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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릿발 속에 꽃이 피었다

<김수복의 시골살림 이야기> 헌 집 두고 새 집을 지으며-두번째 김수복 기자lslj5261@weeklyseoul.netl승인2017.12.08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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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작업을 마치고 사과를 깎아 먹으며 인터넷으로 지나간 뉴스를 훑어보던 중에 그 얼굴을 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다. 보면 절로 그냥 욕지기가 나오는 얼굴이기도 하다. 간단히 말해서 재수 없는 얼굴이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기왕지사 보고 만 얼굴이라 그 입에서 나오는 얘기나 들어보기로 했다. 꼴에 어디로 무슨 강연을 하러 가시는 중이라는데 “적폐청산이란 미명 하에”어쩌고 지껄이는 그 말씀이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그것은 마치 죽기 직전에 내지르는 그 무슨 짐승의 단말마와도 같아서, 감동할 준비가 하나도 안 돼 있었던 나는 그만 오호, 하고 감탄사까지 크게 내지르고 말았다.

 

▲ 서릿발을 뚫고 찾아온 명자 한 송이

 

사르트르의 걸작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텡은 바닷가에 뒹구는 돌멩이 하나에서 극심한 구토를 느낀다. 이때부터 그는 아무 할 일이 없는, 할 일이 있다 해도 의미를 찾을 수 없어서 무료하기 짝이 없는 부랑자의 모습으로 거리를 배회하고, 방황하며,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사회 전반을 훑어보며 끊임없이 구토를 한다.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것이 썩었거나 낡았고, 역겨운 것들이어서 구토를 아니할 수가 없다.

퍽이나 오래 전에 읽었던 소설 ‘구토’가 느닷없이 생각난 까닭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사르트르가 ‘구토’를 통해서 진정으로 하고자 했던 말이 무엇인가도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이십 년도 훨씬 전 그 소설을 읽을 때의 나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피가 뜨겁고 관념적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나는 당연히 그때의 내가 아니다. 그때의 내가 한 편의 소설이 갖는 위대함의 깊이 같은 것을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면, 지금의 나는 바닥에 뒹구는 돌멩이들을 열심히 주워다가 모아놓고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농부들이 밭을 갈다가 돌멩이를 발견하면 밭두렁으로 던져놓는다. 이 돌멩이들은 헌 집 두고 새 집을 짓고자 하는 내 눈에 아주 훌륭한 건축자재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돌멩이만 보였다 하면 그곳이 어디건 무조건 주워서 흙을 털어내고 집으로 가져간다. 뿐만이 아니다. 어디를 가던 중에 빗물에 쓸려온 모래가 쌓여 있는 개골창을 발견하면 멈춰서 그 모래를 포대기에 담아 차에 싣고 돌아온다. 그런 뜻밖의 횡재를 위해서 나는 항상 차에 포대와 삽을 싣고 다닌다.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서 물을 붓고 휘저으면 걸쭉한 접착제가 된다. 이 접착제로 돌과 돌을 상하좌우로 이어주면 거대한 옹벽이 된다. 이 옹벽은 접착제인 시멘트가 완벽하게 굳으면 철옹성처럼 단단해지지만, 시멘트가 굳기 전에는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어서 조심에 또 조심을 해야만 한다. 이런저런 온갖 장비를 갖추고 시작한 일이라면 뭐 조심을 그렇게 많이 해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달랑 흙손 하나만 갖고 시작한 일이고 보니 바람만 세게 불어도 조심, 조심, 노래를 불러야만 한다.

 

▲ 출입문 틀 잡기 공사중
▲ 창고 겸 보일러실 공사중

 

조심 노래를 부르다 보면 문득, 뜻밖의 것들이 생각나기도 하고 눈에 띄기도 한다. 뜻밖의 것이라 했지만 사실은 오래 전부터 거기 어디에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다. 인생이란 보면서도 못 보는 것들이 참 많다. 못 본다고 해서 아주 못 보는 것도 아니다. 보기는 보았지만 본 그것이 내 의식을 뚫지 못했을 때, 나는 그것을 그야말로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그리고 한참이나 지난 뒤에, 어렴풋이 뭔가가 생각난다. 어렴풋이, 이게 뭐지? 알 수도 없고 모를 수도 없는,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은 시간이 얼마나 지난 뒤에 우연히 그것을 다시 보고는 아하, 이것이 그것이었구나, 하고 마치 거대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미칠 듯이 좋아한다.

처마 밑에 박 한 포기가 나와 있었더랬다. 어디서 날아온 씨앗이 왜 거기 떨어져서 떡잎을 내고 뿌리까지 내렸는가는 당연히 알 수 없었다. 신분도 알 수 없는 그것을 뽑아버릴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두었다. 그리고 잊었다. 아주 잊은 것은 아니다. 오가는 길에 가끔 보기는 보았지만, 성장하고 있다는 의식은 거의 없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있는 듯이 없는 듯이 거기에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꽃이 피었다. 그야말로 박속처럼 하얀 박꽃이, 애처롭기도 하고 신비롭기도 하고 하여튼 손으로 만져보는 것조차 무서워서 엄두를 못 낼 정도의 숨 막히는 자태로 피어나 있었다.

한 송이 피었던 박꽃은 두 송이, 세 송이, 열 송이가 되고 스무 송이가 되었다. 그리고 열매가 맺었다. 무수하게 늘어선 수꽃들 사이로, 한 송이의 암꽃에 열매가 달려 나오는가 싶더니 부쩍부쩍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제쯤 익어갈 때가 됐지 않았나, 해서 살펴보면 며칠 전보다 최소한 일 센티미터는 더 커졌다는 느낌만 되풀이 반복되었다. 그렇게 한 달이 넘고 두 달이 되도록 크고 또 크고, 가을이 깊었을 때는 그야말로 엄청나게 커져버린 것이어서, 익기도 전에 된서리를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밤마다 비닐을 씌우고 아침이면 다시 걷어내기를 되풀이하는 등으로 안간힘을 다했지만, 비수처럼 내리 꽂히는 서릿발을 피해내지는 못하고 쩍쩍 갈라져 버렸다.

 

▲ 11월의 샤스타데이지
▲ 겨울장미

 

뭔 일인지 모르겠다. 금년에는 서리가 너무도 일찍 내리기 시작했다. 작년에는 10월에 서리는커녕 11월에도 무서리나 조금 내리고 말았다는 것을 내가 분명히 기억하고 있고 내 옆의 그녀 또한 그렇게 기억하고 있건만, 금년에는 10월에 무서리는 기본이고 된서리까지 내리는가 싶더니 11월 들어서는 하루도 빼지 않고 서릿발이 성성하고 심지어는 살얼음까지 얼어버렸다.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하늘도 무심하지 않다는 말도 있듯이, 국민 보기를 개돼지 보듯 하던 자들에게 내리는 철퇴인가 싶어서 그나마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그렇다 해도 내 마음의 혼란은 진정되지 않고 오히려 가중되고 있었다.

서릿발 속에서 꽃이 피었다. 지난 5월 떼거지로 몰려 피어나서 내 정신을 어지럽게 했던 장미가, 아침마다 서릿발이 쩡쩡한 이 계절에 어쩐 일로 불쑥 피어나서 내 마음을 복잡하게 한다. 왜 왔지? 5월에 못 이룬 그 어떤 애달픈 숙제라도 있었단 말인가? 고개를 몇 번이나 갸웃거리다가 또 다른 꽃 한 송이를 발견했다. 잎도 다 떨어져버린 가시투성이의 명자나무에서 빠-알간 꽃 한 송이가 언제 벌어졌는지 만개를 해서는 그냥 눈물 없이는 볼 수가 없는 풍경을 연출한다.

야 이게 대체 뭔 일이냐. 어안이 벙벙해서 마당을 구석구석 살피다가 또 한 송이의 때 아닌 꽃을 발견했다. 5월과 6월 빨갛게 피어나는 양귀비들 속에 있으면 그 멋들어짐이 한껏 두드러져 보이는 샤스타데이지 한 송이가, 나도 여기서 피었걸랑, 하는 투로 꼿꼿하게 서서 바람에 흔들린다. 한겨울에 개나리가 피는 꼴은 해마다 보았지만 이런 희한한 꼴은 정말로 처음이어서,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내가 헌 집 두고 새 집 짓는 일을 축하하고 고무찬양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나쁜 것들이 속속 감옥에 수감되는 소식을 듣고 흥분해서 달려 나온 것인가? 아니다 아니야. 뭔 이런 얼빠진 미신적 감상에 빠져 있는 것이냐.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어대며 나 자신을 꾸짖어 보지만, 그렇다고 무슨 속 시원한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답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짐짓 고개를 흔들어대 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그런 엉뚱한 생각조차도 든다.

“아니 멀쩡한 집 놔두고 무슨 집을 또 지어요?”

 

▲ 박이 처음 열렸을 때

 

오랜만에 활터에 갔다가 그런 질문을 받았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언제인가 내 동생이 그런 질문을 했을 때도 나는 그냥 웃고 말았었다. 앞으로도 아마 그런 질문을 꽤 받게 될 것이다. 그때도 나는 아마 그냥 웃고 말 것이다. 할 말이 없어서 웃음으로 대충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내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답변도 그 사람을 온전히 납득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내가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나는 그저 웃고 말지요, 할 따름이다.

사실은 나 자신도 가끔은 눈을 깜빡거리곤 한다. 내가 왜 이런 짓을 시작했지? 굴러 떨어진 돌에 발등을 찧고 펄떡펄떡 뛰고 나서, 돌이 너무 커서 망치로 깨다가 돌이 아닌 손등을 때리고 났을 때, 혹은 개골창에서 모래를 퍼 올리느라 땀을 뻘뻘 흘리다가 문득, 논두렁 밭두렁에 버려진 돌을 줍는다고 정신없이 헤매다가 달팍 넘어졌을 때, 여기저기 도처를 기웃거리면서 버려진 나무토막이라든가 팔레트 같은 거푸집용 자재를 마치 ‘거렁뱅이’처럼 염치도 없이 수집해 들이고 있을 때, 문득 나 자신이 이상하게 여겨지면서 고개가 갸웃거려지곤 한다. 감옥이라고, 무덤이라고, 그렇게 어마어마한 이름까지 지어놓고 대체 뭘 하자는 것이냐 하는 의문이 불쑥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회의의 시간은 짧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결코 부정적이지도 않다. 그런 짧은 회의를 통해서 나는 어쩌면 에너지를 보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구상에 한 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집을 짓는다는, 그런 터무니없는 자부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닌 다른 무엇인가 굉장한 것이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 굉장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당연히 침묵을 선택할 것이다. 어쨌든 그런 믿음이 없다면 나는 아마 진즉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감옥이고 무덤이고 다 포기하고 나자빠졌을 것이다.

바닥 면적이 열 평도 채 안 되는 집이라서 얼핏 장난감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상하좌우로 뼈대를 어지간히 맞춰놓고 보니 사뭇 거대하다. 커다란 돌과 작은 돌 이 주재료인 데다 두께마저 상당하고 보니 압도적이라는 느낌조차도 있다. 이 거대하게 압도적인 작은 공간 안에서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개념은 사라지고, 공간에 대한 인식 또한 크게 뒤틀린다. 그래서 가끔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돌멩이에 발등을 찧고 펄쩍펄쩍 뛰기도 한다.

“배 안 고파요?”

“언제 밥 먹어요?”

“밥 없어. 나 혼자 다 먹어버렸어.”

나의 그녀는 가끔 일손을 돕기도 하고, 자기가 직접 뭔가를 해보겠다고 나서기도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는 포즈를 취한다. 사람이 뭔가 할 일을 만들어서 그 일에 몰입한다는 것은, 몰입해 있는 그 자체는 훌륭한 미술작품에 필적할 만한 관상가치가 있기 마련인 법이다. 그렇다 해도 언제까지나 그것을 관람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어서, 그녀는 가끔 아이를 부르는 엄마 같은 목소리로 밥 먹자고 부르기도 하고, 어떤 때는 말썽꾸러기 사내아이를 대하는 소녀처럼 우는 소리를 내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꽥꽥 소리를 지르는 투의 악마적인 짜증을 내서 정신없는 나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기도 한다.

 

▲ 이 거대한 박은 어디서 왜 왔나...

 

집짓기 작업을 시작한 이후로 내 정신은 실제로 엄청나게 바빠졌고, 또한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전례가 있다거나, 설계도 같은 것이라도 있다면 그렇게까지 바빠야 할 필요가 없겠지만, 전례도 없고 설계도 또한 내 머릿속에서 날마다 밤마다 수정되고 있으니 그놈의 정신이 온전할 리가 없다. 바둑을 처음 접한 사람이 길을 걷다가 하늘에 뜬 바둑판을 발견하고 머릿속으로 바둑을 두듯이, 전대미문의 새로운 집을 짓겠다는 허황된(?) 생각으로 가득한 내 머릿속은 밥을 먹다가도 설계를 변경하고,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뭐라고 중얼거리며 설계 변경을 시도하고 있으니, 옆에서 지켜보는 그녀로서는 아마도 재밌다, 웃긴다, 짜증난다, 등등 그때그때 달라지는 감정의 온갖 기복을 치러내느라 정신이 없을 터이었다.

게다가 작업을 하는 시간조차 일정하지가 않고 둘쭉날쭉 제멋대로이다. 갯벌 작업이 새벽에 있을 때는 작업을 다녀와서 집짓기 일을 하고, 갯벌 작업이 오전에 있을 때는 오후에 집짓기 일을 하고, 갯벌 작업이 오후에 있을 때는 오전에 집짓기 일을 하는데 그 시간조차도 어떤 날은 한 시간, 어떤 날은 두 시간, 또 어떤 날에는 세 시간, 네 시간을 훌쩍 넘겨 버리기도 한다. 어쨌든 하루 평균 두 시간씩 작업을 하겠다는 애초의 생각은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뭐랄까, 독서삼매경에 비유를 하면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하긴 그게 어찌 독서삼매뿐이랴. 그 옛날 호롱불 앞에서 밤새 바느질을 하셨던 어머니가 그랬고, 베틀 위에 앉아 종일토록 베를 짜면서도 짜증 한 마디 없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던 당숙모가 그랬듯이, 사람은 그 일이 무엇이건 자기가 선택한 일을 자기가 주도적으로 처리해내고 있을 때 배고픔도 잊고 피곤함도 잊고 심지어는 애인과의 약속마저 잊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니, 이른바 행복이란 바로 거기 어디에 숨어 있는 무엇일 게다. 그러니까 요약을 하자면 나는 지금 온 몸이 쑤시고 결리고 아프면서도 행복하다는, 뭐 그런 얘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김수복 님은 중편소설 ‘한줌의 도덕’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하던 일을 접고 낙향, 뭇 생명들의 경이로운 파동을 관찰하며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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