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기관 채용비리’ 백양백태

설마 했지만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적폐’는 불명한 사실이었다. 청년실업 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상황이지만 공공기관들의 취업비리 백태는 시대를 역주행하고 이었다. 공공기관 채용비리 사실이 불거지면서 정부와 검찰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정부가 중앙정부 산하 공공기관을 상대로 채용 비리 전수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일부 기관에서 선발 인원 변경 등 2000건이 넘는 지적 사항이 드러나는 등 충격을 던져주고 있다. 일각에선 이번 채용비리 문제가 재계와 다른 분야에도 상당한 파장을 남겨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충격적이다. 공공기관 내 채용비리가 2000여건이 넘는 것으로 확인되면서 관련 부처들이 긴장하고 있다.

정부는 최근 '공공기관 채용비리 점검 관련 관계 부처 회의'를 열고 중간 결과를 발표했다. 이번 결과는 2013년부터 올해까지 중앙정부 산하 공공기관 275개 기관의 채용 과정 전반을 조사한 것이다.

전수 점검 결과 새롭게 드러난 지적사항만 총 2234건에 달한다. 유형별로는 위원 구성 부적절 527건, 규정 미비 446건, 모집 공고 위반 227건, 부당한 평가 기준 적용 190건, 선발 인원 변경 138건 등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

여기엔 부정행위 지시 및 서류 조작 등 일반 사회에서도 발생하기 힘든 직접적인 채용비리 혐의가 상당 부분 포함된 것으로 전해져 파장이 예상된다. 일부 기관은 청탁을 받고 특정인을 채용 절차 없이 입사시키는 등 묻지마 행태를 보이기도 했다.
 

‘묻지마’ 비리 행태

정부는 2234건 중 구체적인 비리 혐의가 드러난 서류 조작, 부정 지시 등의 혐의 143건에 대해서는 관련자 문책 및 징계 절차에 착수하기로 했다. 이 중 23건은 수사를 의뢰했거나 의뢰할 방침이다.

정부는 또 채용 비리 신고 센터에 접수된 290건의 제보에 대해서는 사실 관계 확인 등 후속 조사를 진행 중이다.

그 동안 공공기관 시험을 준비했거나 준비하고 있는 이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른다. 누군가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선 피해자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이른바 ‘금수저’ 논란도 다시 일고 있다. 부모 세대의 특권이 대물림하게 된다면 대한민국의 공평성 자체가 흔들릴 수 있다. 공공기관에 종사하고 있는 30대 J씨는 “사실 내부에서도 누구누구는 낙하산이라는 말이 비일비재했는데 이렇게 확인되고 보니 충격적”이라며 “채용 비리 입사자는 반드시 채용을 취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공기관 시험을 준비해왔던 20대 후반 K씨도 “소식을 듣고 망연자실했다”며 “그 동안 3년 넘게 준비했는데 공기업이 이렇다면 사기업은 오죽하겠느냐”고 울분을 터뜨렸다.

정부 관계자는 이와 관련 “적발된 내용의 상당수는 채용 절차상 흠결이거나 제도적으로 보완할 사안이었다”면서도 “부정 지시나 청탁, 서류 조작 등 채용 비리 혐의가 높은 사례도 다수 발견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특별 점검이 공공기관 채용 비리를 근절할 수 있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며 “국민 여러분의 적극적인 제보를 부탁드린다. 제보된 사안은 신속하게 조사해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검찰도 정부가 수사의뢰하는 공공기관 채용비리 사건을 신속하게 전국 각급 검찰청에 배당해 수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검찰 관계자에 따르면 강원랜드 채용비리는 춘천지검, 한국가스안전공사는 청주지검 충주지청, 한국서부발전은 대전지검 서산지청에 각각 배당돼 수사가 진행 중이다.

또 대한석탄공사는 원주지청에서, 한국디자인진흥원은 성남지청에서 사건을 배당받아 수사를 벌이고 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곳은 교육생 518명 중 493명이 부정채용된 강원랜드 채용비리다.

검찰은 올 초 이 사건 수사에 착수했지만, 최흥집 전 강원랜드 사장과 권모 전 인사팀장 2명만 업무방해 혐의로 4월에 기소하는데 그쳤다. 검찰은 지난 9월 전면 재수사에 들어갔고, 부정채용에 개입한 지역 국회의원과 국회의원 비서관 등에까지 수사를 확대했다.

지난달 말에는 최 전 사장과 염동열 의원의 지역 보좌관 박모씨 등을 업무방해와 권리행사 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하는 등 적극적인 수사 의지를 보이고 있다. 충주지청도 지난 9월 인사 채용에 개입해 면접 순위를 조작, 직원을 선발하도록 하고, 편의 제공을 대가로 금품을 받은 박기동 전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을 구속기소 했다.

검찰은 정부가 추가로 수사의뢰하기로 한 23건의 채용비리 사건도 각급 지역 관할을 중심으로 사건을 맡겨 처리할 예정이다. 검찰 관계자는 “통상적으로 채용비리가 불거진 공공기관의 본사 소재지 관할청에서 사건을 배당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특혜 채용, 정규직 전환

이번 공공기관 채용비리 사태는 각 공기업들이 저마다 ‘청렴도 노력’을 강조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것이어서 여파가 적지 않다. 누군가의 눈물을 밟고 특혜가 오갔다면 ‘적폐청산’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부 기관장은 지인 자녀의 이력서를 꽂아 넣는가 하면, 특정인이 합격할 때까지 서류전형 합격자 수를 늘리는 방법도 사용됐다. 이 과정에서 원칙과 규정은 ‘무늬’ 뿐이었다.

P기관의 기관장은 2011년 지인 자녀의 이력서를 인사 담당자에게 직접 건네면서 채용을 지시하는 대담함까지 보였다. 결국 이 이력서의 주인공은 기관장의 말 한마디에 계약직으로 특혜 채용됐고 이후 정규직으로 전환까지 된 것으로 전해진다. 기관장의 입김에 공정한 과정은 애초부터 사라진 것이었다.

K기관은 2012년 상경계열 박사를 채용하는 과정에서 공고와 무관한 전공자에게 서류 합격을 통보하는 행태를 보였다. 면접위원도 아닌 기관장은 임의로 면접장에 배석해 해당 인물을 지원한 의혹을 받고 있다.

평가점수를 조작한 경우도 존재했다. B기관은 2015년 면접 전형을 진행하면서 가점을 받을 수 있는 지원자에게 가점을 주지 않고 불합격 처리했다. 미리 합격을 결정한 지역 유력인사의 자녀를 위해 자리를 비워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J기관은 2014년 선발예정 인원의 2∼5배수를 뽑기로 한 서류전형 합격자 수를 30배로 확대했다. 합격시켜야 할 사람이 합격권에 들지 못해서였는데 이후 다시 45배수로 늘려 서류전형을 통과시켰다. ‘금수저’ 대상은 결국 막판까지 가는 무임승차를 할 수 있었다.

기획재정부는 지난 10월 16일부터 지난달 30일까지 275개 공공기관의 최근 5년간 채용 과정을 전수조사해 지적사항 2234건을 적발했다고 밝혔다. 기관장부터 채용 담당자까지 인사 청탁에 관여한 직급도 천차만별이고 행태 또한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지방공공기관 824곳과 공직유관단체 272곳까지 합하면 최종 결과는 더욱 엄청날 것이라는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유형별로는 면접위원 구성 부적절이 527건으로 가장 많았고 인사 규정 미비(446건), 모집공고 위반(227건)이 뒤를 이었다.

특정인을 추가 채용하기 위해 부당한 평가를 내린 경우는 190건이었고, 선발인원을 채용 과정에서 변경한 경우도 138건에 이르렀다.

채용비리로 볼 수 있는 ‘엄중한 위반’은 166건이나 됐다. 정부는 이 가운데 23건을 수사 의뢰할 방침이다. 정부는 또 임시로 마련한 채용비리 신고센터에 접수된 사안 중 21건을 의뢰했다.

정부 관계자는 “부당하게 불합격 처리된 사람을 구제하기 위한 방안도 심층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공기관 채용비리에 연루된 공공기관장 다수가 형사상 책임과 해임, 파면 등을 면치 못할 것으로 전해지면서 관련 기관들의 긴장감도 커지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와 관련 “채용비리를 저지른 공공기관 임직원들에게는 엄중한 민형사 책임과 민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시 한 번 확인된 공공기관의 ‘채용비리’가 이번엔 제대로 도마위에 오를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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