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했었다, 처음 아빠에게 욕을 했다
아빠와 엄마가 이혼을 했었다, 처음 아빠에게 욕을 했다
  • 류승연 기자
  • 승인 2017.11.29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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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류승연

부모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언제나 쉽지 않다. 자신을 숨기는 것보단 드러내고 사는 게 더 편한 나이지만 부모님과 관련된 얘기를 하려고 하면 일단 침묵부터 하고 본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부모님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하는 건 부모님과 나의 관계를 중간점검하고 남은 과제를 명확히 하고 싶어서다. 더 늦기 전에, 과제를 해결할 기회조차 사라지기 전에 말이다.

부모님은 2002년에 이혼을 했다. 그러다 2008년에 다시 재결합을 했다. 당시 이혼의 과실은 누가 봐도 아빠에게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그 때, 모든 것을 다 가진 그 때, 온 세상이 발밑에 있는 줄 알았던 아빠는 선을 넘어 버렸다.

 

▲ 일러스트=정다은 기자 panda157@naver.com

 

사람이 항상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높이 오를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시야는 더욱 흐려진다. 넘치는 부와 권력은 함정 앞에 도사리고 있는 미끼 같은 것이다. 이제는 아는 그 것을, 당시의 젊었던 아빠는 몰랐고 실수를 했다. 한 집안의 가장이 저지른 하나의 실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큰 실수로 이어졌고 한 가정은 붕괴해 버렸다.

엄마는 아직도 말한다. 네 아빠 때문에 나의 50대는 없어져 버렸다고. 아빠에 대한 원망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20대는, 우리 삼남매의 20대는 부모의 이혼 때문에 많이 힘들었다. 아빠에 대한 원망이 최고조를 치닫던 어느 날, 나는 아빠와 통화를 하면서 결국 소리를 질러 버렸다. “가족을 버린 건 바로 당신이잖아. 이 XX야!”

태어나 아빠에게 처음 해 본 반말, 태어나 아빠에게 처음 해 본 욕. 말 그대로 자식으로선 해선 안 될 하극상. 아빠가 받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참고, 참고, 참다가 터진 그 한 마디에 나의 모든 원망과 분노의 정수가 실려 있었다.

마음속에 가득 찬 분노와 원망이 밖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일까. 나는 그 날부터 조금씩 아빠를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 아빠와의 통화. 목소리가 많이 안 좋다.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독감 백신을 맞았다가 독감에 걸려버렸단다. 마음이 무겁다. 독감백신 그까짓 게 뭐라고. 아빠도 나이가 들었음이, 노인이 되어버렸음이 새삼 다가온다.

올해 초에는 영정사진이라고 찍어서 자식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던 아빠. 그깟 독감백신 따위에 아빠가 안 좋아지기라도 할까봐 나는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남들한테는 그리도 애교를 피우면서 정작 부모 앞에선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큰 딸은 그저 병원에 다녀온 뒤 푹 쉬시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른다. 좀 더 다정한 말도 있을 법 한데 표현은 하지 않는다.

내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알게 된 건 아빠의 품 안이 얼마나 따뜻하고 든든했던가 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는 전혀 몰랐던 것들이다. 내가 부모가 된 후 비로소 알게 된 것들이다.

아빠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그 안에서 나는 마음 놓고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내가 어떠한 자유를 누리더라도 그것은 모두 울타리 안의 자유였으므로 나는 인생에 대한 불안감이 없었다.

불안감이 없는 상태에서 구김살 없는 유년, 학창 시절을 보냈다는 건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상을 살아보니 알겠다.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내면의 힘은 행복했던 유년시절의 기억에서부터 나온다. 차곡차곡 쌓였던 행복 에너지가 내면에 꽁꽁 비축되어 있다가 필요로 할 때 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울음을 그치고 일어나 앞으로 전진 할 수 있는 힘을 준다.

아빠가 얼마나 좋은 남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자식들에게는 좋은 아빠였음이 틀림없다. 가장으로서 책임감 있게 자식들을 위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도 중요하다.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자식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해주고 싶어도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아빠는 자식 셋을 키우면서 돈 때문에 자식들이 하고 싶은 걸 못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학창 시절 내내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었고, 대학에 가서도 아르바이트 한 번 하지 않아도 되는 환경을 제공했다.

아마도 그 덕일 것이다. 자식 셋, 아니 나를 빼고 자식 둘은 모두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나만 좀 이상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씩씩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완도 여행의 기억, 북한산 계곡의 기억, 호텔과 민속촌을 갔던 기억 등 아빠와 함께 한 추억들이 많다는 것에 감사하다.

언제나 책을 가까이 하고 자식들과 책으로 소통하려 했던 아빠인 것에도 감사하다.

아침마다 나를 깨울 때 엉덩이를 두드리며 애정을 표현해 준 것에도 감사하다.

내가 서툰 사회생활로 힘들어 할 때 “아빠가 가서 나쁜 사람들 혼내줄까?”라며 내 편을 들어준 것에도 감사하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도 아빠에게 감사한 것들은 한 무더기다. 미처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본인 스스로는 물론 가족 모두에게 그리 큰 상처를 줬던 아빠임에도 말이다.

이제 엄마로 넘어간다. 애증의 대상. 사랑하지만 동시에 밉기도 한. 고맙지만 동시에 원망스럽기도 한 엄마. 엄마, 우리 엄마.

엄마는 초등학교 교사로 정년퇴직을 했다. 엄마는 선생님이었다. 그것도 가장 기본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 인간으로서의 기본을 가르치는 초등교사이다보니 엄마는 집에서도 선생님이었다. 언제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늘 엄마가 옳았다.

사실 맞는 말이다. 엄마는 늘 옳은 방법으로 삶을 살았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식들까지 모두 같은 방법을 택할 리는 없었다. 같은 목적지를 가더라도 그 방법론은 저마다 다를 수 있는데 엄마는 언제나 자신이 아는 옳은 방법을 제시하고 그에 따르길 바랐다.

지금까지도 엄마와 충돌하는 지점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지지하고 지원해주는 ‘엄마’인데, 엄마는 퇴직을 한 지금까지도 옳은 방법을 제시하는 ‘선생님’이고자 한다. 이 때문에 나는 엄마와 만날 때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다. 머리가 큰 딸은 이제 더 이상 고분고분하게 엄마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엄마의 50대, 그러니까 아빠 때문에 가정이 산산조각 난 그 시기에는 내가 엄마의 보호자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울증이 극한으로 치달은 엄마를 달래고 대화하고 모든 하소연을 다 들어줘야 했다. 내가 그 역할을 맡아야 동생들이 엄마로부터, 부모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당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맏이였으니까. 엄마도 내게 의지하고 나를 괴롭힐 수밖에 없었다. 내가 큰 딸이었으니까.

그 시간이 너무 힘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엄마한테는 아빠한테처럼 “XX야”라는 욕을 못해봐서인지 아직까지도 엄마와는 심리적 갈등이 풀리지 않고 남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엄마가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시간을 되갚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아직까지도 난 엄마를 괴롭히며 살고 있다. 특히 엄마에게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부분은 아직까지도 크다. 이건 우리 부부가 반성할 부분이지만.

장애 아이를 키우며 정신이 극도로 붕괴되었던 과거 몇 년 간 나는 나 자신 뿐 아니라 엄마도 힘들게 했다. 방방 뛰고 발을 구르고 미쳐서 날뛰기도 여러 번. 엄마와 인연을 끊기로 한 것도 두세 번. 물론 인연을 끊자는 건 말만 그럴 뿐 언제나 먼저 연락을 해온 건 엄마였다. 인연을 끊기로 했으면서 엄마가 연락을 해오면 나는 짐짓 모른 척 엄마의 잔소리를 다 들어준다. 그러고 나면 엄마는 내 걱정을 하며 다시 우리의 관계는 복원되었다.

엄마, 엄마, 우리 엄마. 누군가는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하던데 나는 아직까지도 엄마라는 말을 들으면 죄책감과 함께 분노도 따라서 올라온다.

그래도 이런 부정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다. 엄마가 나를 위해, 내 아이들을 위해 했던 희생과 노력들은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무것도 없던 메마른 땅에서부터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간 인물이다. 나는 그런 엄마를 보면서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는 태도를 배운다. 엄마는 자신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이다. 비록 나이가 들면서는 신념이 고집으로 변해가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갖고 인생을 사는 법을 배운다.

엄마는 빠르게 결정하고 일을 추진하는 인물이다. 가끔 그것은 독재가 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에서 실행력을 배운다. 엄마는 나에게 그런 존재다.

부모님에 대해 쓰다 보니 나에게 남은 과제도 더 선명해진다. 이제 아빠와는 마음의 화해를 한 것 같다. 남은 건 엄마와의 화해다. 사실 이미 알고 있던 과제들이지만 그동안은 애써 과제를 풀 시기를 뒤로 더 뒤로 미루기만 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마냥 뒤로 미룰 수만은 없겠지. 시간은 영원한 게 아니고 엄마 역시 내 곁에 영원히 있는 게 아닐 테니. 너무 멀지 않은 미래에 엄마와의 화해기를 올릴 수 있기를 바라본다.

<류승연 님은 언론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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