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산골 마을 김장하던 날

▲ 겨울이 다가온다.

 

겨울이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요란하다. 사무실 난로가 벌겋다. 거리는 고소한 냄새로 넘쳐난다. 붕어빵, 계란빵, 군고구마 등 겨울을 대표하는 군것질거리들이 사람들의 발길을 세운다. 길가는 사람들은 두꺼운 코트, 패딩에 목도리까지 완전 무장하고 있다. 11월인데 눈도 잦다.

김장철이다. 배추 값은 폭락했다. 산지에서는 1개에 약 200원, 도매는 1개에 약 1000원 정도란다. 여름배추 가격이 오르며 재배면적을 늘려 심은 탓이다. 결국 김장배추 수확 때는 공급물량이 많아져 가격이 떨어지고, 급기야 멀쩡한 배추밭을 갈아엎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수확하는 인건비가 더 든다며 아예 포기하는 것이다. 속도 알차고 상한 것도 없는데…애써 키운 농민들의 속만 너덜너덜해진다.

 

▲ 김장을 시작했다.

 

김장철, 경기도 양평 산골의 겨울준비 모습은 어떨까. 이곳 역시 올해 김장배추는 풍년이다. 속도 알차고 싱싱하게 잘 자랐다. 그 값어치가 되지 않아 안타깝지만 그래도 올핸 맛있는 김장김치를 먹을 수 있겠다.

양평은 서울보다 춥다. 그래서 김장을 일찍 한다. 11월 초순 시작해 중순, 늦어도 말경이면 대부분 끝이 난다. 김장하는 날은 동네 잔칫날이다. 마을사람들이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함께 김장을 한다. 품앗이다. 이쯤이면 김장을 마친 집들이 대부분이다. 이번엔 윗집이다. 약 150포기. 윗집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전날 밤늦게까지 준비를 했다. 밭에서 수확해온 배추를 다듬어서 소금물에 절여놓았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무도 뽑아와 채를 썰었다. 마늘과 양파, 그리고 대파, 갓 등 양념에 쓰일 재료들도 전부 손질해놓았다.

 

▲ 지난 밤 절여서 헹군 150여포기의 배추
▲ 김장준비에 바쁜 아주머니들

 

이른 아침 밖에 나와 보니 얼음이 얼었다. 아저씨는 절여놓은 배추를 헹궈서 나란히 쌓고 있다. 아주머니는 배추 속으로 넣을 양념을 만드느라 분주하다. 직접 담은 멸치젓갈과 까나리액젓, 그리고 다양한 해산물이 투입된다. 김장배추가 익었을 때 궁극의 시원함을 안겨줄 필수 재료들이다. 아주머니의 손길이 반복될수록 양념의 색깔이 벌겋게 변한다. 침이 꿀떡 넘어간다. 마당 한쪽 펄펄 끓는 커다란 솥 안에선 도톰한 돼지고기 한 덩이 제 몸 공양할 준비에 여념이 없다.

양념이 거의 버무려 질 무렵 하나 둘 오늘의 주인공들이 모이기 시작한다. 동네 아주머니들이다. 50대부터 70대까지 세대를 뛰어넘는 김장부대. 부녀회장님도 보인다. 저마다 개성강한 모자에 빠알간 앞치마를 둘렀다. 아무리 때깔 좋은 앞치마라도 150포기의 김치를 담그다보면 모두 새빨갛게 되고 말터. 빨간색엔 빨간색이 제격이다. 빨간 주방장갑은 물론이다. 특별 제작한 넓은 테이블에 양념이 펼쳐진다. 남자들은 헹궈놓은 배추를 테이블 위로 옮겨 놓는 임무를 맡았다. 힘쓰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다.

 

▲ 힘쓰는 일 담당 주인아저씨
▲ 단풍도 다 떨어져가고...

 

이제 본격적인 김장타임. 아주머니들이 테이블을 둘러싼다. 입김 후후 나올 정도로 추워도 아주머니들의 수다를 막을 순 없다. 그러면서도 배추에 양념을 무치는 손길은 빠르다. 정교하다. 하얗고 노랗고 파랗던 배추가 빨갛게 익어간다. “어이, 배추 가져와!” 아주머니의 불호령. 옆에서 배추김치에 막걸리 사발 기울이던 아저씨, 화들짝 발걸음을 옮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더미 같이 쌓여있던 배추들이 사라져간다. 한 아주머니는 배추 속 전담. 커다란 대야에 있는 빨간 속을 바가지로 퍼서 비어가는 테이블 위로 옮긴다. 주인아주머니는 고기 삶기와 주변 잡무 처리 담당. 참여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임무가 정확하게 분담돼있다.

어느덧 해도 높게 뜨고, 어깨며 허리며 뻐근할 즈음 쌓여있던 절인 배추가 동이 났다. 속이 채워진 김장배추들은 저장용 통으로 이동. 일부만 남기고 나머지는 멀리 사는 자식들과 친인척 그리고 지인들에게 보내질 것이다.

 

▲ 부녀회장님의 열정적인 김장모습
▲ 속 버무리기

 

이제 김장날의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바로 수육타임! 김장의 마무리는 잘 담근 김치와 남겨둔 배춧잎과 속 그리고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돼지고기 수육을 싸먹는 것이다. 아주머니가 펄펄 끓는 솥에서 수육을 꺼낸다. 색깔이 족발 같다. 거무튀튀한 갈색이다. 솥 안을 들여다보니 능이버섯 등이 들어가 있다. 지난가을 아주머니가 산에 올라다니며 직접 딴 것들이다. 시원한 막걸리 한잔은 필수. 노란 배춧잎에 윤기 흐르는 수육 한 점 얹고, 빨간 속도 올린다. 막걸리 한 사발 꿀꺽꿀꺽 들이켠 뒤 주먹만한 쌈을 입안 가득 우겨넣는다. 아그작아그작, 이 맛이다. 이게 사람 사는 맛이다. 김장독 든든하게 채워놓으니 혹한의 겨울도 두렵지 않다. 든든하고 좋은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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