 가문이 되었다. 세상에는 공무원 시험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젊은이들이 그 시험에 목을 걸고 있지만, 뭘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평범한 것’들이나 그런 시험에 걸지, 제대로 뭘 아는 사람들은 지름길을 금방 발견해서 “내가 일등”하고 만세 삼창을 부른다는 것이었다.

그런 무협지 같은 이야기를 아하, 아하 소리나 내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기보다는 차라리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건 대체로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기 마련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느끼는 신기함은 매우 부정적인 것이어서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명색이 대통령이란 자의 연애관련 소문만 해도 그랬다. 정윤회가 대통령의 남자라는 둥, 정윤회의 장인이 최초의 애인이라는 둥, 숨겨놓은 딸이 있느니 없느니 따위 이야기들이 나는 그렇게도 불쾌할 수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런 빌어먹을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가. 도대체 이놈의 나라가 어디로 굴러가고 있는가 말이다.

어느 하루 문득 식칼이라도 들고 뛰쳐나가야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없는 기술이지만 사제 총이라도 만들어야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대세에 순응해서 나쁜 것도 나쁘게 보이지 않고, 좋은 것도 딱히 좋다는 느낌이 없이 무조건 힘 있는 쪽 손을 들어주는 이를테면 보수화 돼 간다지만, 슬프게도 내 몸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분노할 일이 많아지고 있었다. 귀를 막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싶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심을 했다.

별별 방식의 남다른 여행도 해보았다. 비행기 조종이라든가 핵미사일 발사 같은 매우 특수한 일이야 물론 못 해봤다지만 어쨌든 서른 가지도 넘는 종류의 그야말로 온갖 일을 다해보는 등 경험도 풍부하게 쌓았으니,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의 심정으로 가만히, 조용히, 다소곳하게 앉아서 내 스스로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 박근혜의 감옥

 

그렇게 하자면 새로운 집이, 감옥이, 무덤이 필요했다. 누에가 스스로 고치를 지어서 그 안에 들어앉아 번데기가 되고 다시 나방이 되어 자기가 지은 고치를 뚫고 나와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죽어가듯이, 내 생의 마지막을 제법 장엄하게 장식하고자 해서 시작한 일이 헌 집을 두고 새 집을 짓는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역시 내 뜻대로만 굴러가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귀를 막는다고 막았지만 완전히 다 막지는 못했고, 눈을 감는다고 감았지만 완전히 다 감지도 못했다. 아니 어쩌면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랬다. 나는 여전히 박근혜와 이명박의 언행을 주목하고 있었고, 그들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있었다. 어쩔 것인가. 꿈을 꿈만이 아닌 현실로 승화시키자면 행동은 피해갈 수 없는 당위의 문제이기 마련이었다.

그렇게 광주로 갔다. 전두환이 뿌린 피 냄새로 진동했던 광주의 금남로에서 박근혜의 감옥을 지었고, 인간 사냥꾼 김기춘의 처단을 염원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오늘, 김기춘은 감옥에서 아프다고 징징대고, 박근혜는 화장실이 불편해서 감옥살이 못 하겠다고 징징대는 꼬라지를 보고 있는 것이니,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인 것 같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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