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겨울, 어머니의 품만큼 부드러운 그 산에 들다
이 겨울, 어머니의 품만큼 부드러운 그 산에 들다
  • 김초록 기자
  • 승인 2017.11.24 16: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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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록 여행스케치>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전북 김제

2017년의 막바지, 동장군이 기세를 떨치는 이즈음이지만 몸과 마음에 새로운 기운도 불어넣을 겸 여행 가방을 꾸리고 집 밖을 나서보자. 겨울 여행지는 많고 많은데 하늘과 땅이 만나는 김제도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전북 김제 여행의 포인트는 모악산 일대와 만경평야(김제평야), 노을(해넘이)이 아름다운 망해사, 그리고 귀로에 벽골제에 들르는 일정이 좋다.

 

▲ 진봉산 전망대에서 본 만경평야

 

김제땅이 보여주는 겨울 정취는 모악산(母岳山) 부근에 다 모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로부터 어머니의 산으로 불려왔던 모악산.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모악산 꼭대기에 어머니가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이것을 토대로 ‘엄뫼’ 또는 ‘모악’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엄뫼’는 높고 큰 산이란 뜻도 가지고 있다. 순 우리말이던 산 이름이 한자로 바뀌면서 ‘모악’이 됐다. 모악산은 그 이름만큼이나 부드러운 산이다.

금산사 주차장을 기점으로 심원암을 거쳐 모악산 정상까지는 약 5.3㎞, 만만치 않은 거리지만 온갖 산(山) 생명들이 길동무가 돼 준다. 하얀 눈을 이고 있는 정상에 오르면 드넓은 김제평야와 그 한가운데로 흐르는 만경강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고 전주시가지와 운장산도 어슴푸레 보인다. 금산사, 금평저수지, 귀신사, 신아대숲길을 잇는 ‘마실길’도 걸어볼만하다.

 

▲ 금산사 미륵전

모악산 자락에 들어선 3대 종교

모악산 기슭에는 호남 제일의 고찰 금산사가 우뚝 버티고 있다. 금산사는 신라 혜공왕 2년에 세워졌다는 설과 법흥왕 1년에 창건됐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이 사찰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아들과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갇혀 지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산사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미륵전(국보 제62호)이다. 일주문과 금강문, 보제루를 거쳐 절 마당에 들어서면 거대한 규모의 3층 법당이 위용을 드러낸다. 겉보기에는 3층이지만 내부가 하나로 트여 있는 독특한 건물이다. 건물 높이만한 세 개의 대형 불상(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이밖에 둘레가 10미터에 이르는 석련대, 정밀한 솜씨의 당간지주와 석등, 점판암으로 만들어진 육각다층석탑, 사각형 이중기단으로 만들어진 방등계단 등 11개의 보물급 문화재도 이 사찰의 깊은 역사를 가늠케 해준다.

 

▲ 금산사 석련대
▲ 고풍스런 귀신사 대적광전

 

모악산에는 금산사 외에도 귀신사, 대원사, 수왕사 등의 고찰이 있다. 금산사에서 모악산 서쪽 고개를 통하여 전주로 넘어가는 길옆에는 금산사의 말사인 귀신사(歸信寺, 믿음이 돌아온다는 뜻)란 절집이 있다. 양귀자의 소설 ‘숨은 꽃’에도 나오는 이 절집은 특유의 고요함과 호젓함으로 방문객들을 맞는다. 보물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은 우람하고 장중하다. 명부전 ․ 산신각 ․ 요사채 ․ 3층석탑 등도 천년고찰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금산사-귀신사를 잇는 길은 낭만 드라이브를 약속한다. 길 양쪽으로 근사한 맛집과 찻집이 있어 시간을 보내기 좋다.

 

▲ 수류 천주교회
▲ 한옥으로 지은 금산교회

 

모악산 자락의 금산면 일대는 종교의 성지다.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든 수류천주교회는 1890년대 세워져 1959년 재건됐다. 영화 ‘보리울의 여름’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방문객들의 발길이 꾸준하다. 1905년 미국 선교사 데이트가 설립한 금산교회는 당시 ㄱ자 한옥 건물 모습 그대로 보존돼 있다. 남녀가 서로 분리돼 예배를 본 곳으로 유명하다. 교회에서 2㎞ 정도 떨어진 동곡마을에는 1900년대 초 증산교의 창시자인 강증산이 사람들을 치료하던 동곡약방이 남아 있다. 마을 앞에 펼쳐진 금평저수지는 나무 데크 산책로가 잘 돼 있어 저수지를 따라 수려한 풍광을 만끽할 수 있다.

 

▲ 망해사 앞에 펼쳐진 만경평야

절집과 포구를 잇는 새만금 바람길

귀신사를 둘러보고 금산사 입구에서 712번 지방도로를 타고 김제시내로 나온다. 시내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10㎞쯤 남진하면 만경읍에 닿는다. 아득히 펼쳐진 만경평야 한쪽에는 서해바다를 굽어보고 올라앉은 망해사(望海寺)란 절집이 있다. 백제 의자왕 2년 부설거사가 창건한 절로 ‘해 지는 서쪽을 즐긴다’는 뜻의 낙서전(樂西殿)이 고풍스럽다. ‘할배나무’와 ‘할매나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 절 앞마당의 팽나무 두 그루와 범종각은 바다를 벗 삼아 사색에 잠겨 있는 듯하다.

 

▲ 망해사와 심포항을 잇는 새만금바람길
▲ 서해를 바라보고 서 있는 망해사 낙서전

 

망해사는 낙조 명소로도 이름값을 한다. 해질녘 잔잔한 수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붉은 빛은 진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망해사 뒤편엔 진봉산(해발 72미터) 전망대가 있다. 망해사에서 소나무 도열한 야트막한 산길(새만금 바람길)을 따라 5분쯤 걸으면 전망대가 나타난다. 전망대에 오르면 바둑판 모양의 만경평야와 심포항 앞바다가 그림처럼 다가선다. 이른바 ‘새만금 바람길’은 만경강 하류인 진봉면 소재지에서 시작해 새만금 사업으로 드러난 간척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심포리 거전 갯벌까지 약 10km 이어져 있다.

 

▲ 심포항에 정박한 어선

 

망해사에서 진봉산 고갯길을 넘어가면 심포항이 모습을 드러낸다. 백합 주산지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지만 지금은 어장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누런 흙빛의 바다와 한쪽에 아무렇게나 처박혀 있는 수십 척의 어선, 그리고 바다를 메우는 덤프트럭과 굴삭기의 요란한 굉음만이 들릴 뿐이다. 번화했던 예전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는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바다를 바라보며 장사를 했던 횟집들도 한두 집만 빼놓고 모두 문을 닫았다.

 

▲ 벽골제의 상징물인 쌍룡 모형

들판과 하늘의 빼어난 조화

심포항의 허전함을 뒤로하고 곧게 뻗은 김제평야 길을 가로지른다. 아득히 펼쳐진 평야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다. 평야 가득 심어놓은 보리는 다가올 봄을 위해 제법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이 사뭇 역동적이다.

김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곡창지대를 갖고 있다. 그 크기가 무려 6900만 평에 달한다. 들판이 오죽 넓었으면 ‘징게 맹게 외얏밋들’(김제 만경 너른 들)이란 말이 나왔을까 싶다. 큰 곡창지대만큼이나 수리시설 또한 거대해서 벽골제(碧骨堤, 사적 111호)는 밀양 수산제, 제천 의림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저수지로 꼽힌다. 이 저수지는 선조들이 벼 재배에 들인 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농경유적으로, 김제시 부량면의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둑이다. 저수지를 만들고 물길을 열어 오직 땅과 함께 살았던 농군들의 혼은 17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고 있다.

 

▲ 벽골제의 수문인 장생거

 

김제평야는 이 땅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음이 답답한 사람들에게 김제평야에 가보라고 하는 것은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쪽빛 하늘과 가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며 혼탁해진 몸과 마음을 씻어내는 것도 좋겠다. 인공 구조물들에 익숙해진 도시인들에게 지평선이 보여주는 순수의 빛은 한 줄기 시원한 청량제다.

김제시 광활면과 죽산면은 이름 그대로 ‘광활한’ 땅이다. 마치 몽골의 대초원을 연상케 한다. 우리나라에서 산이 없는 유일한 면(面)이다. 실제로 성덕면 심평리에서 광활면 창제리까지 들을 관통하는 논둑길만 장장 15㎞에 이른다. 광활 들은 1925년 대규모의 간척공사로 갯벌이 바뀐 땅이다. 그 당시 간척공사는 사상 최대 규모로 수많은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논둑길답게 자동차로 20분이 걸린다.

 

▲ 아리랑문학마을 홍보관

 

벽골제 주변에는 다양한 농경시설들이 들어서 있다. 벽골제의 상징물인 쌍룡 모형, 지평선전망대, 아리랑문학관, 숙박체험을 해볼 수 있는 전통가옥, 쌀음식 체험장, 주막, 짚풀공예 체험장, 수문 시설인 장생거와 경장거, 벽천미술관, 단야루와 단야각 등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가 다채롭게 들어서 있다.

 

▲ 조정래 선생의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 아리랑문학관

대하소설 ‘아리랑’을 펼쳐놓다

벽골제는 조정래의 대하소설 <아리랑>의 무대이기도 하다. 선생은 ‘그 끝이 하늘에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라고 표현했다. 벽골제 앞 광장에 ‘아리랑 문학비’가 서 있고 아리랑문학관에서 그의 작품세계를 엿볼 수 있다. 벽골제에서 5분 거리에는 소설 ‘아리랑’에서 모티브를 얻은 아리랑문학마을이 조성돼 있다. 아리랑 12권을 활짝 펼쳐 놓은 곳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 당시 민중들의 삶을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표현했다. 근대 수탈기관이었던 주재소를 비롯해 면사무소, 우체국, 정미소, 하얼빈역 등이 실제 모습처럼 재현돼 있다. 지삼출, 손판석, 차득보 등 ‘아리랑’ 등장인물들이 살았던 가옥(초가)도 눈길을 끈다.

 

▲ 아리랑문학마을에 있는 죽산주재소
▲ 아리랑문학마을에 재현해놓은 죽산정미소

 

한편, 김제평야의 한가운데(죽산면 죽산리)에도 ‘아리랑’의 무대가 된 건물이 하나 있다. 일제 강점기에 농장을 운영하던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를 일컬음이다. 이 건물은 광복 후 약 10년간 병원으로 사용하다 이후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활용되었다. 크림색 외벽과 붉은색 띠를 두른 듯한 오목한 모양의 지붕은 서양식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아리랑에 등장하는 하얼빈역(아리랑문학마을)
▲ 아리랑의 등장인물이 살던 초가(아리랑문학마을)
▲ 죽산면에 있는 구 일본인농장 사무실

 

아리랑문학마을에서는 관람객들의 역사의식과 이해를 돕고자 다양한 체험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주리틀기, 곤장 옥사체험, 대못상자 체험, 고구마(감자) 구워먹기, 맷돌 갈기, 물지게 체험, 인력거 체험, 의상 체험, 탁본 체험 등이 그것들이다. 또한 느린 우체통은 이곳을 찾은 여행객이 다양한 사연을 담은 엽서를 써서 넣으면 6개월이 지난 뒤 배달해준다. 

<여행작가/ 수필가>

 

▲ 한문과 예절을 가르치는 학성강당

 

여행팁(지역번호 063)

☞가는 길=모악산은 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 금산사 나들목으로 빠져나오면 된다. 벽골제, 아리랑마을, 망해사(심포항)는 서해안고속도로 서김제나들목으로 나와 국도 29호선을 타면 된다.

☞숙박=모악산 부근에 있는 모악산유스호스텔(548-4401), 킴스캐빈펜션(222-0705), 안덕힐링펜션(284-3377), 모악펜션(227-0088) 등을 권한다. 김제 시내에도 다양한 숙박시설이 있다.

☞맛집=금산면 원평리의 원평지평선청보리한우촌(543-0076)은 김제 평야에서 기른 보리를 발효시켜 먹인 총체보리한우는 육질이 부드러워 미식가들에게 인기가 좋다. 금구면사무소 인근에 있는 예촌(546-5586)은 새싹비빔밥, 된장비빔밥, 비빔국수 맛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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