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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조용히 출렁거렸지”

<김초록 에세이> 어른을 위한 동화 김초록 기자lmaster@weeklyseoul.netl승인2017.12.04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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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일대해변

 

내 고향은 늘 푸른 바다이지. 나는 여태껏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어. 가끔 뭍으로 밀려가기도 하지만 모래톱이나 갯바위에 잠깐 머무르다 이내 돌아오곤 하지.

나는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어머니 같은 존재이지. 사람들은 바다를 바라볼 때 가장 순한 눈빛을 띠는데, 아마도 바다가 품고 있는 넉넉하고 부드러운 이미지 때문일 거야.

바다에서 떨어져 나온 자잘한 알갱이, 그게 바로 나야. 따라서 바다가 없었다면 나도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겠지.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거대한 바다는 강이 모여 생긴 것이야.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바다의 시원(始原)은 저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라고 할 수 있지.

물방울 하나하나가 모여 시내가 되고 강이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거대한 바다를 이루지.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야. 바다의 일부인 나는 한순간도 자연의 질서를 파괴한 적이 없어. 그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니까 말이야.

아마 나처럼 변덕이 심한 것도 드물 거야. 날씨에 따라 수시로 변하니까 말이야. 오늘만 해도 그래. 느닷없이 쏟아진 진눈깨비 때문에 온종일 뒤척거렸지. 거기에다 바람은 왜 그리 심하게 부는 지. 나는 하얀 갈기를 세우고 배들이 정박해 있는 항구로 쏜살같이 달려갔지. 그런데 그런 나의 몸짓과는 달리 내 마음은 두 쪽이 난 듯 아파오는 것이었어. 자칫 내 등살에 휘말려 고기잡이배들이 조난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지. 할 수만 있다면 내 물머리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었지만 그게 생각대로 안 되더군. 다행히 약간의 상처만 내고 옆으로 비껴갈 수 있었지.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오지 뭐야.

드문 일이지만 나는 사람들의 원성을 살 때도 있지. 선박 수십 척을 부스러뜨리는가 하면 마음 좋은 어부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니까 말이야. 그럴 때면 차라리 자지러지고 싶지. 파도로 태어난 것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도 어쩔 수 없고.

하지만 나는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지. 내가 없는 세상은 쓸쓸함과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야. 사람들은 나를 보면서 생기를 얻고 푸른 꿈을 키우지. 문학의 소재가 되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가 하면 사계(四季)마다 특유의 분위기를 안겨주기도 하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나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내 자리를 지키지. 그러니 내가 어찌 소중하지 않을 수 있겠어. 수많은 자연의 창조물이 있지만 나만큼 거대하고 신비로운 것도 드물 거야.

나는 바닷가에 몰려왔다가 종종 아름다운 풍경을 보곤 하지. 그물을 손질하는 젊은 어부, 내 위에 앉아 파도타기를 즐기는 바닷새, 모래성을 쌓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 낚싯대를 드리운 아버지와 아들, 해초를 캐는 해녀, 모래밭을 거니는 연인, 그리고 고개를 들면 저 멀리 공장의 굴뚝도 보이는 걸.

그러나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있지. 선박에서 기름이 흘러나와 주위를 온통 검은 띠로 물들였을 때,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어린 고기들을 발견했을 때, 밀물에 휩쓸려온 쓰레기를 보았을 때…. 맑고 투명한 바다가 한순간의 실수로 제 모습을 잃어버렸을 때, 나는 말할 수 없는 절망을 느끼지. 인간의 오만이 자연에게 어떤 피해를 주는지 나는 똑똑히 보곤 하지.

어쨌든 지금은 너무도 고요한 한밤중이야. 밤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나고 저 멀리 항구에서 새나오는 불빛이 그리움과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적막한 밤.

 

 

바다가 잠잠할 때는 나도 고요함에 빠지지. 해변의 아이들, 여객선, 갈매기, 등대, 수평선, 방파제, 파란 하늘, 흰구름, 함박눈, 노을, 안개, 아침해, 물새.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잘게 부서져 내리지. 이 얼마나 산뜻한 풍경인가 말이야.

나는 한 연인을 알고 있지. 내가 두 사람을 만난 것은 먼동이 터 오는 오늘 새벽 무렵이었어. 나는 자잘한 포말을 일으키며 해변으로 밀려갔지. 바닷가에 거의 닿았을 때, 나는 모래밭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고 말았어. 어깨를 감싸 안고 새벽 바다를 바라보는 그들이 그렇게 정다워 보일 수가 없더군. 나는 소중한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 조용히 출렁거렸지.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걷히자 수평선으로 붉은 해가 떠올랐어. 잘 익은 석류알 같은 해를 바라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두 사람. 내 마음도 덩달아 달뜨지 뭐야.

두 사람은 빨려들 듯 아침해를 바라보다 길게 이어진 모래펄을 따라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었어. 나는 그들이 남기고 간 발자국을 하나 둘 지우면서 오랜만에 뿌듯함을 맛보았지. 솜털 같은 아침 햇살이 그들을 포근히 감싸주었어. 두 사람은 가슴을 활짝 펴고 크게 소리치는 것이었어.

“바다야, 내가 왔다아!”

나는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갔지.

철썩 쏴아아, 철썩 쏴아아….

남자의 어깨에 기댄 채 가만가만 걷던 여인이 말했어.

“오랜만에 바다를 보니 기분이 참 좋네요.”

“바다는 모든 것을 감싸주지. 우리의 아픔까지도.”

“저 광활한 바다를 보니 시름이 싹 걷히네요.”

“밤이 깊으면 아침이 멀지 않은 것처럼 우리에게도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야. 그런 뜻에서 우리 야호 한번 외칠까?”

“좋아요.”

‘야호’를 힘껏 외치는 두 사람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가 없더군. 그 때였어. 뱃고동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온 것은. 밤새 고기잡이를 마친 배들이 하나 둘 항구로 들어오고 있었어. 통통통…. 귀항하는 어선 주위로 갈매기들이 원을 그리면서 맴돌았지.

나는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한테 부탁해서 내 몸을 한껏 부풀렸어. 그리고는 두 사람 곁으로 바짝 다가갔어. 물결이 세차게 밀려오자 여인이 갑자기 신발을 벗어 들고 달려가는 것이었어. 그 뒤를 남자가 따라갔고.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달려가던 두 사람은 모래밭에 주저앉아 서로 약속이나 한 듯이 함박웃음을 터트렸어. 여인이 다소곳이 말했지.

“난 파도를 보면서 많은 걸 느껴요. 언제나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위안을 주니까요.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름다움을 모든 이들에게 골고루 베풀어주는 믿음직한 친구예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렸지. 그리고는 뭔가 다짐을 한 듯 눈을 빛내는 것이었어. 나는 그 눈빛이 무얼 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

이제 하루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야. 내일을 위해 오늘을 조용히 마무리하고 싶어.

<수필가,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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